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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42년 12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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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727년 3월 20일 |
국적 | 영국 |
요약 17~18세기 영국의 물리학자.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고, 반사망원경을 최초로 발명했다. 케임브리지대학 재학 시절에 데카르트의 기계적 철학, 피에르 가생디가 부활시킨 원자론, 로버트 보일의 책을 통한 화학적 지식, 헨리 모어의 허미티시즘 전통을 접했다. 1687년 만유인력의 원리를 처음으로 밝혀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다. 제임스 2세의 가톨릭 정책에 반대했고, 명예혁명 후 혁명회의에 참석했다. 왕립학회 회장을 지냈고, 기사작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에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광학〉 등이 있다.
개요
17~18세기 영국의 물리학자·수학자.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해 17세기 과학혁명의 상징적인 인물로 역사에 남았고, 18세기 계몽사상의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유년기
아이작 뉴턴은 1642년 소지주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생후 2년 만에 재가해서 뉴턴의 곁을 떠났고 할머니 손에 의해 양육되었다. 의붓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9년 동안 뉴턴은 어머니와 떨어져 지냈고, 이것은 그의 심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후에 논문을 발표할 때마다 보인 심리적 불안감이나 비판에 대한 지나친 반응 등은 모두 어렸을 때의 모성결핍에서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청년기
그랜트햄에서 기초교육을 마친 후 1661년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당시는 과학혁명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지만 다른 대학과 마찬가지로 케임브리지대학도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 체계를 고수하고 있었다(기계론,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아이작 뉴턴도 다른 학생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으나, 곧 데카르트를 접하게 되었고 우주의 모든 물리적 현상을 운동과 물질로 설명하려는 기계적 철학에 매료되었다.
1664년경부터 쓰기 시작한 〈몇 가지 철학적 문제들 Quaestiones Quaedam Philosophicae〉이라는 기록은 과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신호였다. 아이작 뉴턴은 제목 아래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첨가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나의 친구다. 하지만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진리다." 아이작 뉴턴이 다룬 '문제들'을 보면 그가 과학혁명의 근간이 되는 새로운 생각들과 접촉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데카르트의 저작들뿐만 아니라 피에르 가생디가 부활시킨 원자론도 공부했는데 아이작 뉴턴은 여기에 더욱 끌렸다. 로버트 보일의 책에서는 화학에 관한 지식을, 케임브리지의 플라톤주의자였던 헨리 모어를 통해서는 허미티시즘 전통(Hermetic tradition:자연현상을 연금술과 마술적인 개념들을 가지고 설명하는 전통)을 접했다. 자연철학의 중요한 두 전통인 기계적 철학과 허미티시즘 전통은 지속적으로 아이작 뉴턴의 학문에 영향을 미쳤다(헤르메티시즘).
이 시기부터 수학에 관한 연구도 시작했다. 아이작 뉴턴은 데카르트의 〈기하학 La Géometrie〉에서 대수적인 기법을 기하학에 적용하는 법을 배웠고 고전기하학도 깊게 공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항정리를 발견했고 미적분학을 개발했다.
1669년까지는 그동안의 성과를 종합하여 〈무한급수에 의한 해석학에 관하여 De Analysi per Aequationes Numeri Terminorum Infinitas〉를 펴낼 정도로 발전했다. 그후 2년 동안 보완해서 〈급수와 유율(流率)의 방법에 관하여 De methodis serierum et fluxionum〉를 수고(手稿) 형태로 세상에 내놓았다. 1665년 4월 학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아이작 뉴턴은 자신만의 새로운 철학과 수학의 세계를 펼쳐나가고 있었다.
1665년 4월 학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아이작 뉴턴은 자신만의 새로운 철학과 수학의 세계를 펼쳐나가고 있었다. 그해 흑사병으로 대학이 문을 닫게 되자 고향집에 돌아와 2년 동안 아이작 뉴턴이 배운 것들에 대해 여유를 갖고 명상했다. 이 기간 동안 미적분학의 기초가 다져지고, 〈색깔에 관하여 Of Colours〉에 정리될 중요한 내용들이 나타난다. 또 원운동의 요소들을 분석했고 이것을 달과 다른 행성들에 적용해서 역제곱법칙(inverse square law:힘의 크기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법칙)을 유도했다.
그러나 이 발견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1667년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우로 선출되었다. 2년 후에는 아이작 배로우의 후임으로 루카스 석좌(碩座) 수학교수로 임명되었다. 아이작 뉴턴은 광학에 대한 강의로 교수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내용은 〈색깔에 관하여〉로 발전되고 후에 〈광학 Opticks〉의 제1권이 되었다.
아이작 뉴턴은 데카르트의 영향으로 빛이 기계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데카르트와는 달리 빛을 원자와 같은 작은 입자들이 공간을 이동하면서 생기는 현상으로 보았다. 아이작 뉴턴이 광학에 끼친 가장 큰 공헌은 무엇보다도 색에 관한 것이었다. 뉴턴은 빛은 원래 흰색의 단색광이고 변형에 의해서 여러 가지 색깔로 나타난다는 고대로부터의 색깔이론을 부정했다.
1665~66년에 수행한 일련의 실험을 통해 빛이 단색광이 아니라 혼합광이라는 것을 밝혔고, 색깔은 이질적인 혼합광이 개개의 요소로 분해되면서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또 각각의 광선이 일정한 각도로 굴절되는 성질 때문에 무지개와 같은 현상이 생긴다고 밝혔다. 이후부터 빛의 이질성은 물리광학의 기본이 되었다. 한편 렌즈의 색수차(色收差)를 제거하는 방법을 모색하던 중 반사망원경을 최초로 발명했다(빛의 입자설, 망원경). 아이작 뉴턴의 색에 관한 이론은 런던의 왕립학회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졌다.
1671년 반사망원경의 발명으로 아이작 뉴턴의 이름이 알려졌고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에 고무되어 1672년 빛과 색깔에 관한 논문을 학회에 제출했다. 이 논문은 비교적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학회 지도자였던 로버트 훅과의 마찰을 불러일으켰다. 훅의 신랄한 비판은 뉴턴을 격노하게 만들어 결국 한동안 모든 외부와의 관계를 끊고 고립생활에 들어가게 했다.
장년기
1675년 런던을 방문한 아이작 뉴턴은 훅이 자신의 색깔이론을 인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자신을 얻어 얇은 막에서의 색깔현상을 다룬 2번째 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문은 빛이 반사를 통해서도 분해될 수 있음을 보여주어 고체의 색현상을 설명했고, 뉴턴의 원무늬(Newton's rings) 발견도 싣고 있다. 이것은 후에 〈광학〉 제2권의 내용이 된다. 훅과의 관계는 이 논문의 발표로 더욱 악화되는데, 훅은 아이작 뉴턴이 자신의 생각을 도용했다고 주장했다.
또 영국의 한 예수교 분파도 이 논문의 내용을 공격했다. 1678년까지 계속된 이 싸움은 아이작 뉴턴의 신경쇠약을 동반한 발작으로 끝을 맺게 되는데, 그후 6년 동안 그는 외부와 완전히 격리되었다. 이 격리기간 동안 허미티시즘 전통의 영향을 크게 받아 이전부터 흥미를 갖고 있던 연금술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자연관도 큰 변화를 겪어서 기계적 철학에서 벗어났다. 1679년 빛의 현상을 설명하려고 도입했던 에테르(ether)와 그에 수반된 눈에 보이지 않는 체계를 포기하고, 대신 인력(引力 attraction)과 척력(斥力 repulsion)을 도입했다. 인력과 척력은 원래 화학적 친화력, 화학반응으로 생기는 열, 액체의 표면장력, 모세관현상 등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했는데, 허미티시즘의 동감(sympathy)과 반감(antipathy)이라는 개념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었다.
아이작 뉴턴은 이 개념을 기계적 철학의 한 변형으로 보았다. 사실 인력은 정량적으로 규정될 수 있었고 17세기 과학의 두 주요 조류인 기계적 전통과 피타고라스적 전통을 잇는 다리 역할을 했다(헤르메티시즘).
처음에는 인력과 척력을 지상의 현상에만 적용했다. 그러나 1679년말부터 훅의 편지에서 암시를 받아 행성의 운동에도 이 개념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아이작 뉴턴에게 보낸 편지에서 훅은 인력에 의해서 직선운동이 지속적으로 방향을 바꾸어나간다는 점과 중력은 거리의 제곱에 비례해서 감소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직관에 의한 추측일 뿐 구심력이나 케플러의 제3법칙에서 수학적으로 얻어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아이작 뉴턴은 이미 10년 전에 이러한 관계를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턴 자신은 후에 훅의 편지에서 타원궤도가 한 초점을 중심으로 역제곱의 인력관계를 수반한다는 암시를 받았다고 고백했다. 또 인력이 지속적으로 작용해서 행성의 궤도이탈을 방지한다는 훅의 생각은 힘을 천체운동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했지만 아직 중력(gravitation)이라는 개념에는 못미쳤다.
1684년 8월 궤도역학의 문제로 곤란을 겪던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Edmond Halley)가 아이작 뉴턴을 방문했다. 이에 자신을 얻어 얇은 막에서의 색깔현상을 다룬 2번째 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문은 빛이 반사를 통해서도 분해될 수 있음을 보여주어 고체의 색현상을 설명했고, 뉴턴의 원무늬(Newton's rings) 발견도 싣고 있다. 이것은 후에 〈광학〉 제2권의 내용이 된다. 훅과의 관계는 이 논문의 발표로 더욱 악화되는데, 훅은 아이작 뉴턴이 자신의 생각을 도용했다고 주장했다.
만유인력의 법칙 발견
아이작 뉴턴의 새로운 역학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운동법칙에 근거한다. 첫째, 물체는 외부에서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현상태를 유지하려 한다. 둘째, 운동량의 변화는 주어진 힘에 비례한다. 셋째, 모든 작용에는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인 반작용이 있다. 이 운동법칙으로 구심력을 계량적으로 유도해낼 수 있었고, 케플러의 제3법칙을 대치할 수 있었다. 그결과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의 운동뿐 아니라 지구나 목성 주위를 도는 위성의 운동도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아이작 뉴턴은 태양계의 모든 천체운동을 지배하는 단일한 힘을 상정하고 그것을 중력(gravitas:라틴어로 '무거움'이라는 뜻)이라고 불렀다. 이 중력(또는 만유인력)은 혜성의 운동이나 조석현상의 설명에도 성공적으로 적용되었고, 우주의 모든 물질입자들 사이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다.
〈프린키피아〉의 출판으로 아이작 뉴턴은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다. 대륙의 과학자들은 원거리(遠距離)작용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뉴턴의 이론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기술적인 완벽함에는 찬사를 보냈다. 영국에서는 젊은 과학자들이 곧 뉴턴의 뒤를 따랐고 그의 후원하에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그래샴 칼리지와 같은 주요대학의 교수직을 이어나갔다.
정치 활동
열렬한 개신교도였던 아이작 뉴턴은 제임스 2세의 가톨릭 정책에 반기를 들었고 명예혁명 후 케임브리지대학교를 대표하여 혁명회의에 참석했다. 이 기회를 통해 폭넓은 교제를 하게 되고 철학자 존 로크와도 친교를 맺었다. 런던 생활을 즐기게 된 아이작 뉴턴은 친구인 수학자 파티오와 찰스 몬티규(후에 핼리팩스 경이 됨)의 도움으로 1696년 조폐국 이사로 임명되었다.
얼마 후에는 국장으로 승진해 매년 2,000파운드의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뉴턴은 화폐의 재주조가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동안 정력적으로 활동했고 임무를 완성한 후에는 화폐의 위조를 방지하는 데 힘썼다. 그당시 런던의 위조범들에게 아이작 뉴턴은 공포의 대상이었고 실제로 많은 위조범들을 교수대로 보냈다.
런던으로 거처를 옮긴 아이작 뉴턴은 영국 과학의 대부 역할을 했다. 1703년 왕립학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705년 과학자로서는 최초로 기사작위를 받았다. 뉴턴은 왕립학회를 독단적으로 운영했다. 왕립 그리니치 천문대 대장이자 왕실천문가였던 존 플램스티드는 〈프린키피아〉를 집필하는 데 필요한 많은 관측자료들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뉴턴에게 우호적이지 않아 부당한 대우와 모욕을 받았다.
독일의 철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의 불화는 잘 알려져 있다. 현재는 아이작 뉴턴이 라이프니츠보다 훨씬 먼저 미적분학을 개발했고 라이프니츠도 독립적으로 미적분학에 도달했다고 인정받고 있다. 문제는 뉴턴이 자신의 연구결과를 일찍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1694년에 나온 라이프니츠의 논문이 세상에 먼저 알려졌다는 점이다.
처음에 추종자들의 부추김에 못이겨서 시작한 우선권 논쟁은 아이작 뉴턴이 이성을 잃어버릴 만큼 화를 내면서부터 추잡한 싸움으로 변했고, 라이프니츠 사후에도 계속되었으나 뉴턴의 죽음으로 하여 싸움은 끝을 맺었다. 뉴턴은 말년을 〈프린키피아〉와 〈광학〉을 수정·보완·번역하는 데 바쳤다. 최후까지 왕립학회를 주관했는데, 회의 도중 조는 때가 많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뉴턴의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평가
뉴턴은 17세기 과학혁명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광학·역학·수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고 1687년에 출판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는 근대과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책으로 꼽힌다. 뉴턴의 역학적 자연관은 18세기 계몽사상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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