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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대타협'(Ausgleich)을 맺으며 수립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제국(1867~1918)(합스부르크 왕가).
(독). sterreich-Ungarn.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라고도 함 . 별칭은 이중제국.
합스부르크 군주가 지배하는 영토의 공식 명칭인 오스트리아 제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프란츠 2세가 자신을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로 선언한 1804년에 성립했다.
그로부터 2년 뒤에 신성 로마 제국은 소멸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1814~15), 오스트리아는 다시 군소국가의 지도국이 되었으나 1866년 프로이센과 싸운 7주전쟁에서 패배해 독일 연방에서 쫓겨났다. 이에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는 제국의 동부에 새로이 관심을 쏟아 이질적인 요소로 이루어진 자신의 제국을 강화하려고 애쓰게 되었다.
전쟁 전에도 반항적인 헝가리인들과 타협해야 할 필요성은 깨닫고 있었다. 협상 결과는 1867년 2월 8일에 맺어진 대타협이었다.
이 협정은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제국의 나머지 지역 사이에 맺어진 것이 아니라, 황제와 헝가리 사이에 맺어진 타협이었다. 프란츠 요제프는 제국 의회(Rechsrat)의 조언 없이 더이상 헌법을 고치지 않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지만, 실제로 이 협정을 맺을 때 오스트리아 제국 국민의 의사는 고려되지 않았다.
헝가리는 이 협정에 따라 책임 있는 내각 구성권과 완전한 내정 자치를 얻었고, 그대신 전쟁과 외교를 위해 오스트리아 제국을 여전히 하나의 거대한 국가로 유지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이리하여 프란츠 요제프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대외적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헝가리 내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과 비(非)마자르족 보호의무를 포기했다. '공동 군주국'은 황제와 그의 신하인 외무장관, 육군장관으로 이루어졌다. 황제 자신을 제외하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공동 총리는 없었으며 공동 내각도 없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공동 문제는 양국 의회에 대표자로 이루어진 대표단에서 검토하도록 되어 있었다. 관세동맹과 이익금 분배 규정은 10년마다 1번씩 개정하기로 했다. 이 조항 덕분에 헝가리인들은 10년마다 1번씩 제국의 나머지 지역으로부터 상납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대타협은 헝가리 의회가 이 협정을 헌법으로 승인한 1867년 3월부터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의회는 대타협을 수정할 수 없었으며 그대로 비준하는 것만 허용되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의회 다수파인 독일계 자유주의자들은 황제에게서 상당한 양보를 받아냈다. 개인의 권리가 확보되었고, 완전히 중립적인 사법부가 창설되었으며, 신앙과 교육의 자유도 보장되었다. 그러나 장관들은 여전히 오스트리아 의회가 아닌 황제 개인에게 책임을 지웠다.
대타협으로 형성된 국가의 공식 명칭은 오스트리아-헝가리였다.
이 왕국은 독자적인 명칭과 왕, 그리고 독자적인 역사가 있었다. 그러나 제국의 나머지 지역은 뚜렷한 정의조차 없는 우연한 덩어리에 불과했다. 이 지역은 원칙적으로는 '오스트리아 의회에 대표를 파견하는 왕국과 나라들'로 알려져 있었고, 더 간단하게는 '제국의 나머지 절반'이었다. 잘못된 관행 때문에 이 이름 없는 지역은 곧 '오스트리아', '진정한 의미의 오스트리아', '작은 오스트리아'라고 불리게 되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모두 부정확한 이름이며, 1915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해체됨으로써 비로소 '제국의 나머지 절반'이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런 혼란의 원인은 잡다한 조각으로 이루어진 오스트리아 제국이 공통된 의식이나 목적을 가진 국가가 아니라 합스부르크 왕가가 소유한 영토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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