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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77. 12. 23(구력 12. 12),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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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25. 12. 1(구력 11. 19), 타간로크 |
국적 | 러시아 |
요약
러시아의 황제(1801~25 재위).
(영). Alexander Ⅰ. 정식 이름은 Aleksandr Pavlovich.
나폴레옹 전쟁 때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와 싸우기도 하고 호의를 보이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프랑스 황제를 무찌른 동맹 형성에 이바지했다.(1813~15) 빈 회의(1814~15)에 참여해 신성동맹(1815)을 맺기 위해 애썼으며 그후에 열린 여러 회의에도 참석했다.
초기생애
어린시절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는 파벨 페트로비치 대공(나중에 파벨 1세가 됨)과 뷔르템베르크몽벨리아르의 공녀인 마리아 표도로브나 대공비 사이에 태어난 맏이였다.
할머니는 당대의 통치자 예카테리나 2세 여제였는데, 맏손자에게 제위를 이을 준비를 시키기 위해 부모한테서 그를 데려다가 자신이 직접 길렀다. 예카테리나는 아들 파벨의 불안정한 성격에 불쾌감을 느꼈기 때문에, 아들한테는 절대로 물려주지 않기로 결심했다. 프랑스 계몽철학자들의 친구이자 제자인 예카테리나는 백과전서파인 드니 디드로에게 알렉산드르의 개인 교수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디드로가 거절하자 예카테리나는 스위스 시민인 프레데리크 세자르 라아르프를 손자의 가정교사로 선택했다. 공화주의자이자 훌륭한 교육자인 그는 제자에게 깊은 영향을 주어 유연하고 개방적인 정신을 심어주었다. 청소년 시절에 알렉산드르는 궁전에서 멀리 떨어진 상트페테르부르크 교외에 있는 가트치나로 아버지를 찾아가도 좋다고 허락을 받았다.
파벨은 이곳에서 우스꽝스러운 작은 왕국을 건설하고 군사 훈련과 열병식에 열중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르는 이곳에서 드세고 엄격한 장교 알렉세이 아락체예프의 지도로 군사 훈련을 받았는데,아락체예프는 알렉산드르를 충실히 섬겼고 알렉산드르도 평생 동안 그를 아꼈다. 그가 16세 때인 1793년에 예카테리나는 그를 14세인 바덴두를라흐의 루이제 공녀와 혼인시켰고 이로써 그의 교육은 끝났다.
그 이른 결혼은 하루속히 로마노프 왕조의 대를 이을 자손을 얻기 위한 것이었으나 처음부터 불행했다. 엘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 상냥하고 매력적인 여자는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았지만 유독 남편의 사랑만은 얻지 못했다. 예카테리나는 1796년 11월 17일(구력 11. 6)에 갑자기 죽었다. 여제는 아들의 상속권을 박탈하고 손자를 제위 계승자로 지명한 선언문서를 이미 써놓았다.
알렉산드르는 이것을 알고 있었지만 감히 선언서를 공개하지 못했고 결국 아버지 파벨이 황제가 되었다.
즉위
파벨 1세의 통치 기간은 러시아의 암흑기였다.
난폭하고 괴상한 군주의 행동 때문에 일부 귀족과 군인들은 황제 암살 음모를 꾸몄고, 결국 1801년 3월 23일(구력 3. 11) 밤 파벨은 암살당했다. 알렉산드르는 이튿날 황제가 되었다. 음모자들은 그에게 미리 털어놓으면서, 황제를 죽이지 않고 퇴위만 요구하겠다고 약속했었다. 알렉산드르는 그들의 말을 믿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고 믿고 싶어했다. 파벨이 러시아를 어둠 속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러시아 백성에게 알렉산드르는 찬란한 새벽과도 같았다.
그는 잘생기고 강하며, 유쾌하고 인정이 있으며 열의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자신의 통치가 행복하기를 원했으며 러시아에 꼭 필요한 대대적인 개혁을 꿈꾸었다. 그는 귀족이면서도 자유주의 사상을 갖고 있는 4명의 친구, 아담 차르토리스키 공(公), 파벨 스트로가노프 백작, 빅토르 코추베이 백작, 니콜라이 노보실체프와 함께 사적인 비밀위원회(Neglasny Komitet)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가 공언한 목표는 '국민 복지의 원천인 좋은 법률'의 틀을 만드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르와 그의 측근은 선대의 통치 기간에 저질러진 많은 부정을 시정하고 많은 행정 개선을 이룩했다. 그들의 주요업적은 방대한 대중교육 계획을 수립한 것이었다. 이 계획안에는 다양한 유형의 학교를 많이 세우고 교사양성기관을 마련하며 대학을 3개 신설한다는 것 등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라아르프한테서 전수받은 인도주의 사상과 백성에게 행복한 삶을 안겨주겠다는 자신의 소망에도 불구하고, 가장 긴급한 과제인 농노제 폐지를 시행하는 데 필요한 정력은 갖고 있지 않았다. 농노제는 황제 자신의 말대로 러시아를 비참한 후진국으로 머물러 있게 하는 '타락'이었다. 그러나 인구의 3/4을 이루는 농노를 해방하면 그들의 주인인 귀족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킬 것이었다. 귀족들은 부와 안락함의 토대인 노예들을 잃고 싶어하지 않았다.
농노제는 러시아인들을 계속 짓누르는 짐이었고 근대화의 장애물이었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유럽의 다른 국가들보다 적어도 1세기는 뒤떨어진 상태였다. 알렉산드르는 이런 상태를 쇄신하고 싶다는 진지한 욕망 때문에 헌법을 제정해 '독재 정치를 제한'할 것을 생각했지만 변화를 거부하는 귀족들에게 갑작스러운 변화를 강요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깨닫고 다시 물러섰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꿈을 현실로 만들지 못하는 공상가였다. 불안정한 성격 때문에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그 생각에 도취하면서도 계획을 실행하는 것은 주저하곤 했다.
결국 알렉산드르와 그의 젊은 동료들이 받은 '서구'의 이론교육은 러시아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지는 못했다.
중기생애
초기의 대외정책
알렉산드르의 놀라운 변덕은 그가 대외정책에 몰두하기 위해 내정개혁을 포기한 데서 나타났다.
그는 통치 기간의 대부분을 외교에 전념했다. 유럽 대륙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에 민감한 그는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유럽인'이었다. 그는 '유럽의 중재자'라고 불린 할머니 예카테리나처럼 조정자가 될 사명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알렉산드르는 집권하자마자 파벨 1세가 깨뜨린 영국과의 동맹을 다시 맺었다. 한편 보나파르트의 정복욕을 억제해 보나파르트를 '온건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프랑스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일종의 기사도 정신 때문에 프로이센 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루이제 왕비한테도 애착을 느꼈으며, 프로이센과 우호조약을 체결했다. 나중에는 오스트리아와도 좋은 관계를 맺었다. 이상주의에 사로잡힌 그는 이런 동맹이 결국 유럽 연방으로 이어질 것으로 확신했다.
나폴레옹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남의 나라 영토를 침범했고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야망을 드러냈으며, 1804년에는 프랑스 황제가 되었다. 이에 알렉산드르는 나폴레옹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색인:나폴레옹 전쟁). 총사령관 역할을 떠맡은 그는 오스트리아 장군들에게 의지했고, 명민한 전략가인 러시아 장군 쿠투조프 공의 조언을 무시했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동맹군은 1805년 12월 2일 모라비아의 아우스터리츠에서 패배했고,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는 자신의 영토가 적군에게 점령당했기 때문에 평화조약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 영토는 국경 뒤에 무사히 남아 있었으며 나폴레옹은 러시아 황제를 용서하고 싶어했다. 그는 알렉산드르의 우정을 얻고, 세계를 알렉산드르와 나누어 갖고 싶어했다. 그러나 복수를 원하는 알렉산드르에게는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1806년 나폴레옹은 예나와 아우어슈테트에서 프로이센을 무찔렀다. 러시아 황제는 어머니와 조언자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우방을 도우러 달려갔다. 전투는 프로이센 동부에서 벌어졌다. 베니히센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군은 아일라우에서 부분적인 승리를 거둔 뒤, 1807년 6월 14일 프리틀란트에서 참패했다.
이어서 틸지트에서 조금 떨어진 네만 강 한복판의 뗏목 위에서 두 황제의 회담이 열렸다(6. 25). 그러나 뒤따른 사건들을 보면, 틸지트 회담에서 러시아 황제는 프랑스 황제를 속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시간을 벌기 위해 자신의 매력을 최대한 이용하며 나폴레옹을 찬미하는 친구 역할을 연기했다. 그는 승리자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여 영국과 관계를 끊고, 나폴레옹이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수립한 대륙(봉쇄)체제에 충실하고, 1795년 폴란드 분할 때 프로이센이 얻은 폴란드 영토에 바르샤바 대공국을 수립하는 것을 승인하겠다고 약속했다.
나폴레옹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알렉산드르에게 스웨덴과 투르크로 진출할 자유를 주었다.
틸지트에서 1812년의 침략까지
대부분의 러시아인은 틸지트 동맹에 분노와 굴욕을 느꼈다.
그들은 영국과 교역을 단절하면 심각한 경제 상황이 닥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지만, 알렉산드르는 복안을 숨기고 때를 기다렸다. 그는 가트치나에서 온 교관이며 그에게 없어서는 안 될 동지가 된 유능한 아락체예프의 도움을 얻어 러시아 군대를 개편하고 강화했다. 그러는 동안 군주의 인기는 뚝 떨어졌다. 모든 계층의 백성들이 러시아인의 피를 헛되이 희생하고 나라를 파멸로 몰고간다고 그를 비난했다. 알렉산드르는 다시 한번 내정 개혁에 관심을 돌렸다. 그는 내정 개혁의 책임을 저명한 법률가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스페란스키에게 맡겼다.
스페란스키는 평민 출신이었으나 재능이 뛰어나 급속히 출세했다. 그는 러시아의 법률 체계를 완전히 개편할 방대한 계획을 세웠으며, 러시아 법률을 완벽하게 집대성한 법전과 체계적으로 배열한 법률 요람을 작성했다. 그러나 이 방대한 계획 가운데 극히 일부분만 실시되었는데 그 이유는 알렉산드르가 계획의 시행을 또다시 취소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알렉산드르가 대외적인 사건에 정신을 빼앗긴 나머지 제국을 새로운 토대 위에 재건하는 일에 관심을 쏟지 못하게 된 탓이기도 했다.
러시아인들은 프랑스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지만 황제는 1808년 작센의 에르푸르트에서 다시 나폴레옹을 만났다.
여기서 그는 틸지트에서 동맹자였던 나폴레옹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1809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자 알렉산드르는 나폴레옹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진격 시늉만 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가 중립국 선박으로 위장해 영국과 교역했으며 알렉산드르의 누이동생 안나 파블로브나를 아내로 달라고 한 데 대해 이를 거절했다고 하여 알렉산드르를 비난했다.
한편 알렉산드르는 나폴레옹한테서 폴란드 독립 왕국을 세우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려고 애썼지만 실패했다. 나폴레옹이 알렉산드르 황제의 처남의 봉토인 올덴부르크 대공국을 포함해 발트 해 연안의 독일 영토를 병합하자, 알렉산드르는 이것을 개인적인 모욕으로 생각하고 나폴레옹에게 격렬히 항의했다. 이 모든 것은 양쪽에게 전쟁 준비의 구실로 작용했다. 러시아에서는 나폴레옹에 대한 여론이 급격히 달라졌다.
궁정에서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이 높아지자 알렉산드르는 나폴레옹 및 나폴레옹 법전의 숭배자인 법률고문 스페란스키를 추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는 다시 견해를 바꾸어 총애하는 누이동생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가 이끄는 애국 집단의 반동 사상을 받아들였다. 당시 러시아가 처해 있던 상황에서는 전통적인 제도를 지키는 것이 가장 좋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후기생애
나폴레옹의 패배
나폴레옹과 60만 명의 대군은 1812년 6월 24일 러시아를 침공했다.
러시아인들은 그후에 벌어진 전투를 당연히 애국 전쟁이라고 불렀다. 이 전쟁에서 러시아 전국민은 완강한 저항과 뛰어난 끈기를 보여주었다. 전쟁은 알렉산드르를 변화시켜, 그를 정력과 결단력으로 가득 채웠다. 프랑스군은 러시아군이 후퇴하는 만큼 빠른 속도로 진격해 러시아군을 작전 기지에서 몰아냈다. 나폴레옹은 일단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러시아 황제가 항복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보로디노에서 피비린내나는 전투를 치른 뒤, 나폴레옹은 주민이 거의 떠나버린 모스크바에 입성했고 모스크바는 그 직후에 화재로 거의 폐허가 되었다.
정복자는 도저히 머물 수 없을 만큼 폐허가 된 도시에서 야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는 평화조약을 간청하지 않았다. 한편 러시아 황제는 여론의 압력에 굴복해 그가 싫어하는 쿠투조프를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 늙은 군인은 뛰어난 전략과 영웅적인 유격대원들의 도움으로 적군을 추격, 러시아에서 몰아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퇴각한 것은 스페인에서 맛본 좌절과 함께 그의 몰락을 재촉했다.
알렉산드르는 "나폴레옹이냐, 아니면 나냐! 지금부터 우리는 함께 통치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는 모스크바 화재가 "내 영혼을 밝게 비추어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유럽을 향해 무기를 들고 일어나 나폴레옹의 정복으로 노예가 된 사람들을 구원하라고 호소했다. 그의 열정과 끈기, 그리고 승리를 향한 굳은 의지는 프로이센 왕과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자극을 주었고, 용기를 얻은 동맹군은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제(諸) 국민의 전투'로 승리를 결정지을 수도 있었지만 알렉산드르는 파리에 도착할 때까지 평화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1814년 3월에 의기양양하게 파리에 입성했다. 나폴레옹이 퇴위하자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부르봉 가문의 왕정복고를 마지못해 받아들였으며 새로운 왕 루이 18세의 정통성을 인정해 주었다.
알렉산드르는 프랑스가 패전국으로서 이행해야 할 조건을 완화하고, 자신은 프랑스 국민과 싸운 것이 아니라 나폴레옹과 싸웠다고 주장하면서 프랑스에 대해 너그러움을 보였다. 알렉산드르는 원했던 대로 가장 강력한 군주이자 유럽 운명의 조정자가 되었다. 그는 1814년 가을 빈에서 역사상 최대의 국제회의가 소집될 수 있도록 했다. 빈 회의는 호화로운 축제인 동시에 외교적 음모와 신랄한 논쟁의 무대였다.
알렉산드르 황제가 구원한 동맹국들은 그의 세력을 두려워해 러시아의 폴란드 합병을 반대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가 자신의 공로에 대한 대가로 요구한 것은 폴란드 합병뿐이었으므로 그는 이를 이루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나폴레옹이 유형지 엘바 섬에서 돌아와 황제의 자리를 되찾자 다시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나폴레옹이 1815년 6월 18일 워털루에서 동맹군에 최후의 패배를 당함으로써 끝났다. 승리한 군주들은 다시 파리에 모여 평화조약의 뼈대를 만들었고 이번에도 알렉산드르가 프랑스를 위해 개입했다.
마지막 10년
이 기간은 알렉산드르 황제에게는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나라가 외세의 침입을 당한 뒤 그는 신앙심을 갖게 되어 날마다 성서를 읽고 자주 기도했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경건파 교도이며 몽상가인 바르바라 율리안 크뤼데너를 자주 방문하다가 결국 신비주의자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을 하느님이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예언자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개인적인 영향력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지만 알렉산드르는 새로 접한 복음주의적 열정을 끝까지 유지했고, 퀘이커교도와 모라비아교도들에게 강한 영향을 받은 비교조적인 '보편 종교'를 믿는다고 고백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르는 폴란드를 얻어 거기에 왕국을 세우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며, 헌법을 부여하고, 자신은 '자유로운 제도'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으며 "나에게 의존하는 모든 나라에 자유로운 제도를 확대하고 싶다"고 선언했다.
이 말은 러시아에 커다란 희망을 불러일으켰지만 오랜만에 조국으로 돌아온 황제는 더이상 개혁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 성서협회와 군인 거주지 건설에만 관심을 쏟아 군인과 가족들이 좀더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땅을 주어 정착시키려고 애썼다. 착상부터 잘못인 이 계획은 결국 군인과 농민들에게 고통을 주었을 뿐이다.
제2차 파리 조약을 맺은 뒤 알렉산드르는 신앙심에 이끌려 신성동맹을 결성했는데, 유럽 군주들과 유럽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에 바탕을 둔 평화를 가져다 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 동맹을 유럽 연방의 시초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정치적 토대가 아니라 종교적 토대를 가진 연방이었을 것이다. 알렉산드르 황제의 이상주의적 공상은 슬픈 종말을 맞이했다. 신성동맹은 국민과 맞서는 군주들의 동맹이 되었기 때문이다.
파리 회의 이후에도 엑스라샤펠과 트로파우, 라이바흐(류블랴나) 및 베로나에서 잇따라 추가 모임을 가진 동맹국들은 독재정치의 옹호자이며 무력으로 유지되는 질서의 수호자임을 드러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독재정권을 반대하는 일련의 봉기가 일어나자 '신성동맹'은 유혈 진압으로 대응했다. 알렉산드르 자신은 러시아 세묘노프스키 연대의 반란에 심한 충격을 받았고, 마침내 혁명적 급진주의의 존재를 찾아냈다고 생각했다.
이것으로 그의 자유주의적 꿈은 막을 내렸다.
이때부터 그는 모든 반란을 신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같은 종교를 믿는 그리스인들이 투르크의 폭정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을 때, 알렉산드르는 그들도 다른 반역자들과 똑같다고 주장하면서 지원을 거부해 국내에 충격을 주었다. 알렉산드르에게서 유럽 문제의 주도권을 넘겨받은 오스트리아 총리 메테르니히 공은 그의 정신 상태를 파렴치하게 이용했다. 알렉산드르는 러시아로 돌아온 뒤, 모든 일을 아락체예프에게 맡겼다. 알렉산드르에게 이 시기는 피곤함과 낙담, 그리고 우울한 생각으로 가득찬 시기였다.
러시아에는 반동과 반(反)계몽의 시기였고, 진짜 반란 및 가공의 반란과 맞서 싸우는 시기였다. 알렉산드르는 곳곳에서 '사탄의 지배'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반대편에서는 젊은이들의 비밀결사가 퍼져갔다. 이 비밀결사는 대부분 나라를 재건하고 자유주의를 수립하고자 애쓰는 젊은 군인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은 음모를 꾸몄다. 알렉산드르는 여기에 대한 경고를 받았지만 단호하게 행동하기를 거부했다. 그의 제관은 그를 무겁게 짓눌렀고, 그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제위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소망을 감추지 않았다.
황후가 병들자 알렉산드르는 황후를 아조프 해 연안의 타간로크로 데려갔다.
바람 많고 쓸쓸한 이 마을은 기묘한 온천장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서먹서먹하게 지냈던 황제 내외는 이곳에서 조용한 행복을 즐겼다. 그 직후에 알렉산드르는 크림 반도를 시찰하다가 폐렴 또는 말라리아로 보이는 병에 걸려 타간로크로 돌아오던 길에 죽었다. 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의 신비주의, 측근들의 허둥댐과 머뭇거림은 모두 그가 시베리아의 은둔지로 '떠났다'는 전설을 만들어내는 원인이 되었다. 황제가 죽은 뒤 측근들이 관을 열기를 거부함으로써 이러한 의구심은 더욱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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