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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73. 12. 9, 프랑스 콜랭쿠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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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27. 2. 19, 파리 |
국적 | 프랑스 |
요약 프랑스의 장군·외교관.
나폴레옹 치하에서 외무장관직까지 올랐다. 1804년부터 황제의 사복시 장관으로 나폴레옹이 여러 차례 큰 전투를 벌이는 동안 그의 곁에 있었다. 그의 〈회고록 Mémoires〉은 1812~14년의 기간에 관한 중요한 사료가 된다.
1795년 프랑스 서부의 한 기병대에 들어갔고 1799년 정예 기병연대의 연대장으로 임명되어 이 연대를 이끌고 1800년 호엔린덴 전투에서 싸웠다. 아버지의 친구 탈레랑에게 특채되어 러시아에 갔다가(1801~02), 알렉산드르 1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러시아에서 돌아온 뒤 나폴레옹의 부관으로 채용되었다. 1804년 3월에 그는 라인 강 건너 편에서 활동하는 왕당파를 처벌할 임무를 띠고 바덴에 파견되었다. 그 결과 앙갱 공작이 체포당해 결국 처형되었는데, 그것은 콜랭쿠르가 명령을 전달하기는 했지만 전적으로 용인한 일은 아니었다.
1807년 11월부터 1811년 2월까지 콜랭쿠르는 러시아 주재 대사로 있으면서 나폴레옹의 독단적인 정책에 반대했으며 평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나폴레옹은 1808년 그에게 비상스(비첸차) 공작작위를 수여했다. 그러나 1811년 나폴레옹은 그를 소환해 '러시아인'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러시아 침공(1812)이 시작되자 콜랭쿠르는 될 수 있는 한 나폴레옹과 멀리 떨어져 있기 위해 스페인 파견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파리로 돌아올 때 그를 수행한 몇 안 되는 측근의 한 사람이었다.
콜랭쿠르는 슐레지엔에서 휴전협상을 하고(1813. 6) 프라하 회담에 참석하러 갔으나 회의는 유산되었다. 라이프치히 전투가 끝난 후 그는 '평화의 사람'으로 외무장관이 되었지만 나폴레옹은 평화를 이룩하려 하지 않았으며, 1814년 3월 중순에 이르러 샤티용 회담은 결렬되었다. 콜랭쿠르는 마침내 알렉산드르 1세를 찾아가 1814년 4월 10일, 나폴레옹을 엘바로 유배시키는 조약에 서명했으며 퐁텐블로에서 나폴레옹과 침울하게 최후의 1주일을 같이 보냈다.
1815년에 그는 나폴레옹의 외무장관이라는 가망 없는 직책을 다시 맡았다. 워털루 전투가 끝난 후 그는 알렉산드르의 개입 덕택에 부르봉 왕가에 의해 추방되는 것을 모면했다. 그때부터 은퇴생활을 하면서 계속 앙갱 사건의 공모자라는 누명을 벗기 위해 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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