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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94. 11 또는 1495.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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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66. 9. 5/6, 헝가리 시겟바르 근처 |
국적 | 오스만 |
요약
오스만 제국의 술탄(1520~66 재위).
별칭은 Süleyman the Magnificent, Süleyman the Lawgiver. 터키어로는 Süleyman Muhteşem, Süleyman Kanuni.
개요
대담한 원정을 벌여 영토를 확장했고 법률·문학·예술·건축 분야에서도 오스만 문명의 가장 독특한 업적을 쌓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초기생애와 치세
쉴레이만은 술탄 셀림 1세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인 바예지드 2세 치세 동안에는 크림 반도에 있는 카파의 총독(sancak beyi)을 지냈고, 셀림 1세의 치하에서는 소아시아 서부지방의 마니사 총독이었다. 1520년 9월 쉴레이만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술탄이 되었고, 즉위하자마자 중부 유럽과 지중해 지방에서 그리스도교 세력에 대항해 전쟁을 시작했다. 1521년 베오그라드를 함락시켰고, 1522년 오랫동안 성 요한 기사단의 지배하에 있던 로도스를 빼앗았다. 그는 1526년 8월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 군대를 격파했으며 헝가리 왕 로요슈 2세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헝가리의 왕위가 비게 되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대공(大公) 페르디난트 1세와 트란실바니아의 군주(voivode) 야노슈 자폴리아가 왕위를 노렸고, 또 토착세력의 후보자들은 합스부르크가의 인물이 왕이 되는 데 반대했다.
쉴레이만은 야노슈를 헝가리의 봉왕(封王)으로 임명하는 데 동의했고, 1529년 합스부르크가가 더이상 간섭하지 못하게 하려고 비엔나를 포위공격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도의 저항과 함께 시기와 거리상으로 문제점이 많은데다 악천후와 보급 부족이 겹쳤기 때문에 포위를 풀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 전쟁은 당장에는 성공적이었다. 전쟁 결과 야노슈는 그뒤 1540년에 죽을 때까지 헝가리의 대부분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1532년에 감행한 대규모의 제2차 원정은 귄스의 그리스도교도들의 훌륭한 방어 때문에 유명해졌지만 오스트리아 국경지대에 대한 단순한 공격으로 끝나버렸다.
쉴레이만은 당시 동방문제에 정신을 빼앗겼고, 또한 오스트리아는 단번에 정복될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1533년 페르디난트 대공과의 평화협정을 받아들였다.
1540년 야노슈가 죽고 오스트리아군이 중부 헝가리 지방에 재차 진주하자 쉴레이만은 야노슈 생존시에 세웠던 해결책을 근본적으로 수정했다. 1541, 1543년 거듭 원정이 있은 결과 3부분으로 나누어진 헝가리가 탄생했다. 북부와 서부 변경에 합스부르크 헝가리가 생겨났고, 도나우 강 중류를 따라 오스만 헝가리가 세워졌다.
오스만군은 이 지역을 직접 영구적으로 점령했으며 부도에 근거지를 설치했다. 마지막으로 트란실바니아 지방은 야노슈 자폴리아의 아들 존 지기스문트가 다스렸으며 오스만 제국 정부의 속국이었다. 1543~62년에도 헝가리 전쟁은 계속되었다. 평화협정은 깨졌고 양측의 대치상황에는 별 뚜렷한 변화가 없었다. 가장 특기할 사건은 1532년 오스만이 테메스바르(티미쇼아라)의 바나트를 함락시킨 것이다. 장기간의 협상을 통해 1562년 헝가리의 현상유지를 인정하는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페르시아 전쟁
쉴레이만은 페르시아에 대해 3번의 대규모 전쟁을 일으켰다.
제1차 전쟁(1534~35)을 통해 오스만은 동부 소아시아의 에르주룸 지방의 통치권을 확보했고 동시에 이라크를 정복했다. 이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그는 셀림 1세가 시작한 과업을 완성했다. 제2차 전쟁(1548~49)에서는 반 호수 부근의 영토를 획득했다. 그러나 제3차 전쟁(1554~55)에서는 페르시아의 사파위 왕조에 대한 정복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스만과 사파위 왕조 사이의 공식적인 첫 평화조약은 1555년에 맺어졌다. 그러나 이것으로 오스만 술탄이 직면하고 있는 동쪽 국경문제가 확실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이란).
쉴레이만의 치세 동안 오스만의 해군력은 괄목할 만하게 성장했다.
서구에는 바르바로사로 알려진 하이르 앗 딘이 오스만 함대의 카푸단(kapudan : 제독)이 되어 그리스의 프레베자 앞바다에서 베니스와 스페인의 연합함대를 격파했다(1538). 이 해전의 승리로 오스만은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패배할 때까지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1551년 북아프리카의 트리폴리가 오스만의 수중에 떨어졌다. 오스만 제국은 1560년 트리폴리를 탈환하려는 스페인의 강력한 원정대를 자르바(제르바)에서 분쇄했으나, 1565년 성 요한 기사단으로부터 말타를 함락시키려다가 실패했다.
오스만 해군은 당시에 멀리 인도까지 진출했다. 1538년 이집트에서 출발한 일단의 함대가 인도로 항진하여 포르투갈인이 장악하고 있던 디우라는 도시를 탈취하려고 하다가 실패한 사건이 있었다.
쉴레이만의 말년은 아들들의 다툼으로 어지러웠다. 무스타파 왕자가 소아시아 지방에서 불만의 초점이 되자 1553년에 쉴레이만은 명령을 내려 아들을 처형했다. 뒤이어 1559~61년 왕위계승을 놓고 셀림 왕자와 바예지드 왕자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다. 이 다툼은 바예지드가 패배하여 처형됨으로써 일단락지어졌다.
쉴레이만은 1566년 헝가리의 시겟바르 성(城)을 공격하던 도중에 죽었다.
내치
쉴레이만의 내치(內治)는 전쟁과 해군의 성과보다도 더욱 주목할 만하다.
그는 이브라힘, 뤼스템, 메메드 소콜루 등의 대(大)와지르(총리)와 같은 비범한 행정가와 정치가들을 항상 자신의 주위에 두었다. 유명한 아부 알 수우드(호카 첼레비)와 케말파샤자데 같은 '울라마'(이슬람 법률 전문가)가 시대를 수놓았고 또한 투르크의 위대한 시인 바키와 건축가 시난이 활약했다. 쉴레이만은 그리스도교도에게서 빼앗은 지역의 방어를 위해 튼튼한 성채를 쌓았고 이슬람 세계의 도시(메카·다마스쿠스·바그다드 등)에 모스크·다리·수로 등의 공공시설물들을 세웠다.
수도 이스탄불에는 건축가 시난이 술탄을 위해 여러 개의 유명한 모스크를 건축했다. 그중 하나에는 술탄의 이름(Süleymaniye Cami)을 붙였고, 다른 사원에는 술탄의 와지르인 뤼스템과 메메드 소콜루의 이름을 붙였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예전에 비잔틴 제국의 도시였던 콘스탄티노플을 투르크와 이슬람의 위대한 제국의 중심지에 걸맞는 이스탄불로 변모시키는 과업을 훌륭히 수행했다.
백성들은 그를 '입법자'라고 불렀다. 그의 이름으로 포고된 칙령들이 비록 독창적이라기보다 기존의 것을 새롭게 해석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에는 복잡한 구조를 가진 오스만이라는 국가를 새로운 시대상황에 적응시키려고 했던 지속적인 노력이 반영되어 있다. 그 당시의 유럽인들에게 쉴레이만은 '대왕'(il Magnifico)이었다. 자신이 아는 한 쉴레이만은 누구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았다고 쓰면서 '대왕'이라는 이례적인 찬사를 보낸 사람은 바로 베네치아인(人)인 안드레아 나바게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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