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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러미 벤담

다른 표기 언어 Jeremy Bent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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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48년 2월 15일, 런던
사망 1832년 6월 6일, 런던
국적 영국

요약 18~19세기 영국의 철학자·법학자. 오늘날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를 주장했다. 법률가였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슬하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7세에 웨스트민스터 스쿨을 입학하고 1763년 링커스인 법학원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1776년 <정치론 단편>을 펴냈고, 1789년 <도덕과 입법 원리 입문>에서 효용의 원리를 정리했으며, 각종 법률 개정 운동에 몰두했다.

벤담(Jeremy Bentham)

영국의 법학자·철학자이자, 변호사이다.

ⓒ Henry William Pickersgill/wikipedia | Public Domain

개요

18~19세기 영국의 법학자·철학자·변호사. 제러미 벤담은 처음으로 공리주의를 설명한 주요인물이다.

초기생애와 저작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4세부터 책을 열심히 읽고 라틴어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어린시절 대부분을 시골에 있는 두 할머니의 집에서 행복하게 보냈다. 웨스트민스터 학교에 다닐 때에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시를 잘 짓기로 유명했다. 1760년 옥스퍼드대학교 퀸스 칼리지에 입학해서 1763년 학위를 받았다. 그해 11월 링컨스인 법학원에 들어가 법률을 공부하고 고등법원의 왕좌부(王座部) 학생이 되어 맨스필드 재판장의 판결에 매료되었다. 1763년 12월 옥스퍼드에서 윌리엄 블랙스턴의 강의를 듣게 되었는데, 앞으로 재판관이 될 그의 이야기가 곳곳에 오류가 있는 허풍이었음을 금방 알아챘다고 한다.

법률 서적을 읽기보다는 주로 법 남용의 이론적 측면에 관해 사색하거나 화학실험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변호사 자격을 얻자마자 '한두 건의 소송을 맡아 최선을 다했으나 패소해' 아들이 대법관이 될 것으로 굳게 기대하고 있던 아버지를 크게 실망시켰다.

처녀작 〈정부론에 관한 단편 A Fragment on Government〉은 1776년에 나왔다. '윌리엄 블랙스턴 경의 〈영국 법 주해 Commentaries and the laws of England〉 서문에 나타난 통치 일반의 문제에 대한 검토'라는 부제는 이 책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제러미 벤담은 블랙스턴의 〈영국법 주해〉가 '크고 근본적인' 결함을 갖는 까닭은 '개혁에 대한 반감' 때문이라고 보았다. 후기 저작들과는 달리 매우 명료하고 간결한 필치로 씌어진 이 책은 철학적 급진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라 할 만하다. 이 책은 또 주권에 관한 훌륭한 글이었기 때문에 1781년 정치가 셸번 경(나중에 랜즈다운 후작 1세)이 이 책을 읽고 저자를 찾아본 뒤로 벤담은 그의 집에 자주 초대받는 손님이 되었다.

이즈음 제러미 벤담은 집필에 여념이 없었는데, 이 글은 1811년 그를 숭배하는 에티엔 뒤몽이 〈상벌론 Théorie des peines et des récompenses〉이라는 제목으로 프랑스어로 출간했고, 나중에 〈처벌의 합리적 근거 The Rationale of Punishment〉(1830)라는 제목의 영역본이 나왔다. 1785년 러시아 군대의 엔지니어로 있는 동생 새뮤얼 벤담을 방문하기 위해 이탈리아와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러시아로 가 그곳에서 〈고리대금 변호론 Defence of Usury〉(1787)을 썼다.

이 책은 러시아에서 쓴 편지들을 묶어 발행한 것으로 경제학에 관해 쓴 첫번째 글이었다. 이 책에서 제러미 벤담은 애덤 스미스의 후계자임을 보여주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스미스가 자신의 원리가 지닌 논리를 일관되게 따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각자는 자신의 이득에 대한 최고의 재판관이며 이 이득을 아무런 장애 없이 추구하는 것은 공적인 관점에서 볼 때 바람직하므로, 이 원칙을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경우에만 적용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정치경제학에 관한 이후의 저작들은 비록 그 모습은 다르더라도 이러한 자유방임주의 원칙을 따르고 있다. 〈정치 경제학 편람 Manual of Political Economy〉에서는 국가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의 목록을 들고 있는데 뒤의 목록이 앞 목록보다 훨씬 더 길다.

성숙기 저작

1788년 영국으로 돌아온 후 정치 경력을 쌓으려는 희망이 꺾이자 입법 원리를 발견하는 일에 착수했다.

이미 여러 해 동안 준비해온 대작 〈도덕과 입법 원리 입문 An Introduction to the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이 1789년에 나왔다. 이 책에서 제러미 벤담은 효용의 원리를 "이해 당사자 측에 쾌락·선·행복을 제공하고 손해·고통·악·불행을 방지해주는 경향이 있는 어떤 대상의 속성"으로 정의했다(공리주의). 벤담에 따르면 인간은 2가지 최고 동기, 즉 쾌락과 고통의 지배를 받는데, 효용의 원리는 이 상태를 인정한다.

모든 입법의 목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어야 한다. 제러미 벤담은 효용의 원리에 입각해 모든 처벌은 고통을 수반하는 악이므로 "더 큰 악을 배제할 가망이 있는 한에서만" 사용해야 한다고 추론했다.

제러미 벤담이 쓴 글의 명성은 빠르고 넓게 퍼져나갔다. 1792년 벤담은 프랑스 시민이 되었으며, 말년에는 유럽과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가 그의 조언을 정중하게 받아들였다. 벤담은 이 나라의 많은 지도 인사들과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았다. 법의 성문화가 최대 관심사 중의 하나였던 까닭에 벤담의 야심은 조국 영국이나 다른 나라의 법전 준비작업을 위임받는 일이었다.

제러미 벤담은 이 작업이 갖는 고유한 어려움을 간과했고, 각 나라의 전통과 문명이 다르면 법제도 다양하게 채택할 필요가 있다는 점도 과소평가했다고 비판받았다. 그렇지만 벤담은 감옥 개선의 선구자로 손꼽혀야 한다. 물론 벤담이 만들어낸 특수한 감옥 모형은 그의 장기인 지나친 세부묘사로 인해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 벤담은 자신이 제안한 '원형 감옥'(Panopticon)이 채택된다면 "도덕이 개선되고, 건강이 유지되며, 산업이 활성화되고, 교육이 확산되는" 등 여러 가지 바람직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러 해에 걸쳐 정부에 이 제도를 채택하도록 권유했지만 결국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그결과 1813년 보상금으로 2만 3,000파운드를 받았지만 정치가와 관료들의 개혁 열의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1823년 제러미 벤담은 철학적 급진주의 원리를 널리 알리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리뷰 Westminster Review〉 창간을 도왔다. 한때 토리당을 지지한 적이 있었으나 계몽주의 정치이론의 영향을 받아 민주주의자가 되었다.

1809년에 〈의회 개혁론 A Catechism of Parliamentary Reform〉(1817)을 써서 선거의 연례화, 선거구의 균등화, 참정권의 확대, 비밀투표 등을 주창했다. 제러미 벤담이 이 글을 바탕으로 기초한 일련의 해결책은 1818년 하원에서 채택되었다. 〈헌법전 Constitutional Code〉은 생전에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그중 1권이 1830년에 출간되었다.

제러미 벤담이 죽자 그의 주검은 유언에 따라 생전의 친구들이 입회한 가운데 해부되었다.

그리고 나서 골격을 재구성하고, 따로 떼어 미라로 만든 원래의 머리 대신에 밀랍으로 만든 머리를 붙인 다음 제러미 벤담의 옷을 입혀 유리관에 선 자세로 안치했다. 이 조상(彫像)과 머리는 런던대학 유니버시티 칼리지에 보관되어 있다.

제러미 벤담의 생애는 행복했다. 주위에는 존 스튜어트 밀의 아버지인 철학자 제임스 등 마음 맞는 친구들과 제자들이 많이 있어서 자신이 다룬 문제들에 관해 토론할 수 있었다. 더구나 친구들은 벤담 자신이 준비해 놓은 비망록의 원고 더미를 바탕으로 그의 저술들을 사실상 다시 쓰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판례의 합리적 근거 Rationale of Judicial Evidence〉(5권, 1827)는 J. S. 밀이, 〈오류론 Book of Fallacies〉(1824)은 페러그린 빙엄이 마무리했다. 제러미 벤담의 저서를 번역·재구성하는 일에 에티엔 뒤몽이 세운 공적은 훨씬 더 중요하다.

벤담에 대한 평가

벤담은 철학자이기보다는 법률비평가이자 법·정치 제도 비판가였다. 불행하게도 그는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했다. 그는 윤리의 기본 개념이라고 생각한 것들을 정의하는 데 힘을 쏟았지만, 그 정의는 대부분 지나치게 단순하거나 모호했으며, 특히 행복의 양을 계산하는 방법인 '행복 산술법'은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 아무리 호의적으로 받아들인다 해도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 벤담을 도덕가나 심리학자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그의 논증은 때때로 정교하지만 불충분하고 지나치게 모호한 전제들에 의존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행동을 묘사·설명하는 개념들을 분석하면서 너무 단순하게 처리해버렸다. 즉 사람은 철저히 이기적이기 때문에 각자는 누구의 행복이든 최대 행복을 촉진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심지어 그토록 자주 사용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정식마저도 그 의미가 분명하지 않다. 이와 아울러 반드시 지적해야 할 점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과거에 알려지지 않았던 벤담의 원고들이 출판됨으로써 법철학자로서 평판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편집자 존 보링은 벤담의 저작에서 독창적이고 논증이 잘된 것만을 가려 뽑아냈다. 허버트 L.A. 하트, J.H.번스, 프레더릭 로즌, 레아 캠포스버랄레비 등 벤담 전문가들은 최근의 학문적 성과를 통해 벤담이 이전 세대 사람들에게 비친 것처럼 엉뚱한 전설적 공리주의자라기보다는 엄밀하고 체계적인 사상가임을 밝혔다.

벤담은 제도 비판가로서도 존경할 만한 인물이다. 〈판례의 합리적 근거〉에서 그는 가급적 빨리 진실에 이르기 위해 법정이 사용해야 할 방법을 제시했고, 〈정치적 전술에 관한 에세이 Essay on Political Tactics〉에서는 그가 생각하기에 입법의회의 가장 효과적인 토론형식(주로 하원의 토론 절차에 기초함)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들을 비롯한 여러 저술에서 벤담이 관심을 둔 것은 효율성 문제이다. 그는 효율성을 행복이라는 맥락에서 정의하고 있지만 독자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 설사 그렇게 읽더라도 행복을 벤담이 생각한 대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벤담이 행복과 관련해서 세운 가정들은 지나치게 평범하고 감각적이다. 독자들은 그 가정을 받아들이면서도 행복이란 쾌락의 맥락에서 정의하거나 측정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벤담의 탁월하고 창조적이며 독창적인 점(이런 점은 아주 많음)은 '행복 산술법'이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서 반드시 비롯하는 것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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