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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니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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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2세기부터 페니키아인들이 북아프리카 해안에 교역소와 기항지를 건설했다. BC 8세기에는 카르타고가 건설되었고, BC 6세기경에는 카르타고인의 왕국이 현재의 튀니지 대부분을 차지할 만큼 커졌다. 카르타고는 BC 146년 포에니 전쟁이 모두 끝난 후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로마의 지배는 7세기 중엽 이슬람의 침입 때까지 지속되었다.

튀니지는 아바스 왕조와 그 조공국인 아글라브 왕조, 시아파의 파티마 왕조, 알모아데 왕조, 하프스 왕조, 스페인 등의 통치자들 사이에서 거듭 침략을 당했으며, 마침내 1574년 오스만 제국에 복속당했다. 오스만 제국의 통치는 국력이 쇠퇴해진 19세기말까지 계속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국력이 쇠퇴하면서 튀니지는 프랑스·이탈리아·영국의 세력 각축장이 되었다. 한동안 이 3개국 사이의 상충하는 이해관계가 튀니지의 자치를 유지하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되기도 했다.

1881년에 완결된 협상에 따라 영국은 키프로스를 차지하고 프랑스는 튀니지를 보호령으로 삼게 되었다. 합의된 협상내용에 원칙대로 따르자면 현지의 통치자인 이른바 베이(bey)들이 계속 튀니지를 다스리게 되어 있었지만, 실권은 프랑스인들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20세기초 튀니지인들은 참정권의 확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비록 제1차 세계대전중에 프랑스를 지원하기는 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다시 동요하기 시작했다.

1920년 데스투르당은 튀니지인의 동등한 참정권을 요구했다. 1930년대에는 하비브 부르기바를 지도자로 하는 신(新)데스투르당이 등장하여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의 지지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 해산했던 이 정당은 전후에 복귀하여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1956년 프랑스는 튀니지에 완전독립을 부여했으며, 부르기바를 행정수반으로 한 독립 튀니지가 국제연합(UN)에 가입했다. 베이들의 통치는 폐지되고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며, 신데스투르당은 데스투르 사회당(Parti Socialiste Destourien/PSD)이 되었다.

1980년대초에 정부는 정당활동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시책에 착수했고, 노동조합활동으로 구속되었던 노동조합원들이 특별사면 혜택을 받았으며, 튀니지 공산당이 합법화되었다. 마침내 1981년 사상최초의 다수당 경선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었다. 당시 선거에서 기존의 국민전선(PSD와 노동조합의 하나인 튀니지 노동총연맹[UGTT]의 연합전선)이 압승을 거두었으나 야당들(모두 사회주의 연합의 좌파에 해당)은 냉소적으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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