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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
동아프리카에서 유적이 발견되면서 아프리카 대륙에 오랜 옛날부터 인간이 살고 있었음을 암시해주고 있지만, 대륙의 역사는 북아프리카 이집트 문명의 점진적인 발전과정에서 시작된다.
마그리브 또는 바르바리 등으로 알려진 지금의 모로코·알제리·튀니지 등이 위치한 북아프리카 서부지역은 바다와 사막으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어 매우 특징적인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역사가 형성되기 시작한 고대부터 베르베르인들이 이 지역에 거주해왔는데, 바르바리라는 이름은 이 종족에서 유래된 것이다.
외부로부터 사람들이 이주해와 가장 먼저 정착이 이루어진 곳은 페니키아인들에 의한 튀니지였다. 이중에서 가장 유명한 정착지는 도시국가 카르타고였다. 카르타고는 지중해의 동·서 통로를 장악했으며 또한 600년 이상 지중해 서부를 지배했다. BC 264~146년에 걸친 3번의 포에니 전쟁은 카르타고의 힘을 무력화시켰으며, 바르바리는 로마 제국으로 흡수되어 반달족이 침입할 때까지 그 지배하에 있었다. 게르만 혈통의 반달족은 AD 429년 스페인으로부터 바르바리로 칩입해왔다.
쇠락해가던 바르바리의 로마 정부는 반달족 앞에 무릎을 꿇었고 이들은 약 1세기 동안 그 지역을 통치했다. 이들과 로마화한 토착민들 사이의 알력은 규율이 잡혀 있는 정부체제를 붕괴시켰으며, 반달족 정부는 비잔틴 제국의 새로운 맹습을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졌다. 6세기경 로마 제국의 중심권력은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 533년 콘스탄티노플에서 파견된 비잔틴의 벨리사리우스 장군은 아프리카에 상륙해 반달족을 몰아내고 동부 바르바리에 로마 제국을 재건했다.
바르바리에 남아 있던 로마식 질서는 7세기 후반 이슬람교도의 침입으로 사라졌다. 이들의 첫번째 원정은 이집트에서 출발해 몇 곳의 기지를 급습한 것에 불과했다. 본격적인 이슬람국의 설립은 670년경 우크바 이븐 나피에 의해 세워진 알카이라완(지금의 튀니지 카이루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랍인의 초기 침략의 열풍은 수적으로 미미했고, 종족의 생활이나 언어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바르바리는 11세기 베두인의 침입을 받기 전까지는 베르베르인의 국가였다. 900년경까지 바르바리는 완전히 이슬람 정부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19세기 유럽인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 상태를 유지했다. 현재의 알제리 지방은 19세기 프랑스인들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실제적으로는 중앙정부가 없는 상태였다. 바르바리에 처음으로 투르크족이 근거지를 확립한 시기는 약탈선 선장 아루즈가 알제리 지젤리에 자리를 잡은 1514년부터였다.
이같은 개인사업은 후에 이스탄불의 오스만 정부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았으며, 알제리의 섭정체제가 탄생해 70년간 지속되었고, 그후 튀니지 섭정체제로 이어졌다. 1830년 프랑스는 알제리를 점령했으며, 그 의도는 외형상으로는 해적을 소탕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사실은 샤를 10세가 국내에서 일어난 사건들로부터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던 필요성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따라서 결말이 확연했던 알제리 정복은 오랜 시간을 끌면서 진행되었다. 이슬람교에 호소해 반대세력을 조직해냈던 아브델카데르의 용맹스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알제리 정복은 일반적으로 1847년에 완료된 것으로 추정된다. 튀니지와 모로코도 같은 운명의 위협을 받았다. 아프리카 전대륙에 대한 유럽인들의 분할 점령이 막 시작되었던 것이다.
사하라 사막과 수단
북아프리카인들은 수단에서 흑인과 접촉하게 되었다.
제4기 이래 사하라 지방이 말라버린 것은 신석기 대변혁을 촉진시켰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일 강 유역에서 이같은 변혁이 진전됨으로써 이집트 왕조의 문명이 출현했던 것이다. BC 8세기 중엽 수단인의 쿠시 왕국은 이집트를 정복하고 그곳에 제25왕조를 세울 만큼 막강한 힘이 있었는데, 제25왕조는 BC 7세기 아시리아인들에게 축출될 때까지 그곳을 통치했다. 그후 이집트풍에 물든 쿠시의 군주는 나일 강 유역 수단의 혼성 거주민들을 계속 통치했다.
메로에는 아프리카에서 철을 사용한 최초의 중심지였다. 5세기경 왕가라 지역 바로 북쪽의 사막과 경계를 이루던 사바나 지대에 가나 왕국이 출현했다. 이 왕국은 그 지역의 흑인 말링케(만딩고) 일족에 대한 우위권을 확립했다. 7세기 마그리브에 아랍인들이 들어올 무렵 가나는 이미 '황금의 땅'으로 이름을 떨쳤다. 황금을 비롯한 수단 서부지방의 산물들은 사막 무역로를 지배했던 베르베르 종족을 통해 가나의 시장으로 전해졌다.
낙타가 사막 횡단의 수단으로 이용되기 시작하면서 베르베르 유목민들이 사막을 능숙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이동거리가 늘어나 흑인들이 경작하는 오아시스에 대해 덜 의존하게 되었으며, 또 수단 내의 흑인들의 경작지역은 남쪽으로 밀려났다.
5~13세기 사하라 지역과 수단의 역사를 보면 누비아를 제외한 그밖의 지역에서 종족들의 이동이 상당히 빈번했다. 누비아에서는 5세기경 여러 통치자들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여 쿠시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에 새로운 힘을 더했다.
그러나 이들 왕국은 이슬람 무역상들과 이집트로부터 베두인들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점차로 쇠약해지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14세기경에는 역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수단의 역사 형성기에서 중부 및 서부 수단에 연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외부적 흐름을 두 줄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마그리브로부터의 영향이며, 또 하나는 나일 강 유역 및 홍해로부터의 영향이다. 이 두 줄기가 하나로 만나 서로 합쳐진 곳이 바로 지금의 나이지리아 지역이다.
아프리카 서부에서 당시 주로 흑인이 중심을 이루고 있던 가나 왕국은 산하자베르베르 종족과 충돌을 빚었다.
가나 왕국은 마침내 1076년경 알모라비데 왕조에게 정복당했는데, 알모라비데 왕조는 마그리브에 좀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만딩고 종족의 순디아타는 가나를 붕괴시키고 좀더 강력하고 새로운 말링케인 제국을 건설했는데, 그것이 바로 말리 제국이다. 금, 소금, 콜라 열매, 노예 등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말리와 통북투 및 가오는 크게 번성했다.
19세기에 와서는 외부인들이 아프리카의 무역과 영토에 대해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인들은 세네갈 강 유역에 거점을 세웠으며, 영국인들은 황금해안과 나이지리아 지역의 무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집트는 나일 강 유역의 수단을 통제했으며, 이슬람교도들 역시 수단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나이지리아에서는 풀라니족이 흥기해 1804~10년에 국가를 세웠다. 이렇게 세워진 두 나라가 바로 소코토국과 간도국이다.
기니
기니의 역사는 11세기 이전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역사적 기록은 일반적으로 기니의 국가형성 과정이 수단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1445년경 포르투갈인들이 해상을 통해 세네갈 강에 도착했고, 40년 후에는 식민지 포르투갈령 기니를 건설했다. 서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포르투갈의 무역 독점은 네덜란드인의 진출로 와해되었다. 포르투갈령 기니에서 좀더 서쪽으로 떨어져 있는 노예 해안에는 18세기 후반경 아샨티족이 직접 교역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프랑스가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연맹을 창설하고 독일인들이 토고와 카메룬에 식민지를 건설한 반면, 영국은 감비아와 시에라리온, 황금 해안 및 나이지리아를 획득했다.
중앙 아프리카
콩고 밀림지대에 거주하는 피그미족과 같이 몇몇 고립된 부족을 제외하고 중앙 아프리카의 토착민들은 반투어를 사용하는 흑인들이다.
중앙 아프리카의 반투족이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10세기경 이후의 아랍 문헌을 통해서이다. 포르투갈인들은 하(下)콩고와 모잠비크 주변 지역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또한 황금 무역에 있어서도 저항에 직면했다. 그래서 그들은 17, 18세기에는 앙골라와 모잠비크에서 직접적인 개척사업을 모색하게 되었다. 루안다와 켈리마네까지 대탐험(1853~73)을 했던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중앙 아프리카가 노예무역으로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깨닫게 했으며, 그의 여행기는 노예무역의 비인도적인 행위에 대한 유럽인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리빙스턴의 탐험에 자극받아 헨리 모튼 스탠리는 중앙 아프리카의 심장부를 탐험했고, 벨기에의 레오폴 2세는 콩고 자유국을 건설했다.
남아프리카
이 지역의 초기 역사는 종족 집단이 계속해서 분열되어가는 양상을 보여준다.
18세기 중엽에는 주요 4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북부 트란스발과 남부 로디지아는 렘바족과 벤다족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동부지역의 림포포 강 하류와 모잠비크 남부는 통가족이, 드라켄즈버그 동쪽 해안평원은 응구니족이, 서부지역은 소토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17세기까지도 남아프리카에 대한 유럽인들의 세력 확장은 별로 중요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17세기 전반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희망봉을 경유해 동인도제도에 이르는 좀더 빠른 항로를 개척했다.
1652년 이 회사는 케이프 반도 테이블 만에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소규모의 인력을 파견했다. 최초의 이주민들은 주로 네덜란드인이었으며, 1688년 이후에는 프랑스의 위그노들이 도착했다. 18세기초에 이르자 정착자들은 해안에 만족하지 못해 내륙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으며, 점차 트렉부른(유목생활을 겸하는 농민)으로 구성된 그들 스스로의 새로운 사회를 건설했다.
칼뱅주의를 신봉하는 이들 보어인(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인)들은 동부와 북동부로 이주했으며, 1770년대 무렵 그들은 그레이트피시 강에 도달했다. 코이코인족과의 갈등으로 인해 1779년 케이프 식민지에서 처음으로 케이프 프론티어 전쟁(카피르 전쟁)이 일어났다. 1795년에는 영국인들이 케이프를 차지했으며, 1802년 케이프는 바타비아 공화국의 수중으로 들어갔다가 1814년 정식으로 영국에 양도되었다.
동아프리카
초기 기록은 10세기 이래 해안을 따라 활동했던 아랍 무역상들의 무역거점들을 알려주고 있다.
지금의 탄자니아 해안에서 떨어진 킬와는 오늘날의 짐바브웨로부터 황금이 공급되면서 15세기에 무역거점으로서 절정기를 맞았다. 당시에는 상아와 노예 무역도 성행했으며, 동아프리카는 인도 및 아랍과 교역했다. 15세기 말엽 포르투갈인들은 동부해안을 따라 정착지를 건설했으며, 1592년에는 지저스 요새 건설작업을 시작했다. 이는 루부마 강 북쪽에서 가장 중요한 포르투갈인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1696년 아라비아 반도에 있던 오만의 군대가 몸바사를 공격하여 포위하면서 매우 심각한 위협이 초래되었다. 그 다음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외지인은 프랑스인이었는데, 이들은 노예무역을 부활시켰다. 19세기초 프랑스인들은 영국의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영국인들은 동아프리카 지역에 자신들의 세력권을 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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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아프리카의 고대에서 근대까지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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