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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79. 3. 6, 스위스 파예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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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69. 3. 24, 파시 |
국적 | 프랑스/러시아 |
요약
조미니는 전쟁의 원리를 규정하려는 체계적인 노력으로 근대 군사이론의 창시자로 꼽힌다.
프리드리히 2세의 전술을 분석한 논문 <대규모 전술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뒤 나폴레옹에게 발탁되어 프랑스군의 참모장교로 활동했다. 울름 전투(1805)와 예나 전투 및 아일라우 전투(1806)에 참가했다. 1813년에 프랑스군을 떠나 러시아 황제인 알렉산드르 1세의 부관으로 러시아를 위해 싸웠다. 1826년에는 대장 계급으로 니콜라이 1세의 부관이 되었고, 1830년 러시아 육군사관학교를 창설했다. 가장 잘 알려진 저서 <전술의 요점>을 써서 전쟁원리의 체계를 세웠고, 군사평가론가로서 전략과 전술 및 병참의 구분을 처음으로 명확히 했다.
전쟁의 원리를 규정하려는 체계적인 노력으로 근대 군사사상의 창시자가 되었다.
1798년에 프랑스군 참모로 자원하여 군대생활을 시작했다. 아미앵 화약(1800)이 맺어진 뒤 다시 사업계로 돌아온 그는 〈대규모 전술에 관한 논문 Traité de grande tactique〉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 글은 나중에 〈대규모 군사작전에 관한 논문 Traité des grandes opérations militaires〉(5권, 1805)으로 출판되었다. 그는 1804년에 다시 자원하여 군대에 들어갔고, 그의 저서를 읽은 나폴레옹은 1805년에 그를 대령 계급의 참모장교로 임명했다.
조미니는 네 원수 휘하에 들어가 울름 전투(1805)와 예나 전투 및 아일라우 전투(1806)에 참가했으며, 1808년에는 네 원수와 함께 스페인 원정을 떠났다. 1810년에 그는 당시만 해도 프랑스의 동맹국이었던 러시아와 복무계약을 교섭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나폴레옹은 그를 장성급인 여단장으로 임명했다. 1813년에 그는 프랑스군에서 가장 중요한 군단을 지휘하고 있는 네 원수의 참모장이 되었다. 네 원수는 조미니를 사단장으로 추천했지만 거부당했고, 그에게 편견을 갖고 있던 상관은 그가 군사보고서를 늦게 제출했다는 이유로 그를 체포했다. 이같은 처사에 불만을 품게 된 조미니는 1813년 8월에 프랑스군을 떠나 러시아 황제인 알렉산드르 1세의 부관으로서 중장 계급장을 달고, 프랑스의 적이 된 러시아를 위해 싸웠다.
1826년에 조미니는 대장 계급으로 니콜라이 1세의 부관이 되었다. 그는 1828년에 터키와 싸웠고, 1830년에는 러시아 육군사관학교를 창설했다. 그는 군에서 제대한 뒤, 1837년 러시아 황제의 아들 알렉산드르의 군사 가정교사로 임명되었으며, 가장 위대한 저서인 〈전술의 요점 Précis de l'art de la guerre〉(1838)을 썼다.
1854년 그는 니콜라이 3세의 군사고문으로서 이탈리아 원정에 관해 조언했다. 조미니는 군사평론가로서 전략과 전술 및 병참의 구분을 처음으로 명확히 했다. 주로 전략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작전지역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정확한 작전을 채택하는 것이야말로 성공적인 군사작전의 요체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다른 저서로는 〈전략원리 Principles de la stratégie〉(3권, 1818)·〈1792~1801년의 혁명전쟁에 대한 군사적 비판사 Histoire critique et militaire des campagnes de la Révolution de, 1792 à 1801〉(5권)·〈나폴레옹의 생애 Vie politique et militaire de Napoléon〉(4권, 1827)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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