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요약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751년 김대성이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창건 이후 여러 차례의 중창과 중수를 거쳤으며 현존하는 주요건물들은 대체로 임진왜란 이후 복구된 것이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염원한 이상의 불국토를 3갈래로 구현한 것으로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의 사바세계는 대웅전으로, 〈무량수경〉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는 극락전으로, 〈법화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 세계는 비로전으로 대표된다. 즉 불국사의 경내는 석단에 의하여 단상의 불국토와 단하의 속계로 양분된다.
석단 위에 청운교·백운교, 칠보교·연화교라는 2쌍의 다리를 놓았다. 대웅전 앞에 있는 3층석탑과 다보탑은 쌍탑구조이다. 극락전에는 금동아미타불좌상을 안치했으며, 무설전 뒤에는 관음전이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751년(경덕왕 10) 김대성(金大城)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국가에 의해 완성되었기 때문에 개인의 원찰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원찰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한편 〈불국사고금창기 佛國寺古今創記〉에는 528년(법흥왕 15)에 법흥왕의 어머니인 영제부인이 화엄불국사를 창건하고 574년(진흥왕 35)에 중창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신라 역사와 모순된 것이며 〈삼국유사〉의 내용을 그대로 베낀 듯한 대목도 있어서 사료로서의 신빙성이 적다. 그러나 창건 당시의 주요건물에 대해 자세히 기술해놓아 불국사의 원형복원에 좋은 자료가 된다.
창건 이후 여러 차례의 중창과 중수를 거쳤으며 현존하는 주요건물들은 대체로 임진왜란 이후에 복구된 것이다. 석탑을 포함한 석조물은 병화를 입지 않아 신라시대의 원형을 유지한 것들이 꽤 남아 있다. 현재의 모습은 1970년의 대대적인 복원공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염원한 이상의 불국토를 3갈래로 구현한 것으로 〈법화경 法華經〉에 근거한 석가의 사바세계는 대웅전으로, 〈무량수경 無量壽經〉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는 극락전으로, 〈법화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 세계는 비로전으로 대표된다. 즉 불국사의 경내는 석단에 의하여 단상의 불국토와 단하의 속계로 양분된다.
크고 작은 돌을 빈틈없이 쌓아올려 만든 석단 위에 청운교·백운교, 칠보교·연화교라는 2쌍의 다리를 놓았다. 청운교·백운교는 자하문을 거쳐 석가모니의 사바 세계인 대웅전으로 오르게 되어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3층석탑과 다보탑은 서로 마주 서 있는 쌍탑구조이며, 뒤편으로는 경론을 강술하는 무설전을 두고 대웅전 일곽을 동·서 행랑으로 에워싸고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를 올라 안양문을 지나면 극락전에 이르게 되며 그 안에 금동아미타불좌상을 안치했다. 무설전 뒤에는 관음전이 있고, 그 서편에는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을 봉안한 비로전이 있다.
이외에도 토함산 일대에는 몽성암과 보덕굴을 비롯하여 불국사 부속암자들이 다수 있다. 칠보교 아래에는 2쌍의 당간지주와 석조가 있고, 5기의 부도가 남아 있다.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
국보(1962.12.20 지정)호. 높이 177cm. 두 손은 가슴 쪽으로 올려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우견편단으로 법의를 입고 결가부좌의 자세를 하고 있다.
지권인은 본래 밀교에서 금강계만다라의 주존인 대일여래, 즉 마하비로자나가 취하는 수인으로 이때 대일여래는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영락으로 장식한 보살의 형태로 표현되는데, 이 불상처럼 나발이 있는 육계에 부처의 형상으로 지권인을 한 경우는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가 없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일반적인 지권인과 달리 오른손은 아래로, 왼손은 위로 올라가 극락전의 아미타상처럼 두 손의 위치가 바뀐 것도 특이한 점이다.
얼굴의 표정 자체도 근엄하지만 넓은 어깨에 허리를 곧게 세워 배가 약간 나온 자세는 더욱 위압감을 준다. 두 무릎의 폭이 넓어 안정된 느낌을 주지만 허리가 길어지고 얼굴과 드러난 오른쪽 어깨의 살은 약간 탄력감을 잃은 듯하다.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린 옷은 불신에 밀착되어 허리와 배를 둥글게 감싸고 있는데 도드라진 옷주름의 표현은 도식화된 편이다.
전체적으로 장중한 느낌을 주는 이 상의 제작연대는 그 양식에 의해 8세기말로 보는 견해와 〈불국사사적기〉 가운데 최치원이 쓴 〈비로자나문수보현상찬(毘盧舍那文殊普賢像讚)〉에 근거해 9세기말로 보는 견해가 있다. 원래 대웅전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중수할 때 극락전으로 옮겼다가 1973년 복원공사 후 다시 비로전으로 옮긴 것이다.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국보(1962.12.20 지정). 높이 166cm. 불국사금동비로자나불좌상, 백률사금동약사불입상과 더불어 통일신라시대의 3대 금동불상으로 손꼽히는 상이다. 특히 불국사금동비로자나불좌상과는 거의 같은 양식과 조각수법을 보여주고 있어 같은 시기에 동일한 주조소에서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우견편단의 법의에 결가부좌의 자세를 취하고, 수인은 아미타구품인 가운데 하품중생인을 취하고 있는데 양손의 좌우가 바뀐 것은 불국사비로자나불좌상에서도 보이는 공통된 특징이다.
얼굴은 넓적하고 살이 붙은 편이며 약간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짧은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신체비례는 석굴암 본존상과 유사하지만 세부표현에서는 약간 형식적인 면이 보이며, 옷주름선이 좀더 복잡하게 처리되었다. 신체에 밀착된 법의는 조금 두텁고, 팔과 가슴의 묘사도 석굴암 본존상보다는 긴장감을 잃은 편이지만 왼손 아래로 흘러내린 옷자락과 왼쪽 어깨에서 무릎에 이르는 옷주름의 표현은 경우에 따라 높낮이를 달리하여 전체적으로 사실적인 느낌을 준다.
이 상의 제작시기 역시 불국사금동비로자나불좌상과 마찬가지로 양식적인 기준에 의해 8세기말로 보는 견해와 최치원의 찬문에 의해 9세기말로 보는 견해가 있다.
경주 불국사 다보탑
국보(1962.12.20 지정). 높이 10.4m. 전형적인 신라 석탑 양식과는 매우 다른 이형 석탑이다.
〈법화경〉의 〈견보탑품 見寶塔品〉에 근거하여 건립된 것으로 다보여래를 상징하는 탑이다. 〈견보탑품〉은 다보여래가 〈법화경〉의 진리를 설하는 석가여래를 찬양하자 석가여래가 자리 한쪽을 비워 나란히 앉게 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불국사의 두 탑은 석가·다보 여래를 상징하며,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쌍탑의 하나이다.
이형 석탑이지만 탑의 기본적인 구조를 그대로 따라 기단부·탑신부·상륜부로 이루어졌으며 정사각형의 기단은 사제와 8정도의 근본도리를 밝힌 것이고, 1층부터 보주까지는 10지의 등각·묘각을 상징한 것으로 탑 자체가 불(佛)임을 나타낸 것이다. 하층기단의 4면에는 계단이 있고 양쪽에 난간의 석주로 보이는 유구가 서 있다. 상층기단에는 4개의 우주와 중앙에 탱주가 서 있으며, 우주 위에는 2단의 두공이 십자형으로 놓여 있고 그 위에 갑석을 올려놓았다.
갑석 위에는 8각형의 신부가 3단 있는데 하단은 4각형의 난간 속에 별석을 돌렸고, 중단은 8각 난간 속에 죽절형의 기둥을 세웠고, 상단은 8각 앙련 위에 꽃술형 기둥 8개가 8각의 신부를 돌려싸고 있다. 옥개석도 역시 8각이며 그 위에 노반·복발·앙화·보륜·보개로 이루어진 상륜부가 있다. 1925년 일본인들에 의해 해체·수리되었으나 이때 발견된 유물은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다. 탑 사방의 보계가 마련된 갑석 위에 있던 4마리의 사자상은 현재 1마리만 남아 있다.
경주 불국사 사리탑
보물 제61호. 높이 206cm. 네모난 지대석 위에 잘 다듬은 8각의 하대석을 얹었는데 각 면에는 가운데에 꽃 모양이 새겨진 안상이 얕게 음각되어 있다. 고형의 중대석에는 굵직한 권운문을 깊게 새겨 화려한 느낌을 준다. 상대석의 아래쪽에는 9엽의 단판연화가, 위쪽에는 탑신 주위로 20송이의 연자가 음각되어 있다.
탑신은 배가 부른 항아리 모양이며, 연꽃무늬와 보상화문대로 구획된 그 사이에 불감을 만들어 불좌상과 보살입상을 각각 2구씩 양각했다. 옥개석의 추녀 끝은 12각이지만 정상부에서는 사각으로 줄어들고 아랫면에는 중첩된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 위에는 6각형의 노반과 편구형의 복발이 얹혀 있다. 하대석의 안상이나 중대석의 구름무늬 조각수법 등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1925년 일본인들에 의해 도쿄[東京]의 우에노 공원[上野公園]으로 밀반출되었던 것을 1933년 다시 찾아왔다.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국보(1962.12.20 지정). 높이 10.4m. 석가탑 또는 무영탑이라고도 한다.
이 탑은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대표하는 가장 우수한 예이며,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과 상륜부가 있는데 각 부분의 체감비율이 적당하며 간결하다. 상·하 기단의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각각 2개씩 새겨져 있고 다른 조각은 없다. 탑신을 받치는 갑석은 4매의 돌로 되어 있는데 아래에는 부연이 있고, 윗면은 경사가 져 있으며 2단의 탑신 굄이 있다. 탑신부의 옥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옥신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을 뿐이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5단이며 그 위에는 2단의 옥신받침이 있다. 상륜부는 노반·복발·앙화만 남아 있었는데 1973년 실상사백장암3층석탑의 상륜부를 모방해 결실된 부분을 보충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이 탑의 특이한 점은 탑 주위에 장방석을 돌려서 형성한 탑구에 연꽃무늬를 조각한 팔방금강좌가 있는 것과 탑의 기단부를 자연석이 받치고 있는 것 등은 유례가 드문, 주목할 만한 예이다.
해체수리 때 2층 옥신의 사리공에서 사리함과 여러 개의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불국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국보(1967.09.16 지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66년 탑신부의 해체수리시 2층 탑신 사리공에서 금동제 사리외함(높이 18cm)과 함께 청동비천상(4cm)·동경(지름 7cm)·소형목탑·곱은옥·향목파편 등이 발견되었다. 사리외함은 비단으로 싸여진 종이뭉치 위에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 달걀 모양의 은제2중사리합(외합 높이 11.5cm, 지름 6cm)·금동방형사리합(크기 6×3.3×5.5cm)·은제사리내합(높이 6.5cm, 지름 5cm)·향목제사리소병·은제소합·〈무구정광대다라니경 無坵淨光大陀羅尼經〉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두루마리로 된 다라니경(너비 8cm, 길이 600cm)은 종이의 질이나 글씨체 가운데 당의 측천무후자가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8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최고의 목판인쇄물로 중요한 자료이다.
경주 불국사 연화교 및 칠보교
국보(1962.12.20 지정). 이 다리는 동쪽의 대웅전 앞 자하문으로 오르는 청운교·백운교의 가구수법과 비슷하지만 규모가 작아 부드럽고 우아한 느낌을 준다. 아래쪽은 연화교로서 9층의 디딤돌마다 연꽃잎으로 안상처럼 새기고 가운데에는 격자무늬를 새겼다. 장식이 없는 위쪽의 다리는 칠보교로서 연화교와 마찬가지로 가운데가 좌우로 나누어진 2구형 다리이다. 8세기에 축조된 이후 큰 피해 없이 보존되었으나 1916년 일본인들에 의해 해체·수리되면서 일부 변형되었다. 돌난간은 1973년 복원공사 때 설치된 것이다.
경주 불국사 청운교 및 백운교
국보(1962.12.20 지정). 석가모니의 불국세계로 통하는 자하문으로 오르는 다리인데, 33계단은 33천을 상징하는 것으로 헛된 욕망을 버리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걸어 올라가는 다리라고 한다. 거의 45°로 경사가 져 있기 때문에 연화교·칠보교보다 남성적이며 웅장하고 장대한 느낌을 준다. 다리 아래쪽의 홍예는 U자를 거꾸로 놓은 듯한 모습인데 한국 돌다리 홍예의 시원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옛날에는 구품연지로 흘러드는 물이 이 아래를 통과했다고 한다. 751년 불국사의 창건 때 세워져 1686년과 1715년에 중수되었고, 1973년 난간을 복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