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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식생활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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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시대

인류의 식생활에 가장 큰 혁신을 가져온 것은 의 발견이었다.

불을 사용하기 전 원시시대의 인류 최대의 관심사는 굶어죽지 않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들풀이나 과실, 잡아먹을 수 있는 들짐승 및 어패류가 인간의 주식을 이루었는데, 불의 발견으로 익힌 음식을 먹기 시작했으며, 그와 함께 식량의 계획생산에 착안하여 유목민 또는 정착민의 형태로 농경과 축산을 시작하게 되었다.

고대 이집트

이집트에서는 이미 1만 년 전부터 농업이 행해져왔다.

BC 3000년경부터 파라오의 치하에 고도의 문화를 발달시켰던 이집트인들은 당시에 이미 조류, 어패류, 야채류, 대추야자의 열매, 마늘, 파피루스 순 및 각종 열매를 먹었다. 조미료로는 아비시니아의 암염을 먹었는데, 바닷소금은 종교적인 이유에서 금지되었다. 빵이 주식이었으며, 지위가 높은 귀족이나 제후들은 각기 자기 소유의 빵집을 소유하고 발효시키지 않은 딱딱한 빵을 만들어 먹었다. 포도주는 오늘날의 것과 똑같은 것이었으리라 추측되나, 돼지고기·잠두 등은 역시 종교적인 이유에서 금지되었다.

평민들의 식사는 소박하여 야자열매·생야채·생선 등을 먹었으며, 피라미드 건설에 동원되는 사람들에게는 양파·파슬리·마늘 등이 지급되었다.

고대 동방의 여러 나라

메소포타미아는 인류 문명발상지의 하나로서 천혜의 기름진 토지를 바탕으로 눈부신 문화를 꽃피웠다.

그중 가장 오래 된 것은 3,000년에 걸쳐 번성했던 수메르인의 문화였다. 그들은 가축을 사육했으며, 이집트와 비슷한 수준의 농업을 행하고 있었는데 특히 밀 종류의 생산이 많았다. 한편 칼데아 지방에서는 채소의 재배에 전력했다.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에는 여러 가지 식용식물 외에 조류, 육류 및 각종 어류가 열거되어 당시 식생활의 단면을 보여준다.

음료로서는 포도주 외에 맥주도 마셨으며, 효모의 사용법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포도주에 대한 이야기가 성서 속에 500여 회나 나오고 그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이야기되고 있으며, 팔레스타인에서는 여자들에게 포도주 마시는 것을 특별히 금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중동의 다른 여러 나라와 마찬가지로 헤브루에서도 여자가 식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또 항해를 주로 하는 페니키아인들은 농경이나 조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식민지였던 카르타고에서는 농업이 중시되었으며, 특히 포도주 생산이 유명했다.

고대 그리스

그리스는 평원이 없는 석회질 땅으로 초목의 혜택을 받지 못한 나라이다.

따라서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서쪽 아르카디아에서는 오로지 도토리를, 반도의 북쪽에서는 수유나무 열매를, 그리고 아테네 주변에서는 무화과를 빵이나 죽과 함께 먹을 수 있을 뿐이었다. 특히 아테네에서는 밀가루에 대한 정책이 엄격하여 소맥 생산자들이 아테네 이외의 지역에서는 판매할 수가 없었다. 빌레 항에 들어오는 밀가루의 2/3는 아테네에서 소비되었으며 나머지 1/3만이 다른 곳으로 수출되었다. 아테네에서 소비되는 밀가루의 대부분은 식민지 테베에서 반입된 것이었다.

그밖에 발달한 해안선을 이용하여 어패류를 채취해 먹었으나, 풍족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페리클레스 시대(BC 6~5세기)가 되면서 요리가 그리스인의 일상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빵은 변함없이 발효시키지 않은 것이었지만, 밀가루와 보리를 사용한 딱딱한 빵이 만들어졌다. 또 포도주 외에 이집트 술, 소금, 꿀 등이 있었으며 설탕은 의약품으로 취급되었다. 육류 요리도 발달해서 돼지고기 요리 외에 거의 모든 종류의 가금·야금(野禽)이 식탁에 올랐다.

호메로스에 의하면, 트로이 전쟁에 출정했던 군인들은 자기들 스스로 요리하여 먹었다고 하지만, 국운이 융성해지자 전문 요리사가 등장하게 되었다. 요리사들은 권력자의 가정에서 일하거나 임시로 고용되기도 했으며 그들을 위한 직업 소개소까지 있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식사는 일종의 제사적 색채가 짙었는데, 식사를 시작할 때 고기의 일부를 불에 구워 희생물을 대신했고 포도주를 바쳤다.

당시에 어떤 사람이 디오게네스에게 "식사는 언제 하는 것인가?"라고 묻자, 그는 "부자는 먹고 싶을 때에 하고 가난한 사람은 배가 고플 때에 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식사는 보통 하루에 3번 하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하루 3번을 채우지 못한 경우도 많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대 로마

이탈리아 반도에 살았던 최초의 문화민족은 에트루리아인이었다.

그후 로마인이 주변 민족을 차례로 정복·합병함으로써 거의 이탈리아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초기 로마인들의 식사는 채식이 주였으며, 내용은 아주 부실했다. 주식은 풀르스, 또는 풀르멘둠이라 불리는 곡물죽이었고, 그밖에 콩류·양배추·양파·마늘 등이 주요식품이었다. 초기에는 밀가루를 사용할 줄 몰라서 밀을 부숴서 죽을 쑤어 먹었다. 밀가루 빵을 가정에서 만들기 시작한 것은 트라야누스 황제(52~117) 때부터였다.

로마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아우구스투스(BC 63~AD 14) 이후의 제정시대(~340경) 동안 채식은 잡식으로 바뀌었으며, 들짐승고기보다는 가축고기를 먹게 되었다.

기름은 올리브유가 주를 이루었고, 소금·식초·포도주가 사용되었지만 설탕은 쓰이지 않았다. 주요조미료로는 지금의 간장에 해당하는 가룸이 있는데, 여기에 물·기름·식초·포도주 등을 넣으면 각각 4종류의 가룸이 만들어졌다. 고대 로마인들은 초기에는 하루 3회의 식사를 했다. 그러나 1세기말부터는 아침은 냉수 한 잔으로 대신했다. 점심은 신선한 고기와 과실에 포도주와 냉수를 곁들여 먹었다.

주로 현관 앞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목욕이나 손을 씻는 의식은 없었다. 이에 비해 저녁은 대단히 성대하여 일종의 주연과도 같았다. 대개의 로마인들은 향연을 즐겼는데, 네로 황제는 정오부터 시작한 향연을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했다고 한다. 고대 로마의 유명한 미식가로는 아피키우스를 들 수 있다. 그는 유럽 최고(最古)의 요리서를 남겼으며, 전재산을 먹는 일에 써버렸다고 한다.

건국 초기의 로마인들의 생활은 검소했으나, 여러 지역을 정복해감에 따라 동서양의 갖가지 진미를 알게 되었고, 그 결과 그들의 식탁은 더없이 사치스러워졌다. 그리하여 시민의 가장 절실한 소망을 나타내는 '빵과 투기(鬪技)'라는 말이 생길 만큼 조악한 식사로 시작했던 로마는 미식(美食)으로 멸망해갔다.

중세 유럽

BC 1세기경에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해온 갈리아인은 처음에 독일에 거주했다.

그들은 돼지를 사육해 돼지고기를 먹었으며, 햄과 순대를 만들었다. 또 보리로 맥주를 만들었고 떡갈나무 종류로 술통을 만들었다. 돌소금을 채취해 때로는 그것들을 로마에 팔기도 했다.

갈리아인들이 독일에서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방으로 이동할 당시에는 돼지나 염소보다 들소를 많이 먹었다. 그들은 고기를 끓이거나 구워 먹었고 훈제로 만들어 대량 소비했다. 그리고 들소를 다 잡아먹었을 무렵에 소를 사육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유럽 목축의 시작이었다.

문헌에 의하면 갈리아인들은 건초를 깔고 앉아서 식사하거나 그다지 높지 않은 식탁을 땅에 놓고 식사했다. 식기로는 토기·은기(銀器)·청동기를 사용했으며, 때로는 소쿠리 종류도 썼다. 그후 로마에 정복되자 로마 문화에 동화되어 갔으며, 농경을 주로 하면서 도시를 이루고 로마의 식생활을 받아들였다. 그 이전까지는 갈리아인과 똑같은 생활을 했던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인들은 중세 초기에 갈리아인들의 땅에 들어오자, 갈리아인들이 이루어놓은 로마화한 갈리아 문화에 동화되어 꽃으로 장식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음식 역시 로마화한 갈리아인의 사치를 흉내냈다.

5세기에 들면서 갈리아 지방을 통일한 프랑크인들은 프랑크 왕국을 세웠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전국 곳곳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들을 통해 로마의 식생활 전통이 게르만족 사회에 깊이 침투했다. 카를 대제 때는 식품 취급에 관한 칙령을 내려 베이컨·쇠고기·식초·포도주·치즈·버터·맥주·밀가루 등의 식품위생에 대해 규정했다.카롤링거 왕조 때에도 로마의 사치스러운 식생활 풍조는 계속 도입되었으며, 아피키우스의 요리법을 배우기도 했다.

그 이전까지는 정찬에 여성이 동석할 수 없었는데, 카를 대제 때부터 그것이 허용되었던 듯하다. 또 식사할 사람들은 각자 나이프를 가지고 식탁에 앉았으며, 스푼은 그다지 쓰이지 않았고 포크는 전혀 없었다.

9~10세기에 걸쳐 전란과 흉작으로 국토가 황폐해지자, 식생활 역시 황폐하게 변했다. 일부 수도원을 제외하고는 사치스러운 식사는 생각지도 못했으며, 여러 곳에서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자들이 생겼다. 라울 그라펠이라는 방랑 수도사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당시에 인육을 먹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예도 있었다고 한다.

그후 십자군 원정에 의해 동방의 여러 나라로부터 생강·월계수잎 등 새로운 향신료가 전해지면서 유럽 소스의 맛이 일시에 변화되었다. 이들은 베네치아를 경유하여 전 유럽으로 팔려나갔다. 곡류로는 대맥·소맥·호밀 등이 경작되었고, 440년 이래 제빵·제과업은 특허를 얻어서 빵류·과자류를 제조·판매했다. 또 나폴리에는 빵보다도 먼저 마카로니가 공업화되었고, 육류의 소비도 급격히 증가했다.그러나 하층민의 생활은 궁핍했다. 14세기에는 타유방이라는 사람이 〈르 비앙디에〉라는 이름으로 프랑스 최초의 요리서를 저술했다.

또한 궁정에서는 샤를 7세의 애첩인 아니에스 소렐 등이 유능한 요리사를 고용하여 왕에게 훌륭한 음식을 대접하게 했는데, 여러 종류의 요리에 그 이름들이 남아 전한다.

16~18세기

1535년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감자가 소개되자, 독일 등 밀이 재배되지 않는 북방 여러 나라의 식량사정은 점차 호전되어 갔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식생활은 수송의 곤란으로 인해 다양하지 못했으며, 지방의 생산물에 따라 현저하게 달랐다. 그때까지 유럽에서는 이탈리아 요리가 최고로 꼽혔다. 프랑스 왕 앙리 2세와 앙리 4세가 향신료의 수입으로 부자가 된 이탈리아의 메디치가(家)에서 각각 왕비를 맞아들인 결과, 프랑스 궁정요리는 이탈리아에서 온 뛰어난 요리사에 의해 두드러지게 향상되었다.

셔벗, 이탈리아식 소스 등이 소개되자, 귀족들은 식사법을 배웠고 이들 요리는 유럽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때는 아직 포크가 없었고, 왼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었으므로 손을 닦기 위한 냅킨이 사용되었다. 궁정에서는 접시마다 냅킨을 바꿔냈다. 16세기에 〈수상록〉을 쓴 몽테뉴는 그의 글에서 "일반 가정에서도 접시마다 냅킨을 바꾸는 것이 좋다"고 썼다. 당시에도 서민의 식탁은 보잘것없었으므로 앙리 4세는 "백성들에게 1주일에 2번씩 닭고기를 먹이고 싶다"고 한탄했다고 전한다. 이무렵에 올리베르 드 세르에 의해 채소의 재배법이 제창되었다.

17세기에 들면서 프랑스에서는 미식가였던 루이 14세의 영향으로 새로운 조리법이 연구되었고, 식사법에도 일정한 규칙이 생겼다.

17세기말에는 채소와 과실의 재배가 큰 진전을 이루었으며, 과실건조법이 행해졌고 보존식도 발전했다. 각지에서 포도주가 생산되었고, 1668년 이후에는 발포성 샴페인이 만들어졌다. 프랑스 요리가 가장 발달했던 18세기에 루이 15세의 식탁에 12코스짜리 요리가 등장했다. 유명한 조미료인 마요네즈 소스는 그 무렵 리슐리외 추기경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미식의 정점에 달했던 궁중의 식생활에 비해 농민들의 식생활은 가난했다.

고기는 일요일이나 축일에 수프에 베이컨을 넣어 먹는 정도였고, 음료도 포도주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B. 사바랭은 1740년에 남긴 기록에서 당시 도시 중류가정의 식사에 대해, "제1코스는 오트볼, 제2코스는 칠면조구이·채소요리·샐러드·크림, 제3코스는 치즈·과일·잼"이라고 소개했다.

한편 18세기의 영국에서는 신대륙으로부터 감자·당근·옥수수·토마토 등의 식물이 도입되면서 식생활이 개선되었으며, 이것은 유럽 각지로 전파되었다.

조리 기술의 진보와 함께 수프 종류에는 스푼이 사용되었고, 1720년경부터 끝이 4개로 갈라진 포크가 유럽 전역에 보급되었다. 또한 러시아에서는 1709년 인접 제국을 격파한 표트르 대제가 왕위에 올라 러시아인을 중심으로 한 국가를 확립했는데, 그들의 식생활은 대단히 빈약했으나 프랑스인 요리사들에 의해 19세기에 들어 두드러진 향상을 보았다.

19세기 이후

18세기 후반에 일어난 산업혁명은 식생활에도 풍요로움을 가져왔다.

식품의 보존법이 발달하는 한편, 수송수단의 발달에 따라 먼 거리까지 신선한 식품이 공급되게 되었다. 그와 함께 요리기술도 정점에 달해, 오늘날 문명사회에 널리 알려진 서양요리가 이때에 확립되었다. 또한 마가린이 개발되어 버터 제품의 부족을 보완했고, 가종 유제품의 개발도 눈부시게 이루어졌으며 여러 가지 치즈와 함께 요구르트도 만들어졌다. 파리에 일류 레스토랑이 생긴 것은 1865년의 일이며, 메뉴는 콩소메·알요리·가금요리 등이었다. 파리에 이후 수많은 레스토랑이 생겨났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시에는 극심한 식량난에 부딪혔으며, 전쟁 이후에는 식품의 생산과 조리기술이 한층 발달했다.

그와 함께 영양학과 식품공업이 급속한 발달을 보았다. 다만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식량사정이 곤란한 가운데, 마가린에 버터의 맛을 가미하고 커피 대용품에 커피 향기를 넣는 방법 등이 고안되었다. 20세기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조리기술이 발달했는데, 이는 많은 유명 조리사의 등장에 힘입은 것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은 〈요리지침〉·〈식단의 서(書)〉 등을 쓴 에스코피에로서, 독일 황제에게서 '요리사의 황제'라고 격찬받은 바 있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영국의 유명한 호텔 주방에서 보냈으며, 그의 저서는 유럽 및 미국에서 출판되어 프랑스 요리의 진수를 세계에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미식에 대한 의식도 달라졌으며, 식사는 즐기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생존하기 위한 것이 되었다. 또한 살을 빼기 위한 미용식도 등장하여 전통적인 프랑스 요리는 점차 퇴조하는 추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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