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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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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백제,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는 신라를 영토에 편입시키려 하였으나 신라는 이에 정면 대응했다. 670년 3월 고구려 유민과 신라 군인 압록강 건너 당군을 공격함으로써 나당전쟁이 개시되었다. 신라는 백제지역에 주둔한 당군을 공격하여 승리했고 설인귀의 수군을 격파했다.
675년에 설인귀가 다시 쳐들어왔으나 거듭 실패했다. 당군과 신라군은 그후에도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고, 676년 11월 기벌포 앞바다 전투에서 신라군이 일방적으로 승리하면서 나당전쟁은 끝이 났고 당나라가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갔다
신라는 676년 나당전쟁의 승리로 임진강에서 함경남도 덕원을 연결하여 실질적으로 이남의 영토를 차지하면서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신라까지 당나라 영토에 편입시키려고, 663년(문무왕 3)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라 칭하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이라고 했다. 신라는 고구려 유민(遺民)들의 부흥운동을 배후에서 부추겨 당군에 대항하게 하고, 백제 지역에 주둔한 당군을 공격하는 양동작전을 구사하면서 정면 대응했다. 670년 3월 고구려 유민군 1만 명과 신라 군대 1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먼저 당군을 공격함으로써 나당전쟁이 개시되었다.

나당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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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신라는 백제지역에 주둔한 당군을 공격하여 80여 개의 성을 빼앗기도 했다. 당의 장군 설인귀(薛仁貴)가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지역으로 향하였으나 도중에 신라 수군에게 격파당했다. 671년 당군과 말갈군이 압록강 남쪽 깊이 쳐들어와 다음해 7월에 평양을 점령한 다음, 곧이어 8월에는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점령하면서 신라를 위협했다.

674년초 당 고종(高宗)은 신라가 고구려 유민군을 배후에서 도와주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해버렸다고 하여 문무왕 대신 그의 아우 김인문(金仁問)을 신라왕으로 삼고, 수십만의 군대를 보내 신라를 치게 했다. 675년 9월에 설인귀가 신라의 숙위학생(宿衛學生)이었던 풍훈(風訓)을 향도로 삼아 군대를 이끌고 천성(泉城)에 쳐들어왔으나 실패했다. 또 그해 9월말 당은 이근행(李謹行)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20만 군을 매초성에 주둔케 하고 총력을 기울여 신라에 대한 공세를 취했으나 신라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크게 격파당했다.

이 전투에서 신라군은 군마 3만 380마리와 3만여 명분의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당군과 신라군은 그후에도 크고 작은 전투 18차례를 벌였고, 676년 11월에는 기벌포(伎伐浦:금강 하구) 앞바다에서 설인귀가 이끄는 수군과 신라의 수군 사이에 마지막 격전이 벌어졌다. 여기서도 신라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결말이 나면서 나당전쟁은 끝이 났다(→ 기벌포 해전). 당나라는 그해 안동도호부을 요동으로, 웅진도독부을 건안성(建安城:지금의 개평)으로 옮기면서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갔다. 신라는 676년 나당전쟁의 승리로 임진강에서 함경남도 덕원을 연결하여 실질적으로 이남의 영토를 차지하면서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삼국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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