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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10. 8. 10, 프랑스령 피에몬테 토리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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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61. 6. 6, 이탈리아 토리노 |
국적 | 피에몬테 |
요약 국제적 대립관계와 혁명운동을 이용해 사보이 왕가 주도의 이탈리아 통일(1861)을 이룩했으며 새 왕국의 초대 총리를 지냈다. 처음으로 파리와 런던을 방문하여 유럽에 관한 지식을 넓히고, 영국과 프랑스의 의회활동에 열렬한 관심을 보였다. 1848년 <리소르지멘토 2>라는 신문을 창간하고 개혁을 옹호하는 글을 실었다. 그는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를 설득해 자유주의적 헌법을 승인하도록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의회의원으로 선출된 뒤에는 보수주의와 혁명주의 사이의 중도적 입장을 취해 좌파와 우파 양쪽에서 모두 반감을 샀다. 1852년 카를로 알베르토를 이어 왕위에 오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재상으로 등용되어 자타가 공인하는 이탈리아의 정치 지도자가 되었다. 이후 유럽강국과의 외교로 통일을 방해하는 오스트리아를 물리치고 통일의 꿈을 달성했다.
가족과 어린시절
카보우르가(家)는 16세기 이후 군인과 관리를 지내며 사보이 왕가에 봉사한 유서깊은 가문이었다.
제네바 출신으로 칼뱅주의자였던 그의 어머니는 당대의 모든 정치·종교·사회 운동에 개방되어 있던 도시 제네바의 영향을 이 가문에 들여왔다. 오랫동안 프랑스의 구체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카보우르가의 운명은 프랑스 혁명으로 위태롭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미켈레가 나폴레옹의 사교계에서 가문을 다시 저명한 위치로 끌어올렸다. 그의 대부모(代父母)는 자신의 이름을 그에게 준 카밀로 보르세제 대공과 그 아내이며 나폴레옹이 사랑하는 여동생인 파울리나(폴린) 보나파르트였다.
10세 때 그는 토리노의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둘째 아들이기 때문에 자기 형이 상속하기로 되어 있는 경제적·사회적 지위를 꿈꿀 수 없었던 그는 사보이와 피에몬테의 공(公) 카를로 알베르토의 후원을 받는 것이 자기가 출세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1826년 공병대 소위에 임관되었다.
사관학교에서 6년 동안 생활하면서 그는 정치사상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1821년 피에몬테의 입헌주의 혁명이 학교에까지 영향을 미쳐 일부 학생들은 일순간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정신에 경도되었으나 이것은 이내 사라졌다. 그는 가족들의 대화를 통해 복고된 부르봉 왕조 치하의 프랑스 내정, 그리스에서 벌어진 투르크인의 억압 통치에 대한 반란, 1825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자유주의적 데카브리스트 봉기 등 당시 큰 쟁점들이 토의되는 것을 들었다.
그는 본연의 열정적 기질로 자유주의자들인 벤저민 프랭클린, 산토레 디 산타로사 같은 인물들에게 호감을 가졌다. 산토레는 1821년의 피에몬테 혁명을 지휘한 유명한 비운의 지도자로 그의 먼 친척이기도 했다. 3년 선배인 사관생도 세베리노 카시오 남작과의 교제를 방해하기 위한 편법으로 아버지 미켈레 후작은 1824년 7월 카보우르가 카를로 알베르토의 개인 시동(侍童)으로 임명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 궁정 직책에 대해 열의가 없는 데다 의무적으로 착용하게 되어 있던 시동 제복을 노골적으로 멸시하는 태도를 보여 말썽을 일으켰으며, 어린 카보우르의 반골 기질에 대한 사람들의 우려를 증폭시켰다.
모욕감을 느낀 카를로 알베르토는 그를 궁정에서 쫓아냈고 국왕 카를로 펠리체를 설득해 그의 장교직위까지 박탈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그와 카를로 알베르토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생겨 약 20년 동안 카보우르는 공적인 정치생활에 참가하지 못했다.
정치이념의 발전
그는 공병대에서 군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토리노에 배치받았고 그후 요새를 짓는 곳이면 어디든 여러 전선으로 옮겨다녔다. 그러나 어디를 가든지 카보우르는 불만이었다. 1830년 그는 제노바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열렬한 급진민주주의자이며 공화주의자인 안나 주스티니아니 스키아피노를 만났다. 그녀의 살롱에는 당시 주세페 마치니가 지도하던 혁명적 비밀결사 카르보나리의 단원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카보우르의 열렬한 급진주의 이념은 안나 스키아피노에 대한 사랑과 제노바의 공병대에서 동료 장교로 일하게 된 세베리노 카시오와의 재개된 우정으로 더욱 고취되었다.
부르봉 왕조의 마지막 왕 샤를 10세를 타도하고 '시민왕' 루이 필리프를 세운 1830년 7월의 프랑스 혁명 또한 카보우르의 혁명적 열정을 강화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다혈질의 카보우르에게 미친 영향으로 그는 다시 당국의 의심을 샀고, 이번에는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개입으로 더욱 심각한 결과를 막을 수 있었고 이번에는 멀리 떨어진 산간 요새로 전출되는데 그쳤다.
그러나 더이상 군에 남아 있기 어렵다는 사실이 명백해지자 1831년 사임했다. 아버지가 일자리를 찾아준 덕택에 그는 토리노 남쪽 한 마을의 행정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동시에 그의 친척 아저씨들 소유의 방대한 토지의 관리인이 되었다. 이즈음 그는 사회 문제에 관심을 쏟아 가난과 죄수 교육에 대해 연구했다. 1834년 그는 피에몬테의 빈곤상에 관한 비망록을 썼는데, 이 글은 다음해 런던에서 〈빈민법의 운영과 실질적 효능에 관한 왕립 조사위원회의 보고서 Report from His Majesty's Commissioners for Inquiring into the Administration and Practical Operation of the Poor Laws〉에 발표되었다.
잉글랜드 빈민법의 역사에 관한 2번째 논문은 1835년 토리노에서 카보우르 자신에 의해 편집·발간되었다. 이무렵 그는 마침내 오랫동안 고대하던 파리·런던 방문을 처음으로 실행할 수 있었으며, 이로써 유럽에 관한 지식을 넓힐 수 있었다. 그는 영국과 프랑스의 의회활동에 열렬한 관심을 기울였고 대학 강의를 들었으며 공장·철도·항구·병원·학교·형무소 등을 방문했다. 두 서구 도시와 제네바에서 얻은 경험은 그가 이미 본능적으로 택한 길, 즉 항상 '중용'을 따른다는 신념을 더욱 확고히 해주었다.
모든 극단주의를 거부한 그는 무엇보다도 훌륭한 유럽인이 되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항상 애국심을 잃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그의 친구 중 한 사람이 그의 진가와 야망을 인정하고, 치사하고 비열한 카를로 알베르토가 통치하는 피에몬테를 떠나 프랑스에서 화려한 경력을 쌓아보라고 권유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했다.
1835년 여행에서 돌아온 뒤 일련의 사업을 벌여 성공을 거두고 상당한 돈을 모았다. 저술활동으로도 어느 정도 명성을 얻었다. 그의 저술은 이탈리아의 미래의 정치구조 문제를 직접 다루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기존의 이탈리아 상황과는 결코 조화될 수 없는 사회적·경제적 원칙을 표방했다.
정치가로서의 활동
1848년이 다가오자 그해의 거대한 혁명적 격동의 첫번째 바람이 느껴질 무렵, 카보우르는 무엇보다도 정치에 가장 큰 관심을 쏟았다.
이 점은 그의 저서를 연대순으로 살펴보면 잘 나타난다.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가 개혁조치를 실시하고 언론에 어느 정도 자유를 허락했을 때 그는 완전하게 정치가로 변신했다. 카보우르는 이 기회를 이용해 〈리소르지멘토 Il Risorgimento〉라는 신문을 창간하고 한층 더 과감한 개혁을 옹호하는 글을 실었다. 그는 카를로를 설득해 자유주의적 헌법을 승인하도록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리소르지멘토〉를 통해 눈앞에 닥친 오스트리아(당시에도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를 통치하고 있었음)와의 전쟁은 역사적 필연이라는 생각을 유포시켰다.
1848년 6월 의회의원으로 선출된 뒤에는 보수주의와 혁명주의 사이의 중도적 입장을 취해 좌파와 우파 양쪽에서 모두 반감을 샀다.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전쟁이 개시되었으나 사태는 피에몬테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이에 그는 의용군으로 자원했으나, 3대 의회의원으로 선출되자(1848. 7) 사실상 이미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는 전쟁을 계속하기를 원하는 좌파 급진주의자들에 맞서 오스트리아와의 평화조약을 승인받기 위해 싸웠다.
1850년 10월 그는 농업장관에 임명되었으며 곧이어 가장 활동적이며 영향력 있는 각료가 되었다. 프랑스·벨기에·영국 등과의 일련의 조약을 통해, 가능한 한 많은 자유무역권을 얻어내려고 애썼다. 또한 오스트리아에 대항하는 정치 동맹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강대국들과 경제적 이권망을 구축하려고 애썼다. 1850년 재무장관으로 임명되면서 그의 정치적 야망은 점점 더 커져갔다. 카보우르는 중도우파와 중도좌파의 연합을 만들어 피에몬테의 세속화 및 근대화 정책을 더 강력하게 추진해나갈 수 있는 새로운 다수당을 결성하려 했다.
콘누비오('결혼')라고 불린 이 연합은 의회에서 다첼리오의 기반을 완전히 파괴하여 사임시켰다. 다첼리오 내각을 효율적으로 재건하려다 실패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1849년 아버지 카를로 알베르토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름)는 단념하고 카보우르에게 조각을 부탁했다. 그때부터(1852. 11. 4) 죽을 때까지 카보우르는 자타가 공인하는 이탈리아의 정치 지도자가 되었다(아첼리오).
자신의 의사와는 반대로 카보우르가 끌려들어간 유럽의 드라마는 크림 전쟁(1853~56)과 더불어 1854년에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와 영국은 다르다넬스 해협을 흑해에서 지중해로 나가는 통로로 삼으려는 러시아의 구상에 위협을 느끼고 투르크 영토를 보존하기 위해 러시아에 대항해 동맹을 맺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즉각 프랑스와 영국 대표들에게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카보우르의 각료들은 크림 전쟁 참가 반대를 결의했기 때문에 카보우르는 동맹을 거절하면 국왕에 의해 해임당하고 동맹을 받아들이면 동료들에 의해 사퇴당할 처지에 놓였다.
늘 그렇듯 대담하고 자신감 있는 태도로 동맹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함으로써 그는 국왕에 의해 해임되는 것을 면하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영국-프랑스-사르데냐의 승리는 전쟁에 전환점을 가져왔고 이에 오스트리아는 중립적 입장을 버리고, 러시아에 최후통첩을 보내 러시아로 하여금 화평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약간의 어려움은 있었지만 카보우르는 유럽의 최강대국 대표들이 참석하는 파리 회의(1856)의 평화회담 석상에 소국인 피에몬테의 참가자격을 얻었다(파리조약). 공표되지는 않았으나 머지 않아 무력으로 이탈리아에 개입할 것이 틀림없는 나폴레옹 3세를 지지하는 한편,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에 대한 승리가 거의 확실해진 뒤에야 동맹에 가담한 오스트리아에 대한 전반적인 적대감을 이용하여, 카보우르는 이탈리아 문제가 유럽의 평화를 위협하는 요인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이탈리아 문제를 회의 안건으로 제기하는 데 성공했다.
파리에서 카보우르는 유럽에서 가장 유능한 외교관들의 수완을 접하고 평가하는 한편 강대국의 정책 뒤에 숨은 이유를 검토해볼 기회를 가졌다. 그는 유럽 국가들이 이탈리아의 대의명분을 사심 없이 도와주리라 기대하는 것은 환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을 이용할 줄 아는 무한한 능력과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쏟아 마침내 나폴레옹 3세를 자기 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가 제시한 비책은 프랑스가 이탈리아 원정을 벌여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프랑스 통치로 대체함으로써 유럽 대륙의 지도세력으로 재정립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1858년 7월 플롱비에르의 비밀회담에서 나폴레옹 3세와 카보우르는 그 다음해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유럽 전쟁을 일으킨다는 데 합의했다.
비밀협정을 의심한 유럽 강대국들, 특히 영국은 프랑스와 피에몬테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도록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다. 이 운동은 너무나 강력하게 진행되어 카보우르는 자기가 개인적·국가적 파국을 향해 이끌려가고 있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피에몬테가 즉각 무장해제하지 않으면 전쟁을 벌이겠다는 내용의 최후통첩을 보낸 오스트리아의 믿기 어려운 실수로 그는 구원을 받았다.
이에 따라 프랑스-피에몬테 동맹이 실현되었고 오스트리아의 우세한 군사력도 이번에는 프랑스군의 지원 때문에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프랑스-피에몬테군은 차례차례 승전을 거두었으며 결국 1859년 7월 빌라프란카에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휴전협정을 체결했다(오스트리아-프랑스 피에몬테전).
이 전쟁은 토스카나, 모데나와 파르마 공국, 볼로냐에서 카톨리카에 이르는 포 강과 아펜니노 산맥 사이의 교황령에 혁명운동의 활시위를 당겼고 공작령의 군주들과 교황 사절들이 축출당했다.
롬바르디아 획득은 알프스에서 아드리아 해까지 이탈리아 전역을 해방시키려던 카보우르의 꿈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것없는 소득이었다. 빌라프란카에서 카보우르는 왕에게 분노와 불만을 터뜨리고는 직책을 사임했다. 1860년 왕의 권유로 다시 권력에 복귀한 카보우르는 과거 피에몬테의 유서 깊은 군주가문에 속했던 중부 공국들을 합병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그는 사부아와 니스를 프랑스에 양도한 뒤에야 비로소 합병을 실현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통일
니스를 프랑스에 양도한 카보우르의 조치는 주세페 가리발디와 날카로운 충돌을 불러일으켰다.
니스는 대중적 영웅 주세페 가리발디의 출생지였기 때문이다. 알프스 쪽 방어벽을 넘겨줌으로써 생긴 손실을 보충하려면 교황을 희생시켜 중부 이탈리아와 양(兩)시칠리아 왕국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카보우르는 평온한 유럽에 너무 자주 파문을 일으키는 유럽 외교의 말썽꾼으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의 지지를 받기는 했지만 이제는 그런 일을 주도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카보우르가 마지못해 활동을 멈춤으로써 발생한 교착상태를 해결한 것은 가리발디였다. 그는 유명한 천인대(千人隊)를 이끌고 시칠리아로 가서 남부 이탈리아의 부르봉 지배권력을 파괴했다. 피에몬테의 카보우르의 과감한 외교정책은 '붉은 셔츠의 영웅'으로 불린 가리발디가 이룩한 군사적 업적에 의해 일시적으로 퇴색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이제 처음으로 온건한 군주제 이탈리아와 혁명적 공화제 이탈리아의 대립적 구도가 처음으로 가시화된 데 있었다. 분열의 위험은 가리발디의 관용과 양식, 그리고 카보우르의 외교적 책략 덕분에 피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에 대해서는 가리발디의 공격에 대항해 교황령의 마지막 영토를 수호하는 자로서, 그리고 유럽에 대해서는 과격한 혁명에 대항하여 법과 질서를 옹호하는 자로서 입장을 세운 카보우르는 '두 세계의 영웅'을 저지하고 2개의 이탈리아를 하나의 통일된 왕국으로 합치기 위해 마르셰와 움브리아를 가로질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휘하의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수도를 설정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카보우르는 로마만이 새로운 국가의 수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구상은 그의 일생을 통해 가장 까다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만들었다. 즉 일단 로마가 이탈리아의 수도가 되면 가톨릭의 우두머리인 교황의 지위를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였다. 카보우르는 진심으로 교회와 국가의 분리이념을 받아들여 교황청과의 협상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교회의 자유가 세속적 권세를 포기하고 로마를 이탈리아 국가에 양도하는 것을 의미하더라도 이것이야말로 세계 혁신의 지렛대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완전히 영적인 교회와 교황권이야말로 인류를 부활시킬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 제안에 대한 피우스 9세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카보우르는 10년 동안의 열정적이고 쉼 없는 활동을 통해 한 국가를 탄생시킨 뒤, '자유국가의 자유교회'라는 공식을 열렬히 추진하던 중 중병에 걸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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