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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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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켈트족 초창기 유물인 BC 700년경의 고분은 철기문화의 특징을 보여준다. 바이에른과 보헤미아의 켈트족은 발달된 무역로를 지배했고 켈트족 전체를 통합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스와 교역 이후 BC 5세기 캘트족의 라텐 문화는 BC 5~1세기 동유럽과 영국 제도까지 퍼져나갔다.
켈트족은 BC 390년경 로마를 약탈했으며,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를 침략했다. BC 230년 페르가몬에 진압되었고 BC 124년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남은 켈트족은 지정학적 위협으로 서안으로 밀려났다.
브리튼과 아일랜드의 켈트족은 고고학적·언어학적 증거로 연구되며 사회제도는 고전작가들이나 고대 아일랜드 문학에서 찾을 수 있다. 라텐 문화에는 켈트족의 미적 자질이 반영되어 있으며, 이들이 음악과 다양한 형식의 구전문학이 높이 평가된다.

켈트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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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에 속하는 여러 부족이 영국 제도와 스페인 북부, 동쪽으로는 트란실바니아, 흑해, 아나톨리아의 갈라티아에까지 진출했으며, 브리튼·갈리아·보이·갈라티아·켈트이베리아 등 일부 부족은 로마 제국에 흡수되었다.

아일랜드, 고지 스코틀랜드, 맨 섬, 웨일스, 브르타뉴에 지금도 이들이 쓰던 켈트어의 영향이 남아 있다(로마사).

할슈타트·오스트리아·잘츠부르크 근처에서 켈트족의 초창기 유물이 발굴되었다. 이 지역에서 발견된 BC 700년경의 족장 고분들은 그리스와의 교역을 통해 사치품과 도기 등을 받아들였던 철기문화의 특징을 보여준다(철기시대). 바이에른과 보헤미아의 부유한 켈트족이 론·센·라인·도나우 강을 따라 발달된 무역로를 지배했으며, 다른 켈트족에 우선권을 갖고 전체를 통합하는 역할을 했다.

서쪽으로 이동하던 할슈타트의 전사들이 다른 켈트족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강대한 힘의 원천이 되었던 철기를 전해주었다(할슈타트 문화).

그리스와 교역을 시작하고 난 뒤의 켈트 문화에 대해서는 이전의 문화에 비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 BC 5세기 중엽에 추상적·기하학적인 도안과, 양식화된 새와 짐승 모양이 특징인 라텐 문화(La Tène culture)가 라인 강 중류의 켈트족 사이에서 나타났다.

당시 이곳에서는 그리스인보다는 이탈리아 중부의 에트루리아인과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다. 라텐 문화는 BC 5~1세기에 켈트족의 이동과 더불어 동유럽과 영국 제도까지 퍼져나갔다. 일부 켈트족은 이미 오래전에 이탈리아 북부로 이동했지만, 후대 라틴 역사가들의 기록에 나오는 인수브레스족·보이족·세노네스족·링고네스족 등이 이탈리아를 대대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한 시기는 BC 400년경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켈트족은 BC 390년경 로마를 약탈했으며, 이탈리아 반도 전역과 시칠리아까지 침략했다.

알프스 산맥 남쪽의 갈리아키살피나에 정착한 호전적인 켈트족의 일군은 BC 225년 텔라몬의 전투에서 패배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로마를 위협했다. BC 335년 켈트족은 발칸 지방으로 이동했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드리아 해 주변에 사는 켈트족 사절단의 방문을 허용했다.

BC 279년 그리스의 델피를 침략했으나 아나톨리아인에게 패했다. 이듬해 3개 켈트족이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아나톨리아에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BC 276년에는 프리지아의 일부지역에 정착했으나, BC 230년 페르가몬의 아탈루스 1세에게 진압될 때까지 계속 약탈행위를 일삼았다. 이탈리아에서는 로마가 BC 192년 갈리아키살피나를 정복한 뒤 BC 124년에는 알프스 산맥 서쪽의 켈트족 영토(지금의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를 정복하고 속주(屬州)를 세웠다.

마지막까지 독립을 지킨 켈트족은 라인 강과 알프스 산맥에서 서쪽의 대서양 연안에 이르는 갈리아트란스알피나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은 서진(西進)해 라인 강을 건너온 게르만족과 침입할 태세를 갖추고 있던 남쪽의 로마군 등 양쪽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다. 가장 먼저 보이족의 땅인 보헤미아와 알프스 동부의 켈트족 왕국 노리쿰이 유틀란트(덴마크)에서 기원한 킴브리족이라는 게르만족에게 약탈당했다. 노리쿰을 구하기 위해 로마군이 파견되었으나 BC 113년 게르만족에게 패했으며, 그뒤 튜튼족과 연합한 킴브리족이 갈리아인과 로마의 반격을 무찌르며 갈리아트란스알피나를 약탈했다.

이들 게르만족은 이탈리아를 침략하려 했으나, BC 102, 101년 로마군에게 크게 패했다. 그동안 라인 강 동안에서 살던 켈트족이 서안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 분명하다. 게르만족의 위협과 켈트족의 이동을 계기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BC 58년 갈리아 지역 전체를 합병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했다.

브리튼과 아일랜드의 켈트족 부락은 주로 고고학적·언어학적 증거를 통해 연구되고 있다.

이 지역의 주민과 연관시킬 수 있는 직접적인 사료는 벨가이족이 브리튼으로 이주했다는 카이사르의 기록뿐이지만 로마인들은 이들이 갈리아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켈트족의 사회제도에 대한 정보는 여러 고전작가들이나 고대 아일랜드 문학에서 얻을 수 있다. 이들의 사회체제는 왕·귀족·자유농민 등 세 계층으로 이루어졌다. 주술적·종교적 임무를 띠고 있던 드루이드(켈트족의 성직자)는 전사계급 출신이었으나, 지위는 그보다 더 높았다.

따라서 카이사르가 켈트족을 드루이드(사제와 학자)·에쿠에스(전사)·플레브스(평민)로 구분한 것은 상당히 정확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인도유럽어를 쓰는 다른 종족들처럼 이들의 사회도 족장제였다.

기본적인 경제는 혼합농경으로서 혼란기가 아닐 때는 개별 농장들이 일반적이었다. 토양과 기후가 아주 다양하여 일부지역에서는 곡물 농사보다 목축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언덕 위의 성채가 피난처 구실을 했으나 싸움은 대체로 피난이나 매복과는 무관한 직접충돌의 양상을 띠었으며, 전면전과 함께 개별적인 전투도 자주 있었다. 라텐 문화를 통해 켈트족의 미적 자질을 엿볼 수 있으며, 이들이 음악과 다양한 형식의 구전문학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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