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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827(흥덕왕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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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898(효공왕 2) |
국적 | 통일신라, 한국 |
요약
도선은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도선국사로 널리 알려져있다. 그에 대한 자료는 고려 태조(太祖)의 <훈요10조>와 1150년(의종 4) 최유청이 편한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병서> 등 10여 편이 있는데, 최유청의 자료인 비석은 남아 있지 않고 그 내용만이 <동문선>에 수록되어 전해오고 있다.
841년(문성왕 3) 15세 때 월유산 화엄사에서 불경을 공부하여 화엄경의 대의를 통달하고 법문을 깊이 깨달았다. 846년 화엄종의 관념적·현학적 성격의 한계를 인식하고 선종으로 개종했다. 선승으로서의 행적에도 불구하고 도선이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알려지게 된 것은 고려 태조 왕건이 도선의 풍수지리설을 신봉했기 때문이다. 왕건은 <훈요10조>의 제2조와 5조, 8조에 풍수지리설을 반영한 당부를 남겼다. 저서로 전해지는 것은 <도선비기>, <송악명당기>, <도선답산가> 등이 있다.
속성은 김씨(金氏). 태종무열왕의 서손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그에 대한 자료는 고려 태조의 〈훈요10조 訓要十條〉와 1150년(의종 4) 최유청(崔惟淸)이 편한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병서 白鷄山玉龍寺贈諡先覺國師碑銘竝序〉 등 10여 편이 있는데, 최유청의 자료인 비석은 남아 있지 않고 그 내용만이 〈동문선 東文選〉에 수록되어 전해오고 있다.
841년(문성왕 3) 15세 때 월유산 화엄사에서 불경을 공부하여 화엄경의 대의를 통달하고 법문을 깊이 깨달았다. 846년 화엄종의 관념적·현학적 성격의 한계를 인식하고 선종으로 개종했다. 이때 당(唐)의 서당 지장의 가르침을 받고 곡성 동리산 태안사에 자리잡아 동리산파를 개창한 혜철의 문하에서 선을 수업했다. 23세 때 천도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운봉산·태백산 등 각처를 돌아다니면서 수련을 했다. 당시 선승들은 각처를 돌아다니면서 수련하다가 후원자를 만나거나 인연있는 곳에 자리잡아 선문을 개창하는 것이 상례였는데, 그도 37세에 광양 백계산 옥룡사에 자리잡았다. 죽을 때까지 35년간 제자들을 키웠는데 그 수가 언제나 수백에 이르렀다 한다.
898년(효공왕 2) 72세의 나이로 죽자 효공왕이 요공선사라는 시호를 내렸고, 제자들이 징성혜등이라는 탑을 세워 그의 공덕을 기념했다. 이러한 선승으로서의 행적에도 불구하고 도선이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알려지게 된 것은 고려 태조 왕건이 도선의 풍수지리설을 신봉했기 때문이다.
왕건이 얼마나 도선의 사상에 영향을 받고 있었는가는 〈훈요10조〉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제2조에서 도선이 정한 곳 이외에 함부로 사원을 짓지 말 것, 제5조에서 서경은 수덕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므로 서경에 깊은 관심을 가질 것, 제8조에서 차현 이남 공주강 밖은 산형과 지세가 모두 거슬리므로 그 지방사람은 등용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는 부분이 풍수지리설과 관련되어 있다. 태조에 의해 고려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의 하나로 등장한 도선은 이후 역대왕들에게 주목되면서 고려 현종 때 대선사, 숙종 때 왕사, 인종 때 선각국사로 추증되었다.
도선이 풍수지리설을 배우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당에 유학가서 밀교 승려이며 중국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꼽히는 일행에게서 전수받았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옥룡사에 자리잡기 전 지리산 구령에 머물 때 이인을 만나 구례현의 경계인 남해변에서 전수받았다는 설이다. 그런데 첫번째 설은 일행이 당 초기의 승려이고 도선은 당 말기에 생존한 인물이기 때문에 연대상 모순이 있어 신빙성이 없다. 저서로 전해지는 것은 〈도선비기 道詵秘記〉·〈송악명당기 松岳明堂記〉·〈도선답산가 道詵踏山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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