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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다른 표기 언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동의어 신은 죽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요약 테이블
출생 1844년
사망 1900년
국적 독일
대표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독일 태생의 철학자. 실존철학의 선구자. 니체의 아버지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생일날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프리드리히로 지어주었다. 어려서부터 특출나 주변의 인정을 받았고, 십대에 벌써 자서전을 쓸 준비를 했다. 음악에 심취했던 그는 《비극의 탄생》을 써 바그너에게 바치지만, 바그너가 기독교 예술을 추구하자 결별을 선언한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이것은 쇼펜하우어가 자신을 위해 써놓은 책이라고 말하며 깊이 빠져들었다. 박사 학위 없이 추천사만으로 바젤 대학의 교수가 되었지만, 끊임없는 병마와 싸워야 했다.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는 와중에도 집필을 계속했고, 결국 길거리에서 쓰러져 12년 동안 혼수상태로 있다 세상을 떠났다.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는 서구 기독교 전통을 부수고 그곳에 새로운 가치를 세우려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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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청일점 꼬마 목사

니체는 독일의 작센 주(동부에 있으며 체코와 폴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음) 뢰켄에서 개신교 목사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각주1) 의 세 공주를 가르치는 가정교사를 하다가 왕의 특별한 주선으로 뢰켄의 목사가 되었다. 왕의 생일 축제날 아들이 태어나자 아버지는 크게 기뻐하여 아들의 이름을 '프리드리히 빌헬름'으로 지어주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어느 날 밤늦게 집에 돌아오다가 현관 앞 층계에서 넘어져 뇌진탕을 앓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5세에 불과한 젊은 아내와 세 자녀를 남긴 채. 그리고 8개월 후에는 갓 두 돌이 넘은 남동생 요제프마저 죽었다.

5세밖에 안 된 니체는 어머니와 누이동생과 함께 외가로 옮겨갔다. 그때부터 그는 외할머니와 어머니, 노처녀인 이모 두 명, 여동생 틈에서 자라났다. 그런데 이 여인들은 집안의 유일한 사내인 니체를 너무 귀여워한 나머지 그가 여성적이고 섬세하며,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로 자라게 만들었다.

어린 시절의 니체는 무엇보다 기억력이 뛰어나 '꼬마 목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그는 성경 구절과 찬송가를 기가 막히게 암송했고, 사람들은 그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워 즉흥 연주를 했고, 8세 때부터 작곡을 하는 등 음악에 남다른 재주를 보였다. 14세 때에 벌써 자서전을 쓸 준비를 했다. 명문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특출한 학생으로 손꼽혔는데, 무엇보다도 음악과 독일어 작문에서 월등한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수학과 철자법은 다소 부진했다.

쇼펜하우어에 빠지다

니체는 학교의 경직된 분위기와 낡은 도덕을 비웃으며 반항적 기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번은 학생들을 감독하고 보고서를 제출하는 일을 맡았는데, 그는 다소 장난기 섞인 익살스러운 내용으로 기록했다. 엄격한 선생님들은 토요일에 그를 종교재판에 회부했고, 벌칙으로 세 시간 동안의 감금과 몇 차례의 외출금지를 선고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본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입학 직후부터 대학생 사교 클럽에 들어가 회원들과 함께 극장을 출입하는가 하면 담배와 술, 여자에 탐닉한다. 원래 자신의 서투른 사교성을 극복해보려는 것이 클럽에 가입한 주목적이었지만, 곧 염증을 느끼고 탈퇴해버린다.

그는 어머니의 희망대로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과에 적을 두었다. 그러나 성적은 신통치 못했다. 기독교에 대한 회의에 빠져 있을 무렵, 리츨(독일의 개신교 신학자이자 자유주의 신학의 거두) 교수의 권유도 있고 해서 결국 신학을 버리고 만다. 이듬해 리츨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겨간 그는 본 대학에서의 실패를 만회하려는 자세로 문헌학 연구에 정열을 쏟았다.

그러던 어느 날, 헌 책방에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구입해서는 새벽 6시부터 다음날 밤 2시까지 꼬박 2주일에 걸쳐 탐독했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쇼펜하우어는 꼭 나를 위해서 이 책을 써놓은 것 같다."

이것은 니체가 철학과 관계를 맺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후부터 그는 쇼펜하우어 철학에 심취해 친구들이나 여동생에게까지 쇼펜하우어를 공부하도록 설득했다.

끊임없는 병마와 싸우다

23세 되던 해에 군대에 징집되어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1년 동안 포병대에서 근무했다. 그러던 중 말에서 떨어져 가슴에 타박상을 입고 제대했는데, 이 사건은 그를 한평생 괴롭히는 원인이 된다.

복학하여 대학을 졸업한 니체는 리츨 교수의 추천으로 박사 학위도 없이 스위스 바젤 대학의 교수로 초빙되었다. 리츨 교수의 추천사 내용을 보자.

"나는 벌써 39년이란 세월 동안 젊고 유능한 젊은이들이 내 앞에서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니체처럼 이렇게 젊은 나이에, 그리고 이렇게 빨리 성숙한 청년을 일찍이 본 일이 없다.……니체는 천재다. 그는 하고자 하는 일을 무엇이나 이룰 수 있을 것이다."

25세 되던 해에 니체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그는 이미 교수이므로 우리는 동료를 테스트할 수는 없다'고 하는 교수회의의 결의에 의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물론 2년 전에 써놓은 다소 의심스런 논문 〈디오게네스 레어티루스〉를 학위 수여의 근거로 삼는다는 전제가 붙어 있긴 했지만.

그는 바젤 대학에서 대학이라는 울타리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풍부한 강의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편두통, 치질, 가슴앓이, 류머티즘, 지독한 근시 같은 각종 질병으로 시달리던 니체는 보불전쟁이 나자 위생병으로 지원하여 종군한다. 그러나 이질과 디프테리아에 걸려 건강이 크게 나빠졌다. 약을 잘못 쓴 탓에 이때부터 극심한 신경쇠약과 위장병으로 평생 병마와 싸우게 되는데, 그는 항상 소화제와 수면제를 복용해야 했다.

27세에는 병으로 휴가를 얻었는데, 그 와중에서도 6주일 만에 《비극의 탄생》을 써서 출판했다. 이 책은 기독교를 비방한 것인데, 음악가 바그너와 몇몇 친구들로부터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학계는 이 책에 지독한 반감을 나타냈고, 학생들마저 그를 외면함으로써 다음 해 겨울 학기에는 단 한 사람의 청강자가 있었을 뿐이다. 물론 얼마 후 학생들이 되돌아오긴 했으나, 그 이전에 가졌던 니체 자신의 명성을 회복할 수는 없었다.

여성 앞에만 서면 수줍음을 타다

니체는 여성에게 비정상적일 정도로 수줍음을 탔다. 하루는 하인에게 억지로 이끌려 사창가에 갔는데, 그는 잠시도 참지 못하고 재빨리 도망쳐 나왔다. 한번은 먼발치에서 본 여배우에게 푹 빠져 특별히 그녀를 위해 작사 작곡한 노래를 그녀의 집으로 보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는 답장이 오지 않았다. 또 음악가 바그너의 부인 코시마를 연모했으나 훗날 그녀를 자기 작품의 등장인물로 형상화했을 뿐이다. 스위스에 머물 적에는 자신의 머리에 떠오르는 젊은 여자들에게 모두 초청장을 보냈다. 하지만 역시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38세 때 비로소 21세의 매력적인 여성에게 완전히 사로잡히고 마는데, 그녀의 이름은 루 살로메각주2) 로 젊고 총명한 데다 또 그를 숭배하고 있었다. 니체가 그녀를 처음 만나 한 말은 "어떤 운명적인 힘이 우리를 서로 만나게 했나요?"였다. 그녀를 자신의 유일한 제자라고 생각한 니체는 그녀를 믿고 마음속 깊숙이 감추어둔 비밀스런 이야기까지 다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볼 엄두조차 내지 못해 마침내 한 친구를 전령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 친구 역시 루 살로메에게 반해 있던지라 자신이 먼저 청혼을 해버렸다. 물론 니체는 일이 이렇게 될 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당연히 그 친구는 부정적인 대답을 알려왔고, 이렇게 하여 니체와 루의 관계는 끝나고 말았다. 니체는 이때를 가리켜 '내 생애 가운데 최악의 겨울'이라 회고했고, '결혼한 철학자는 코미디에나 어울릴 만큼' 결혼은 그로부터 멀어져갔다.

결국 유일하게 니체의 곁에 남아 있던 여자는 그의 누이동생 라마였다. 그녀는 니체를 두고 '살아 있을 때나 죽은 후에나 나의 남자'라고 선언까지 했다. 그녀는 니체를 교묘하게 휘어잡아 꼼짝 못하게 하고, 심지어 그의 유고를 발간하는 데 있어서 서류를 위조하는 것조차 서슴지 않았다.

이런 사정을 볼 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너, 여자한테 가니? 그럼 채찍을 잊지 마라!'라는 구절이 여성에 대한 니체의 태도를 완전히 잘못 전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니체는 여자 앞에서 채찍을 들만큼 용감한 사나이가 아니었다. 그는 여자를 경멸하면서도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이와 같은 이중성은 어릴 때 집안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지낸 환경과 종교적 교육 때문에 생긴 결과로 보인다. 한편으로 그가 대학 시절 술과 여자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한 결과 매독에 걸렸고, 말년의 정신마비 증세 역시 이 후유증이라는 설이 있다.

연기된 장례식

"음악이 없었던들 나에게는 인생이 전혀 무의미했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할 만큼 니체는 음악을 사랑했다. 시간이 가는 것도 잊은 채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며 즉흥곡을 연주하여 청중을 사로잡기도 했다. 그런 그가 마침내 바그너를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니체는 바그너의 열렬한 숭배자가 되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최초의 저서이자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한 《비극의 탄생》을 써서 바그너에게 바친다. 그러나 4년 후인 1876년, 바그너의 새로운 오페라를 보러 갔다가 환멸을 느낀 니체는 결국 그와 결별한다. 그가 보기에 바그너는 기독교적 예술을 추구할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는 권력의 시녀로 전락해버렸다. 니체는 이때의 심정을 이렇게 읊었다.

"아아, 너도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는구나. 너마저……. 아, 정복당한 자여!"

니체에게 적나라한 비판을 받은 바그너는 공격적인 내용이 담긴 편지를 잡지에 실어 공개해버렸다. 이 일로 극심한 타격을 받은 니체는 그 후로 바그너를 마음속에서 아예 지워버렸고, 어쩌다 마주치는 일이 있어도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외면했다.

건강 때문에 강의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니체는 우연히 네덜란드 여성 음악가를 알게 된다. 그러나 너무 성급하게 구혼했다가 거절당하고 만다. 다시 여성에게 상처를 입은 그는 알프스 산중으로, 지중해 연안으로 떠돌아다녔다. 몸의 병 역시 극도로 악화되어 마침내 죽음을 각오해야 할 상황에까지 이르렀는데, 심지어 동생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

"약속해라! 내가 죽거든 내 관 옆에는 친구들만 서게 하고, 쓸데없는 조문객을 거절한다고. 목사나 누구를 막론하고 말하지 못하는 내 시체 옆에서 거짓말을 못하게 하고, 나를 정직한 이교도(기독교 이외의 종교를 믿는 사람)로서 무덤에 들어가게 한다고."

그러나 건강이 회복되는 바람에 이 영웅적인 장례식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정신병자의 넋두리

35세 때에는 교수직을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여러 가지 원인이 겹쳤는데, 먼저 견디기 힘든 두통과 눈의 통증, 우울 증세를 들 수 있다. 또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 대학교수의 의미에 대한 회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보 같은 학생들을 상대하고 있다가는 자신까지 바보가 되고, 재능 없는 다른 교수를 상대하고 있다가는 자신의 재능까지 더럽혀진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니체는 불과 10여 일 만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1, 2, 3부를 완성했다. 하지만 이 책은 1년 동안 겨우 60부가 팔려 나갔을 뿐이다. 그나마 제4부는 출판사를 구하지 못해 자비로 출판해야 했다. 그는 40부를 인쇄하여 친구 7명에게 증정했다. 무엇보다 니체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천재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외로워했고, 그리하여 어떤 때는 자기 책을 들여다보며 몇 시간씩 울기도 했다. 그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고백했다.

"영혼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외침에 대해 한마디의 대답도 듣지 못하는 것, 그것은 너무나 끔찍한 체험이었다."

44세 되던 해에 이탈리아의 토리노로 이사한 뒤, 니체는 점점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병세가 심해지는 가운데에서도 《우상들의 황혼》 《이 사람을 보라》 등과 같은 마지막 저작을 써냈다. 이 책들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경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어떤 해설가들은 이것들을 단순히 '정신병자의 넋두리'일 뿐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그 누구도 자유로운 정신의 반란이 숨어 있는 그의 글에 동조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모든 가치의 전도(轉倒, 뒤집음)를 위해 여러 해 동안 벌여온 고독한 투쟁은 니체의 체력만이 아니라 정신력까지 탕진하게 했다. 급기야는 시력마저도 거의 잃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말년에 쓴 그의 저작들은 악화되어가기만 하는 그의 신체적 조건을 이겨내는 처절한 몸부림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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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간의 혼수상태로 생을 마치다

45세 때에 급속히 몸이 쇠약해진 니체는 토리노의 길거리에서 발작을 일으키고 쓰러졌다. 그는 마부에게 학대받는 말을 끌어안으며 흐느껴 울었다. 혼란스러운 이야기로 횡설수설하는 그를 사람들은 집으로 옮겼다. 이틀 만에 깨어난 그는 완전한 정신착란에 빠졌고, 예나 대학병원에서 진행성 마비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이를 두고 기독교인들은 그가 날벼락을 맞은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평생을 불우하게 보낸 니체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가 쓰러진 뒤였다. 그 후로 그는 계속하여 악기를 치고 노래를 하면서 거리를 배회했는데, 간혹 "나는 신이다. 다만 변장하고 있을 뿐이다"고 외쳤다고 한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간호와 여동생의 보살핌 속에서 12년이라는 세월을 혼수상태에서 헤매던 니체는 끝내 1900년에 심장 쇠약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에는 그의 희망에 따라 친구 몇몇이 고별사를 낭독했다.

니체가 죽은 뒤 방대한 양의 유고와 편지는 누이동생 부부의 손에 넘어갔다. 사실 니체는 바그너의 신봉자이자 지독한 반유대주의자인 매부를 매우 싫어했다. 그렇지만 결국 유고가 누이동생 부부에 의해 멋대로 왜곡되고 꾸며져 출판됨으로써 그의 저작은 오랫동안 반유대주의자들과 파시스트들에 의해 악용되었다. 사실 니체는 독일의 군국주의를 거부하고 히틀러를 증오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서구문명에 대한 그의 신랄한 비판은 새로운 유럽 건설을 주창한 히틀러에게 유리한 입장을 마련해주고 말았다.

철학 속으로

니체는 기독교와의 대결을 통해 모든 기존 가치에 대한 거부를 선언했다. 니체는 천박하고 병들고 약한 자만을 위하는 기독교 도덕은 노예도덕으로서 마땅히 파기되어야 하며 대신에 고귀하고 건강하고 힘센 자들을 위한 군주도덕이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이제까지의 모든 가치 기준이었던 신에 대해 그 죽음을 선고하고('신은 죽었다!'), 새로운 개념으로서의 초인(超人)사상을 피력했다.

초인이란 첫째, 대지(大地)의 의미다. 이 땅에 충실할 뿐, 하늘나라의 희망을 말하는 자들을 믿지 않는 자다. 둘째, 초인은 신의 죽음을 확신하는 자다. 셋째, 초인이란 영겁회귀의 사상마저 깨달을 수 있는 자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한 윤회를 거듭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이미 여러 차례 되풀이해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런 자가 바로 초인이다.

니체는 머지않아 유럽에 허무주의(니힐리즘)가 도래할 것을 예언했다. 그러나 그 허무주의를 '동일한 것이 계속하여 다시 돌아오는' 영겁회귀의 사상으로 붙잡으려 했다. 그리하여 선악을 초월한 입장(선악의 피안)에서 도리어 현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강조하고 나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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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률 집필자 소개

전남 영광 출생. 전남대학교 철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전북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광주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교내에서 윤리교육과 학과장, 학생생활연구..펼쳐보기

출처

위대한 철학자들은 철학적으로 살았을까
위대한 철학자들은 철학적으로 살았을까 | 저자강성률 | cp명평단문화사 전체항목 도서 소개

세상을 바꾼 철학자 30인의 알려지지 않은 철학 이야기를 통해 세계철학사의 흐름을 읽다. 철학자의 사상보다는 삶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들의 삶 역시 평범한 인간과 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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