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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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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765(경덕왕 24) |
국적 | 통일신라, 한국 |
종교 | 불교 |
재위 | 742년∼765년 |
능묘 | 경주 경덕왕릉(慶州 景德王陵) |
요약 신라 제 35대 왕이자 성덕왕의 셋째 아들로 이름은 헌영. 효성왕이 자식이 없자 739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742년 왕위에 올라 강대해진 귀족세력을 견제하고 전제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정치개혁을 시도했으며, 불교중흥에 힘쓰는 등 신라문화의 절정기를 맞게 했다. 그러나 귀족세력을 누르고자 했던 개혁정치는 실패로 돌아가 말년에는 귀족세력과 정치적으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경덕왕대에 불교 중흥이 이루어져 영흥사·굴불사·불국사 등 많은 절을 세웠으며 석굴암도 이 시기에 축조되었다.
개요
강대해진 귀족세력을 견제하고 전제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정치개혁을 시도했으며, 불교중흥에 힘쓰는 등 신라문화의 절정기를 맞게 했다.
즉위와 제도개혁
이름은 헌영(憲英). 성덕왕의 아들이며 효성왕(孝成王)의 동생이다.
왕비는 이찬(伊飡) 순정(順貞)의 딸 김씨와 서불한(舒弗邯) 의충(義忠)의 딸 만월부인(滿月夫人) 김씨이다. 효성왕이 자식이 없어 739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742년에 왕위에 올랐다. 즉위 뒤 왕권의 재강화와 귀족세력의 약화를 목표로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중심으로 하는 제도개혁을 단행했다. 개혁의 중심세력은 경덕왕과 신라 중대의 행정책임자였던 집사부의 중시(中侍)였다. 747년에는 중시를 '시중'(侍中)으로 변경했다.
국학에 제업박사(諸業博士)와 조교를 두어 유학교육에도 힘썼다. 748년 정찰(貞察)을 두어 백관을 규찰하게 하여, 왕을 중심으로 하는 전제왕권 체제를 강화하려 했다. 749년 천문박사 1명과 누각박사(漏刻博士) 6명을, 758년에는 율령박사 2명을 두어 기술분야에도 관심을 보였다.
757년 9주(州)·5소경(小京)·117군(郡)·293현(縣)의 고유 지명을, 759년 관직명을 중국식으로 고쳤다.
귀족세력의 재부상과 문화의 발달
그러나 귀족세력을 누르고 전제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경덕왕의 개혁정치는 실패로 돌아가 말년에는 귀족세력과 정치적으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757년 내외 관리의 월봉을 혁파하고 녹읍을 부활시켰는데, 이는 새롭게 성장하는 귀족세력의 욕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경덕왕 말기에 성장한 귀족세력은 763년에 경덕왕의 측근이었던 상대등 신충(信忠)과 시중 김옹(金邕)을 면직시키고, 764년 만종(萬宗)과 김양상(金良相)을 상대등과 시중에 임명했다.
김양상은 경덕왕 때 귀족세력을 대표하고 전제왕권에 도전하던 세력으로서, 나중에 상대등으로서 혜공왕을 죽이고 신라 하대를 여는 선덕왕으로 즉위했다. 개칭된 관직명들도 혜공왕대에 다시 환원된다.
경덕왕대에 일본과의 관계는 그리 원만하지 않았으나, 당과는 11차례의 사신을 파견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활발히 교류했다. 당나라의 문화를 수입하여 신라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룩하고 산업발전에도 힘썼다. 불교 중흥에도 노력하여 황룡사(皇龍寺)의 종(鐘)을 주조하고, 굴불사(掘佛寺)를 비롯하여 영흥사(永興寺)·원연사(元延寺)·불국사 등 절을 세웠다.
석굴암도 이때 축조되었다. 경주 모지사(毛祗寺)의 서쪽 언덕에서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왕릉은 월성군 내납면 부지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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