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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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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뒤부터 로마가 이집트를 정복할 때까지 고대 그리스의 역사.

헬레니즘 시대

ⓒ Captain_Blood/wikipedia | CC BY-SA 3.0

헬레니즘 시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뒤부터 로마가 이집트를 정복할 때까지를 가리킨다.

로마의 이집트 정복은 고대 그리스 제국의 종말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종말이 아니라 그리스적 요소와 비그리스적 요소의 융합이라고 생각하는 견해도 있다. 헬레니즘의 형용사형 헬레니스틱(Hellenistic)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전의 고대 그리스 문화를 가리키는 형용사 헬레닉(Hellenic)과는 다른 용어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뒤 그리스 세계의 지도자가 된 사람들은 대왕에 비하면 그야말로 피그미족처럼 왜소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실만 보아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었는가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어찌되었든 혈통은 중시되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일한 피붙이인 이복 동생과 유복자가 함께 왕위에 올랐다. 필리포스 왕의 서자(庶子)는 정신병자였지만 필리포스 3세 아리다이오스(BC 358경~317) 왕으로 선언되었다.

알렉산드로스가 BC 323년 6월에 세상을 떠난 뒤 록사네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도 알렉산드로스 4세(BC 323~310)로 왕이 되었다.

그러나 두 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에서는 안티파트로스가 한동안 권력을 장악했고, 바빌론에서는 고위 관리인 페르디카스(BC 365경~321)와 크라테로스(BC 370경~321)가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

알렉산드로스가 추진하던 계획은 만장일치로 중단되었다.

그의 휘하 장군들은 군사적으로 명성을 얻을 가망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총독 자리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애꾸눈 안티고노스(BC 382경~301)는 안티파트로스와 마찬가지로 알렉산드로스가 죽었을 당시 바빌론에 없었다. 그는 거의 10년 동안 프리지아를 다스리면서 용감한 군인이자 유능한 행정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의 확고한 태도와 임기응변의 재능은 그리스 도시에서 인기가 높았다. 바빌론에 있던 장군들 가운데 프톨레마이오스(BC 367/366경~283)는 처음부터 마케도니아 제국이 통합을 오래 유지하지는 못하리라고 예상했다.

이집트 총독 자리를 얻은 그는 이곳에 독립 왕국을 세우려 했으며 게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신을 확보함으로써 더욱 명성을 높였다. 리시마코스(BC 360경~281)는 이집트보다는 이익이 덜한 트라키아를 다스렸다. 개인적 기량도 뛰어나고 훌륭한 무예를 갖춘 것으로 유명한 레온나토스와 셀레우코스는 때를 기다렸다.

국내 행정의 책임을 맡은 카르디아의 에우메네스는 군인들에게는 과소평가받았지만 그는 사실상 어느 누구보다도 제국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후 20여 년 동안 벌어진 음흉한 권력 투쟁은 놀라우리만큼 복잡했다. 우선, 에우메네스의 지지를 얻어 두 왕의 이름으로 제국을 다스리던 페르디카스가 개인적 야망을 품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암살당했다. 군대는 안티파트로스를 섭정으로 임명했다. 안티고노스는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카산드로스를 부지휘관으로 삼아 아시아 지역 주둔군을 장악했으며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에서 확고한 지위를 굳혔다.

바빌론 총독 셀레우코스와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는 계속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때를 기다렸다. 마케도니아인은 아니지만 막대한 재산가였던 에우메네스는 두 왕을 대신해 장군과 총독들의 야심을 견제할 능력이 있었다.

BC 319년 안티파트로스가 죽고 폴리페르콘이라는 무능한 정치인이 뒤를 이어 섭정이 되었다. 그는 본토의 그리스인들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새 포고령을 발표해 그들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다. 그 결과 아테네인들은 새로 얻은 자유를 이용해 마케도니아에 우호적인 사람들을 처형했다.

훌륭한 인물이지만 타협적이던 포키온도 이때 처형당했다. 마침내 전쟁이 일어났으며 에우메네스는 폴리페르콘과 손잡고 안티고노스에게 도전해 바빌론을 확보했지만 BC 316년에 배신당해 목숨을 잃었다. 셀레우코스는 이집트로 달아났다.

폴리페르콘은 입지가 약화돼 얼마 후 유능하고 정력적인 카산드로스에게 쫓겨났다.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의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게 되자 카산드로스는 테베를 재건하고 아리스토텔레스 학설의 신봉자인 팔레론의 디미트리오스에게 아테네를 맡겼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어머니 올림피아스가 필리포스 3세를 제거했으나 그녀는 카산드로스에게 죽음을 당했으며 록사네와 알렉산드로스 4세는 카산드로스의 보호 또는 감시를 받았다.

안티고노스는 이제 초기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유력한 인물이 되었다.

카산드로스와 프톨레마이오스 및 리시마코스는 연합전선을 결성해 그에게 대항했다. 4년 동안(BC 315~311) 싸웠지만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안티고노스는 정력적이고 임기응변의 재치와 상상력이 풍부했지만 상대편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못했다. 이 시기에 일어난 주요변화는 셀레우코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바빌론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는 것뿐이었다. BC 311년 네 지도자는 제국을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와 키프로스를, 안티고노스는 아시아를, 리시마코스는 트라키아를 얻었으며, 카산드로스는 알렉산드로스 4세가 성년이 되는 BC 305년까지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권력 추구 과정에서 정당한 왕위 계승은 곧 무시당했다.

카산드로스는 BC 310년 록사네와 어린 알렉산드로스를 죽였다. 안티고노스는 셀레우코스를 쳐부수려고 했지만 셀레우코스는 파괴된 바빌론과 동부의 속국들을 완강히 지키며 내놓지 않았다. 그러나 인도만은 인도 왕 찬드라굽타에게 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안티고노스는 '영리한' 아들 디미트리오스(BC 336~283)의 효과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폴리오르케테스(포위공격자)라는 별명을 가진 디미트리오스는 팔레론의 디미트리오스를 추방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했으며 결국에는 코린트 동맹도 재건했다.

아테네인들은 신에게 바치는 경의로써 그를 찬양했고 파르테논 신전을 그의 궁전으로 내주었다. 디미트리오스는 해전에서 프톨레마이오스를 격파하고 키프로스와 에게 해를 확보했지만 유명한 로도스 포위작전(BC 305~304)에서는 실패했다.

안티고노스와 디미트리오스는 이제 알렉산드로스의 뒤를 잇는 공동 왕을 자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안티고노스는 이집트를 손에 넣지 못했고 다른 통치자들 역시 왕이라는 칭호를 채택했다. 카산드로스·리시마코스·셀레우코스·프톨레마이오스는 동맹을 맺어 안티고노스 및 디미트리오스와 맞섰는데, BC 301년에 연합군은 셀레우코스가 인도에서 데려온 코끼리 부대의 도움을 얻어 입소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 군대를 물리치고 그를 죽였다.

그러나 디미트리오스는 도망쳐 티로스와 시돈을 계속 다스렸다. 리시마코스는 아나톨리아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셀레우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사실상 점령한 남부 일부지역을 제외하고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얻었다. 카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일부 지역으로 만족했지만 그뒤 병에 걸려 셀레우코스에게 투항했다.

디미트리오스가 몰락한 후 프톨레마이오스가 제해권을 장악했다.

그는 천수를 누렸고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BC 308~246)가 평화롭게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의 첫 아내가 낳은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안티파트로스의 손자)는 '벼락'이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리시마코스의 주위에 계속 파문을 일으켰고 리시마코스는 곧 지지를 잃었다. 셀레우코스는 리시마코스 군대를 쳐부수고 그를 죽였으며 이집트를 제외한 옛 마케도니아 왕국을 거의 손에 넣을 단계까지 다다랐다.

그러나 그는 리시마코스 군대의 지지를 받은 케라우노스에게 암살당했다(BC 281).

셀레우코스의 아들이 그뒤를 이어 안티오코스 1세(BC 324~261)가 되었다. 그리스 본토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은 영리한 디미트리오스의 아들인 안티고노스 고나타스(BC 320경~239)와 에페이로스 왕 피로스였다(피로스).

BC 3세기 중엽에 3대 세력중심지는 마케도니아·시리아·이집트였지만 통치자들의 권력은 사실상 아직도 불안정한 상태였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셀레우코스가 죽은 뒤 이미 공격을 시작해 밀레토스를 확보해 두었다. 그는 셀레우코스 왕조가 다스리는 시리아를 얻으려고 BC 276년 새로이 공세를 폈지만 시리아군에게 격퇴당했다. 서쪽에서는 피로스가 에페이로스로 돌아와 마케도니아를 침공했지만, 그리스 남부지방을 공격하기 위해 마케도니아를 포기했다. 그러나 그는 스파르타 점령에 실패했고 아르고스에서 시가전을 벌이다가 지붕 위에서 구경하던 한 여인이 던진 타일에 맞아 죽었다.

북부에서는 안티고노스의 권력에 만만찮게 도전하는 세력이 없었다.

그러나 남부에서는 아테네가 크레모니데스(the handsome Chremonides)의 지휘를 받으며 스파르타를 비롯한 다른 도시들과 연합해 그에게 맞섰다. 이 동맹은 이집트의 후원을 받았고 에페이로스에서도 약간의 지원을 받았다. 4년 동안(BC 266~262) 치열한 전쟁을 벌였으나 동맹은 깨졌으며 아테네의 정치 권력도 마침내 무너졌다. 그러나 아테네는 문화 중심지로 살아 남았다. 안티고노스는 스파르타를 제외한 나머지 도시에 자신이 선정한 참주를 두었다.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1세는 BC 261년에 죽었다.

왕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안티오코스 2세(BC 287~246)는 안티고노스와 동맹을 맺고 프톨레마이오스 2세에게 맞섰다. 제2차 시리아 전쟁(BC 259~255)에서 안티오코스는 아나톨리아 해안과 페니키아를 대부분 되찾았으나 해전에서 승리한 안티고노스는 해상을 장악했다. 그러나 BC 246년 안티오코스 2세가 죽자 시리아에서는 새로운 권력 투쟁이 벌어졌고, 이듬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집트 왕이 된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BC 284경~221)는 혼란에 빠진 시리아 영토 안으로 깊숙이 진격할 수 있었다.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코스(BC 265경~225)는 간신히 국내안정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땅을 어느 정도 되찾았다.

BC 3세기에 그리스 본토에서는 동맹 내부에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사태가 일어났다. 동맹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동맹은 아카이아 동맹이었다. 전에도 존재했던 이 동맹은 BC 280년 재건되었으며 수많은 도시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아카이아 동맹은 제한된 지역에서 얼마 안되는 기간 동안 존속했지만 도시 국가들의 다양한 성격을 넓은 견지에서 통합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동전에 지역적으로 한정된 신, 즉 코린트에는 아프로디테, 아르고스에는 헤라를 새겨넣었으나 이 무렵 동전에는 이들 대신 좀더 널리 섬겨졌던 제우스 호마기리오스와 데메테르 파나카이아가 새겨졌다. 역사가 폴리비오스의 말에 따르면, 아카이아 동맹 동안 가장 중요한 시기에는 펠로폰네소스 반도가 거의 하나의 도시 국가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이 당시(BC 3세기) 로마는 이탈리아 남부 및 시칠리아 섬에 있는 그리스 식민지를 계속 잠식하고 있었다.

타렌툼 시(市)는 로마를 두려워해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에게 원조를 청했다. 시라쿠사에서는 피로스를 지지하는 히에론(BC 306경~215)이 BC 269년 왕이 되어 권력을 잡은 뒤 54년 동안 시라쿠사를 다스렸다. 그는 한두 해 동안 로마에 대항한 뒤에는 로마와 동맹을 맺었으며 로마가 카르타고와 싸울 때 로마를 도왔다.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마살리아(오늘날 프랑스 마르세유)는 그리스 세계의 변경으로서, 로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동시에 독자적인 강력한 해군과 안정된 과두 정부를 유지했다.

BC 220년대말 3대 강대국인 시리아·이집트·마케도니아에서는 새로운 군주들이 왕위에 올랐다.

대왕이라고 불리며 형 셀레우코스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BC 242경~187)는 처음부터 제국주의적 팽창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다. 그는 제4차 시리아 전쟁(BC 219~216)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는 이집트 영토를 정복하려다가 실패했지만, 동쪽에서는 아르메니아·파르티아·박트리아를 손에 넣었고 인도의 북서쪽 국경 지방과 페르시아 만 건너편에서 인상적인 양동(陽動) 작전을 벌였다.

그는 유럽으로 눈길을 돌렸으나, 카르타고의 한니발과 싸운 뒤 곧 전력을 회복한 로마의 방해를 받았다. BC 188년에 맺은 아파메아 평화조약에 따라 그의 영토는 아시아 지역으로 한정되었지만 이는 상당히 넓은 영토였다. 이집트에서는 BC 221년 20대 초반에 왕위에 오른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BC 244경~205)가 이집트 군인들과 함께 라피아에서 시리아를 격퇴했다.

그가 통치하던 시절에는 남부지방을 다스리던 누비아족 통치자들과 이집트 원주민의 권력이 강해진 것이 특징이었다. 그는 BC 205년 다섯 살짜리 아들 하나를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에 마케도니아에서는 필리포스 5세(BC 238~179)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안티오코스와 마찬가지로 팽창주의적 야심을 갖고 있었으며 평민에게 인기가 높았고 전쟁터에서는 유능했지만 판단력과 안정성이 부족했다.

로마는 BC 229~228년과 BC 219년 일리리아 해적 소탕 작전을 벌였다.

그뒤 BC 218년~202년에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과 싸우는 데 몰두해 자원을 다 소모했다. 그런데도 로마는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때 키노스케팔라이에서 필리포스 5세를 쳐부수어 패권을 입증했다. 그뒤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는 필리포스 5세의 아들 페르세우스를 물리쳤고,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도 물리쳤지만 로마는 한 뼘의 땅도 합병하지 않았다.

로마를 지배하던 과두정의 지도자들은 다른 영토를 병합해 그곳의 행정까지 떠맡으려 하지 않았다. 행정 책임이 무거워지면 그만큼 권력자의 수를 늘여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로마는 적들의 인정대로 1마리의 용이었으나 그것은 되도록 충돌을 피하고 싶어하는 소극적인 용이었다.

BC 175년 집권한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BC 215경~163)는 왕국 통합을 위해 그리스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에피파네스(神의 現身)라는 칭호에도 나타나 있듯이 안티오코스 4세는 자신을 신으로 생각했는데, 이스라엘 신의 절대권을 신봉하는 정통 유대인들은 이런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안티오코스는 유대교 예배를 금지하고 유대교 신전 제단에 올림포스의 제우스 신을 위한 제단을 설치했다.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소극적이었지만 나중에는 유다 마카베오(로마인들과 '우호 연합동맹'을 결성한 인물)의 지도로 적극적이고 호전적인 저항운동을 벌였다.

이 투쟁은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고 그동안 시리아의 통치자들도 여러 번 바뀌었기 때문에 자세한 투쟁 내용은 매우 복잡하지만 사실상 1세기 동안 유대 민족은 상당히 많은 독립성을 누렸다.

BC 146년경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불안정한 상태를 더 이상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다짐과 동시에 카르타고도 멸망시키기로 결심했다. 로마는 카르타고를 파괴했으며 오늘날의 튀니지에 있는 비옥한 들판에 속주를 건설했다.

마케도니아 왕을 자칭하는 사람이 군대를 일으켜 테살리아를 침략하자 로마군은 그를 패배시켜 처형했으며 마케도니아를 로마의 속주로 병합했다. 로마에 예속된 그리스인들은 로마인들과 충돌했고 그들의 애국심은 높아졌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로마인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테베를 다룬 방식 그대로 코린트를 완전히 파괴했다. 그리스의 나머지 지역에서는 동맹이 해체되었고, 민주주의는 폐지되었으며, 권력은 부자들의 손에 들어갔다.

BC 2~1세기 이집트와 시리아 왕국에서 일어난 일들은 대부분 격한 불화와 싸움이었다.

이집트 왕가에서는 남매의 근친 결혼이 자주 이루어졌고, 통치자들은 대부분 평범했지만 나라는 여전히 부유했으며 영토도 남쪽으로 팽창을 계속했다. 시리아에서는 내란과 분열이 끊이지 않았으나 안티오코스 7세 시데테스(BC 159경~129)가 메소포타미아·바빌로니아·메디아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어 그뒤 얼마 간은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은 듯했다.

그러나 BC 130~129년 다시 결집한 파르티아인들은 왕을 죽였고 그가 되찾은 땅을 모조리 다시 빼앗았다. 그후 시리아 왕국은 약해지고 분열되었으며 이웃 나라들에게 끊임없이 국경을 유린당했다.

BC 256년경부터 그리스계(系) 왕조의 통치를 받은 동쪽 끝의 박트리아는 BC 1세기 중엽에 이르자 차츰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도 서부에서는 인도의 전설적 영웅인 메난드로스가 권력을 잡았다. 간다라 지역(오늘날 파키스탄 북서부)의 예술에는 그리스의 영향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BC 67년 로마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大폼페이우스:BC 106~48)는 폰투스 왕 미트라다테스가 이끄는 흑해의 해적들을 조직적으로 분쇄함으로써 평화로운 교역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미트라다테스는 폰투스 왕국에서 쫓겨나 BC 63년 자살했기 때문에 폼페이우스는 미트라다테스의 위협을 근본적으로 없애버린 셈이다. 폼페이우스는 유명한 동방 정벌을 시작해 시리아를 로마 속주로 병합하고, 유대를 평정했으며, 로마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후 그리스 세계는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BC 48년에 테살리아의 파르살루스에서 대결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트라키아의 필리피에서 브루투스 및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대결했다. 이집트의 그리스계 프톨레마이오스조의 마지막 왕 클레오파트라 7세(BC 69~30)는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권력 정치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세계를 지배하려면 로마를 정복해야 했으며 로마를 정복할 수 있는 길은 누구든 로마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었으므로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를 매혹시켰고, 뒤에는 안토니우스를 사랑의 포로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엉뚱한 사람을 후원한 셈이었다.

세계의 지배권을 얻기 위한 권력 투쟁이 20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그리스에서 벌어진 세번째 충돌은 BC 31년 악티움 해전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이 해전의 승자는 뒤에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된 옥타비아누스(BC 63~AD 14)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들이 다스리던 마지막 왕국 이집트는 마침내 로마에 정복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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