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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쿠사

다른 표기 언어 Siracusa
요약 테이블
위치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 동해안 남부
인구 425,000명 (2024년 추계)
면적 204.08㎢
언어 이탈리아어
대륙 유럽
국가 이탈리아

요약 시칠리아 섬의 동해안, 카타니아 남쪽 53km 지점에 있으며 고대 시칠리아의 중요한 그리스 도시였다.
1693년 도시가 지진으로 크게 파괴되었지만 끊임없는 재건 노력으로 훌륭한 건물들이 세워졌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인 1943년 연합군의 시칠리아 섬 공격으로 입은 피해는 전후의 더 크고 새로운 번영 속에서 신속히 복구되었다.
이 시는 현재 인근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가공을 위한 중심지이며 여러 경공업 시설도 있다. 무역·어업·관광업은 추가 수입원이다.
시라쿠사의 핵심부는 남쪽으로 튀어나와 그레이트하버로 알려진 만을 반쯤 둘러싸고 있는 오르티기아 섬이다. 오르티기아 섬에서 본토로 연결되는 다리 근처에는 아폴론 신전의 유적이 있다. 같은 시기에 세워진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은 그레이트하버 서쪽 측면에 있다.

시칠리아 섬의 동해안, 카타니아 남쪽 53km 되는 지점에 있으며 고대 시칠리아의 중요한 그리스 도시였다.

시라쿠사(Siracusa)

ⓒ Websi/Pixabay | Public Domain

BC 734년경 귀족정치가인 아르키아스가 이끈 코린트인들이 정착한 이 도시는 곧 해안평야와 그 너머 구릉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초기 그리스 정착민들이 권력집단을 이루었던 반면, 시켈 토착민(시쿨리족)은 피지배 계층으로서 노동에 종사했다.

BC 5세기초에 시라쿠사인들은 서쪽에 있는 도시 젤라의 히포크라테스에게 패배했다. 그후 권력집단은 민주정치를 요구하는 혁명에 의해 권력을 잃고 추방당했으며, 망명 기간 동안 시라쿠사를 정복하여 자신의 정부를 옮겨온 히포크라테스의 후계자 겔론을 지지하게 되었다.

BC 485~478년에 통치한 겔론은 BC 480년 히메라에서 카르타고의 대대적인 침공을 물리쳐 지배권을 확고히 했다. 그리고 시라쿠사는 겔론과 그의 형제 히에론 치하에서 권력과 문화적 번영의 절정기를 누렸다. 참주로서 히에론의 후계자였던 트라시불로스는 BC 466년 혁명으로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민주적 법령하에서 시라쿠사인들은 이웃한 아크라가스 시와 시쿨리족과의 전쟁을 겪으면서 겔론이 획득했던 영토를 잃어야 했으나 결국 살아 남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라쿠사인들이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아테네의 오랜 포위공격(BC 415~413)을 견뎌냄으로써 궁극적으로 아테네 침략군을 시칠리아 섬에서 파멸시키고 아테네가 그리스 자체에서 지녔던 세력을 약화시켰다는 점이다(시칠리아 원정). 몇 년 후 부활한 카르타고 세력이 시칠리아를 덮쳐왔다. 그러나 시라쿠사는 디오니시오스 장군(디오니시오스 1세)에 의해 아크라가스와 시칠리아의 다른 도시들에 닥친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BC 405년에 전제권력을 얻어 BC 367년까지 시라쿠사의 참주로서 통치한 디오니시오스 1세는 카르타고와 3번의 전쟁을 치르면서 카르타고인이 시칠리아 섬 서부 이외의 지역을 차지하는 것을 막았고, 이탈리아 반도의 '발' 부분까지 시라쿠사의 지배권을 확대했다. 디오니시오스 1세 치하에서 시라쿠사는 그리스 도시들 중 가장 훌륭하고 방비가 잘 되었으며, 함대는 지중해에서 가장 강해졌다.

디오니시오스 1세의 아들 디오니시오스는 삼촌 디온이 독재권력에 도전하기 전까지 10년 동안 평화롭게 다스렸다. 디온은 짧은 기간의 유혈 내란에서 승리했으나 BC 354년에 암살당했다. 뒤이은 내란을 종식시킨 코린트인 티몰레온은 카르타고를 무찌르고, 시라쿠사에 온건한 과두정치를 도입하면서 시칠리아 정세를 재정비했다(BC 344~336).

BC 317년 이 체제는 군인 아가토클레스에 의해 전복되었다. 그가 참주가 되었다가 나중에 왕이 되면서 수립한 시라쿠사 제국은 BC 289년 그의 죽음과 함께 무너졌다.

계속되는 혼란상태에서 에페이로스(지금의 이피로스)의 피로스가 시칠리아를 침략해오는 카르타고인을 무찔렀으나 나중에 그와 용병들이 메사나(지금의 메시나)를 점령했다. 시라쿠사가 새로운 지도자 히에론 2세의 주도로 피로스 군대를 무찌르자 로마가 개입하게 되었고 히에론은 이를 받아들였다. BC 215년 히에론이 죽은 뒤 시라쿠사인들은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다.

시라쿠사는 BC 213년 로마인들에게 포위당해 BC 211년에 함락된 후 로마 속주의 중심지가 되었다. AD 280년에 프랑크족 침략자들한테 약탈당한 시라쿠사는 곧 번영을 되찾아 878년 아랍인들에 의해 점령되기 전까지 번창했다. 이곳은 로마 시대 말기와 비잔틴 제국 시절, 그리고 노르만족·스와비아인·스페인인 등의 지배를 받는 동안 시칠리아 섬에 있는 다른 곳들과 같은 운명을 겪었다.

1693년 도시가 지진으로 크게 파괴되었지만 끊임없는 재건 노력으로 훌륭한 건물들이 세워졌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인 1943년 연합군의 시칠리아 섬 공격으로 입은 약간의 피해는 전후의 더 크고 새로운 번영 속에서 신속히 복구되었다.

이 시는 현재 인근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가공을 위한 중심지이며 그외 여러 경공업 시설이 있다. 항구를 통한 무역·어업·관광업은 추가적인 수입원이다.

시라쿠사의 핵심부는 남쪽으로 튀어나와 그레이트하버로 알려진 만을 반쯤 둘러싸고 있는 오르티기아 섬이다.

계속해서 사람들이 거주해온 오르티기아 섬의 고대유적은 오랫동안 국가가 자리잡았던 지역인 네아폴리스에 비하면 덜 인상적이다. 네아폴리스에 있는 고고학적인 유물로는 히에론 2세가 세운 그리스식 극장(BC 3세기), 로마 시대의 원형극장(2세기), 방벽용 건축재료로 1526년 약탈당한 히에론 2세의 제단 등이 있다. 극장 위쪽에 있는 님파이움(분수)은 고대도시에서 급수원 역할을 했다.

훌륭한 바로크식 정면을 가진 오르티기아의 대성당에는 시라쿠사인들이 히메라에서 승리한 것을 감사하는 뜻에서 세운 아테나 신전의 도리아식 기둥들이 있다.

이 지역 초기 건물들에서 나온 채색 테라코타로 된 건축 부조들은 고고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오르티기아 섬에서 본토로 연결되는 다리 근처에는 아폴론 신전(BC 565경)의 유적이 있다. 같은 시기에 세워진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은 그레이트하버 서쪽 측면에 있다. 오르티기아에 있는 도로들은 중세시대와 르네상스 시대가 시라쿠사의 매력에 기여한 바를 잘 보여준다.

몬탈로 궁전 정면은 14세기의 것 가운데 가장 훌륭하다. 벨로모와 파리시오 궁전들은 13~15세기에 이르는 고딕 양식의 요소를 지녔다. 조반니 베르멕시오의 시민궁전(1628)과 루치아노 알리의 베네벤타노델보스코 궁전(1775)은 17~18세기에 세워진 건축물들 중 가장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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