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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순수'란 천자가 제후의 봉지를 직접 순회하면서 현지의 통치상황을 보고받는 의례를 말한다. 순수비란 순수를 기념하여 세운 비석을 말하는데, 진흥왕순수비의 비문 속에 나타나는 '순수관경'이란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진흥왕은 가야 소국의 완전병합, 한강유역의 확보, 함경도 해안지방 진출 등 활발한 대외정복사업을 수행하여 광범한 지역을 영토에 편입한 뒤 척경과 순수를 기념하여 비석을 세웠다. 현재 남아 있는 비는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황초령비·마운령비 등으로, 당시 삼국관계와 신라의 정치상·사회상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진흥왕순수비의 위치는 당시 신라의 영토 경계를 알려줄 뿐만 아니라, 비문 중에 나오는 '짐'·'제왕건호' 등의 용어는 신라의 당당한 자존의식을 보여준다.
'순수'란 천자가 제후의 봉지(封地)를 직접 순회하면서 현지의 통치상황을 보고받는 의례로 순행(巡行)이라고도 한다. 순수비란 순수를 기념하여 세운 비석을 말하는데, 진흥왕순수비의 비문 속에 나타나는 '순수관경'(巡狩管境)이란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진흥왕은 가야 소국의 완전병합, 한강 유역의 확보, 함경도 해안지방 진출 등 활발한 대외정복사업을 수행하여 광범한 지역을 새로 영토에 편입한 뒤 척경(拓境)과 순수를 기념하여 비석을 세웠다.
현재 남아 있는 비는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황초령비·마운령비 등 모두 4기로, 당시의 삼국관계와 신라의 정치상·사회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진흥왕순수비의 위치는 당시 신라의 영토 경계를 알려줄 뿐만 아니라, 비문 중에 나오는 '짐'(朕)·'제왕건호' 등의 용어는 신라의 당당한 자존의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과거 일본인들은 마운령비와 황초령비가 고려시대 윤관의 9성 축조 때나 조선 초기의 북방개척 때 원래 위치에서 옮겨진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이는 전혀 근거 없는 견해이다. 고려 고종 때의 승려 천인(天因)의 〈고석정기 孤石亭記〉에서 진흥왕의 비석이 철원 남쪽 30리 지점인 고석정 부근에 있었다고 언급한 것도 진흥왕의 또다른 비가 철원 근방에 있었을 가능성을 말할 뿐 비가 옮겨졌다는 견해의 근거는 되지 못한다.
실제로 진흥왕대에는 활발한 영토확장과 함께 많은 비가 세워졌는데 단양신라적성비도 그중 하나이다. 또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신라 관직과 왕의 근시집단의 직명이 새겨진 비석이 조선 숙종 때 지금의 동래에서 발견된 적이 있는데 이 역시 진흥왕의 또다른 순수비일 가능성이 있다.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국보(1962.12.20 지정). 비석의 높이는 162㎝, 너비 174㎝, 두께 30~51㎝. 화강암을 다듬어 해서체의 글자를 새긴 것으로 글자의 크기는 고르지 않으나 대체로 4㎝를 넘지 않는다. 총 27행으로 각 행에 18~27자씩 모두 643자이다. 건립연대는 561년(진흥왕 22)이다.
이로 보아 그 이전에 신라가 비화가야(지금의 창녕)나 아라가야(지금의 함안)를 영향권에 넣었음을 알 수 있다. 내용은 건립연월을 새긴 제기, 기사, 진흥왕의 창녕행차시에 모인 신하들을 열거한 수가인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갈문왕·대등 등 중앙 귀족들을 비롯하여 영역확보를 위한 전진기지의 군사령관인 사방군주·당주·촌주 등이 나타나 당시 신라의 지배체제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국보(1962.12.20 지정). 화강암 비신의 높이는 154㎝, 너비 69㎝, 두께 16.7㎝. 1972년 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 보관하고 있다.
1816년(순조 16) 김정희(金正喜)에 의해 조사된 적이 있다. 개석을 얹은 형태이나 지금은 비신만 남아 있다. 모두 12행으로 각 행에 32자씩 해서체의 글자를 새겼는데 마멸이 심해 판독할 수 없는 글자가 많다.
비문은 제기·기사·수가인명·영사의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행에서 "진흥태왕과 중신이 순수관경했을 때 세웠다"는 구절이 확인되며, 민심을 수습하고 공을 세운 자들에게 포상을 내린다는 등의 내용이 있다. 제기부분의 마멸로 인해 건립연대를 분명히 알 수 없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흥왕은 553년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지역을 탈취하고, 554년 관산성전투에서 승리하여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 후, 555년에 직접 북한산주를 순행하여 '척정봉강'한 것으로 되어 있다. 비문 중에 '남천군주'가 나오므로 남천주가 설치된 568년 이후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신라 주의 치폐관계는 문헌을 통해서는 잘 알 수 없으므로 555년이 건립연대일 가능성이 높다.
황초령비
높이 92.4㎝, 너비 45㎝, 두께 20㎝. 건립연대는 568년(진흥왕 29)이며, 비의 소재는 18세기부터 알려졌는데 김정희에 의해 조사되기도 했다. 1852년(철종 3) 관찰사 윤정현(尹定鉉)이 비를 고개 아래의 중령진으로 옮기고 지명을 진흥리로 바꾸었다.
현재는 함흥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화강암을 잘 다듬은 비신은 상단부와 하단부의 일부가 파손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12행으로 각 행에 35자의 해서체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비문의 구성은 제기·기사·수가인명으로 되어 있다. 제기에는 태창 원년인 568년에 진흥태왕이 순수관경하고 비문을 새겼다는 내용이 있다.
기사부분에는 유교적 정치사상에 입각하여 '제왕건호'는 스스로 덕을 닦고 백성을 편안히 할 따름이며 진흥왕 자신이 태조의 기업을 이어 즉위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수가인명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사문도인', 즉 승려가 나타나는 점과, '이내종인'·'집가인'·'약사'·'당래객'·'이내객' 등 국왕의 근시 집단으로 보이는 직명이 나타나는 점이다.
마운령비
비신의 높이는 165㎝, 너비 65㎝, 두께 약 30㎝. 건립연대는 568년(진흥왕 29)이다. 검은색을 띤 화강암을 다듬어 양면에 글자를 새겼다. 앞면 10행에는 각 행에 26자, 뒷면 8행에는 각 행에 25자를 새겼다. 비문의 구성은 제기·기사·수가인명으로 되어 있다. 제기에는 태창 원년에 진흥태왕이 순수했을 때 세운 것임을 밝혔다. 기사부분은 대체로 황초령비와 같으며, 수가인명도 황초령비와 대략 같으나 결자가 적어 황초령비의 결락부를 보완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황초령비에 보이는 직명 외에도 '급벌참전'·'내부통전'·'외객' 등의 직명이 보이는 것은 당시 국왕의 근시조직을 아는 데 참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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