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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유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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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서 고려시대까지

한국유교의 시원에 관한 견해는 대체로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BC 12세기경 은(殷)나라가 망하자 기자(箕子)가 고조선으로 와서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원리에 따라 범금팔조(犯禁八條)로 우리 사회를 교화했다는 이른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다. 비록 역사적 사실성에 의문이 있지만, 한국 유교의 전통적 자부심을 확고히 해주었다. 둘째, 고조선과 인접한 전국시대 연(燕)나라를 통해 한자와 문물이 전래되면서 유교사상이 전래되었다는 견해이다.

중국 사료와 문헌을 통해 입증될 수 있다. 셋째, 삼국의 발생을 전후하여 한사군(漢四郡:BC 108~AD 313)이 설치되면서 중국 문물의 유입과 더불어 유교사상이 도입되었다는 견해이다. 우리 땅에서 나온 유물을 통하여 확인될 수 있는 주장이다.

삼국시대 초기 고대국가가 성립되면서 유교문화의 수용이 더욱 확산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372년(소수림왕 2)에 고구려에서 유교경전을 가르치는 대학으로 태학(太學)을 세운 사실은 한국 유교사에 획기적인 의미가 있다. 백제에서도 상당한 깊이의 유교사상이 수용되어 오경박사를 두고 일본에까지 한자와 유교사상을 전파했다. 광개토대왕비와 진흥왕의 순수비(巡狩碑)는 유교적 통치원리를 간직하고 있으며, 신라의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은 당시 청년들의 경전연구와 유교정신의 실천자세를 보여준다.

이처럼 삼국의 유교문화는 경전교육에 기초한 실천적 성격을 띠며, 사회제도의 정비에 바탕이 되었다. 고려시대의 전반기에는 과거제도를 비롯하여 국가의례제도 등 유교문화의 제도적 정비가 확산되어갔다(고려의 유학). 최승로(崔承老)의 상소문에 내재된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 의식을 통해 당시 유학자들의 이념적 각성이 뚜렷이 드러나며,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보이는 유교적 역사의식도 이 시대 유교사상의 심화양상을 보여준다.

고려 후반기의 충렬왕 때 안향이 원나라로부터 주자학을 들여와서 새로운 학풍을 형성하여 활기를 띠었다. 이색·정몽주 등의 학자들은 이 학풍의 영향력을 확산시키고, 정도전·권근은 조선왕조의 창업에 이념적 뒷받침이 되어 유교적 사회제도를 구축하는 데 적극적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시대

조선은 유교, 곧 성리학의 철학적 이론으로 무장된 도학(道學)을 국가이념으로 받아들이고, 불교에 대한 억압정책을 실행했다.

조선 초기를 통하여 역대 임금들은 유교이념에 입각하여 사회제도를 전면적으로 정비했다. 세종 때에는 유교적 국가의례와 제도를 정비했으며, 유교적 교화체계를 체계적으로 구축하여 유교사회의 기틀을 확립했다. 조선 초기의 유학자들 중에서 공신과 관료의 기존세력인 훈구파(勳舊派)와 도학정신의 실천에 진력하던 신진세력인 사림파(士林派) 사이에 대립을 보여 여러 차례 사림파의 선비들이 희생당하는 사화(士禍)가 일어났다.

조선 중기인 16세기에는 도학의 이상정치가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파에 의해 추구되다가 실패했지만, 결국 이들이 정치의 담당자가 되는 사림정치시대를 열었다. 사림들이 정치의 주체가 되자 이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 당파가 만들어졌는데, 이는 조선 후기 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부터 소수서원(紹修書院)을 비롯하여 서원 설립이 활발해져서 향촌의 유림활동이 확산되었고, 지역사회에서 향약(鄕約)을 시행하면서 향촌 질서의 유교적 교화가 심화되었다. 이 시대에 성리학의 이론적 논쟁이 인간의 심성문제를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면서 성리학의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이황(李滉)·이이(李珥)에 이르러 불붙은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논쟁은 당시의 대표적인 성리학 논쟁으로서, 학문적인 큰 업적으로 평가된다. 조선 후기에는 가정의례를 중심으로 예학(禮學)의 발전과 성리학적 논쟁의 확대, 청나라를 배척하는 의리론의 강화에 따라 정통도학도 강력하게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성리학의 사변적 공허성과 의리론의 비실리적 명분주의에 대한 성찰을 하면서 현실 사회제도의 개혁과 실용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학풍으로서 실학이 대두했다.

18세기초에는 심학파(心學派:陽明學)가 형성되었다. 당시 새로 전래해온 서유럽 문물(西學)을 수용하면서 로마 가톨릭교 신앙운동이 일어나자, 도학파는 이단사설로 배척하고 정부는 형벌로 금압했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는 다양한 신념들이 서로 비판하는 다원적 상황 속에 놓여 있었다.

한말에서 현대까지

19세기말 서유럽 열강과 일본의 침략위협이 높아지면서 도학자들은 강경한 저항논리로서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제기하여 쇄국정책(鎖國政策)을 뒷받침했다.

한말 도학자들은 침략자에 대한 배척이론의 강화와 의병운동의 전개 사이에서 다양하고 열렬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무력 위협 앞에 마침내 개항했으며, 프랑스와의 통상조약에 의해 신교(信敎)의 자유를 허용하게 되었다. 1896년 민비시해사건 이후 유학자들은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하여 일제의 침략에 대항했다. 1910년 조선 왕조의 멸망과 더불어 국가종교로서의 유교체계는 허물어졌다.

그러나 도학파의 선비들은 의리론적 신념에 의해 의병운동을 일으켜 항거하거나, 단발령, 창씨개명, 일본어 사용 등 일제의 동화정책에 비타협적 저항을 전개함으로써 전통수호의 보수적 태도를 지켜갔다. 소수의 각성된 유학자들은 새로운 사조를 수용하고 유교개혁을 추구하여, 1910년경 박은식(朴殷植)·장지연(張志淵) 등은 대동교(大同敎)를 조직했고, 1920년경 이병헌(李炳憲)은 공교(孔敎)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들은 보수적 유학자들과 서민대중의 호응을 받지 못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8·15해방 후 1946년 성균관(成均館) 유도회(儒道會)의 조직이 유림독립운동가의 대표적 인물인 김창숙(金昌淑)에 의해 재조직되었다. 그뒤에도 유림분규를 수습하여 조직을 재건하고, 도덕운동을 중심으로 사회교화에 노력했다. 그러나 유교적 규범형식과 가치관은 아직도 전통을 고수하는 데 머무르고 있어서, 현대사회의 문제에 대응하는 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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