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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고구려 멸망 후 신라의 원조 아래 고구려 유민이 지금의 익산지방에 세운 나라.
고구려가 멸망된 후에도 그 유민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특히 검모잠이 이끄는 군사는 평양 부근의 당군을 공격하는 등 두드러지게 활동했다. 그러나 670년(문무왕 10) 당의 장군 고간(高侃)의 공격을 받고 한성(漢城:지금의 황해도 재령)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리고 이보다 앞서 신라에 투항해 서해안 사야도(史冶島:지금의 덕적도)에 있던 고구려 왕족 안승(安勝)을 맞아 왕으로 삼고 신라의 원조 아래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두 사람 사이의 불화로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다시 망명하자 신라는 670년 그를 금마저(金馬渚:지금의 익산)에 안치하고 고구려 왕으로 봉했다. 여기에는 백제 고지에 남아 있던 당군 및 당과 결탁한 부여융의 백제군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리고 신라는 백제지역을 계속 공략해 671년에는 당군 5,000여 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는 한편, 사비성을 함락시켜 소부리주(小夫里州)를 설치해 백제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백제 고지에 대한 지배권이 안정되자 674년 신라는 안승을 다시 보덕국왕으로 봉하고 680년에는 문무왕의 조카와 결혼시켰다.
이 기간 동안에 보덕국에서는 옛 고구려의 관등을 비롯한 정치제도나 부제 등을 그대로 사용했으며, 신라의 감독 아래 왜국(倭國)에 사절을 보내기도 했다. 683년 신문왕은 안승을 경주로 이주시켜 신라 관등의 제3등 소판(蘇判)을 주고 김씨 성을 내리는 한편 집과 토지를 주었다.
신라로서는 안승을 금마저에서 격리시킨 뒤 그 지역에 대한 직접지배를 관철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684년 금마저에 남았던 안승의 족자(族子) 장군 대문(大文)이 모반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했다.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이 신라의 관리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토벌당했다. 신라는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그 무리를 남쪽으로 옮기고 금마저를 금마군(金馬郡)으로 편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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