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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46. 2. 4, 폴란드 메레초프슈치지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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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17. 10. 15, 스위스 졸로투른 |
국적 | 폴란드 |
요약
폴란드의 군장교·정치가.
(영). Thaddeus Kosciusko.
개요
미국 독립전쟁에서 이룬 업적과 조국 폴란드의 민족 봉기를 이끈 일로 명성을 얻었다.
초기생애
귀족 혈통을 지닌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루비에슈프에 있는 피아리스트 칼리지와 바르샤바의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받았고 나중에 이 사관학교의 교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탁월한 재능으로 곧 국왕 스타니수아프 2세 아우구스트스 포니아토프스키의 주목을 받아 군사 및 민간 건축과 회화를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보내졌다. 1774년 고국으로 돌아와 유제프 소스노프스키 장군의 딸들에게 그림과 수학을 가르치다가 그중 한 사람인 루드비카와 사랑에 빠져 함께 도망가려다 실패했다.
미국독립전쟁
애인의 아버지가 크게 화를 내자 이를 피해 프랑스로 달아난 그는 1776년 미국으로 건너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싸우던 식민지 군대에 들어갔다.
그해 8월 필라델피아에 주둔한 펜실베이니아 방위위원회로 배속받아 영국군에 맞서 대륙회의 청사 방어 요새를 설계하는 데 참여했으며 이 작업을 위해 공병대 대령으로 임명되었다. 1777년 봄에는 북부 뉴욕에 있는 호레이쇼 게이츠 장군의 타이칸더로가 요새로 배치되었다. 7월초 그는 게이츠 장군의 군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허드슨 강가의 모든 길을 요새화하면서 폐쇄하여 결국 10월 7일의 새러토가 전투에서 존 버고인 장군 휘하의 영국군을 항복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그뒤 2년간 뉴욕의 웨스트포인트를 요새화했으며 1780년 3월 그곳의 공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여름 노스캐롤라이나의 너새니얼 그린 장군 밑에서 복무하던 그는 야드컨 강과 댄 강의 도하작전을 지휘해 2번이나 적의 진격을 막음으로써 미국군으로 하여금 위기를 벗어나게 해주었다. 1781년 봄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96전투를 수행했고 이후 찰스턴의 오랜 봉쇄작전을 이끌었다. 독립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 시민권을 얻었고 미군 준장이 되었다.
폴란드에서의 전투
그는 1784년 폴란드로 돌아왔다.
차르토리스키 가문과 친교가 있고 왕을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므로 폴란드군 내에서는 아무런 직위도 얻을 수 없었다. 그는 5년 동안 시골의 작은 영지에서 가난과 빚더미 속에서 살았으며, 더욱이 남다르게 자기 소유 농노들의 부역 할당량의 일부를 철폐했기 때문에 무척 궁핍했다. 그러다가 폴란드에서 자유주의적 개혁이 시작됨에 따라 1789년 군으로 복귀했다. 지금은 루보미르스키 공비가 된 옛 애인 루드비카의 보호와 지방 귀족들의 지원을 받으며 10월 12일 그는 소장으로 진급했다. 당시 나이 44세였던 이 장군은 귀족출신의 18세 소녀와 사랑에 빠졌으나 이번에도 애인의 아버지에게서 결혼 허락을 얻어내지 못했다.
1792년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폴란드의 국내 개혁을 분쇄하기 위해 예카테리나 여제의 러시아군이 폴란드를 침입했다.
이 전쟁에서 코시치우슈코는 치열했던 두비엔카 전투(7. 18)에서 사단장으로 활약해 명성을 떨쳤다. 이에 그는 국왕 스타니수아프 2세 아우구스트스 포니아토프스키에 의해 중장으로 진급했고 파리의 새 혁명정부로부터 프랑스 명예시민 자격을 받았다. 그러나 패배를 두려워한 국왕이 자유주의 명분을 포기하자 그는 새로 벌어질 싸움에 대비했다. 러시아가 점령한 폴란드에서 반동적인 당이 권력을 잡아 자유주의 정치가들은 작센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코시치우슈코는 왕의 희망과는 반대로 임무를 버리고 망명가들과 합류했다. 1793년 1월 그는 작센에서 파리로 파견되어 폴란드에 대한 지원을 호소했다. 처음에는 지롱드당을 다음에는 자코뱅당을 상대로 하여 지원의 대가로 폴란드 국내의 급진적 개혁을 단행하고 당시 혁명 프랑스와 전쟁중인 프로이센 및 오스트리아를 군사적으로 견제 하겠다고 약속했다(폴란드 분할). 8월 작센에서 돌아온 그는 폴란드 내의 움직임을 긍정적으로 보고 폴란드 봉기를 시작하자는 새로운 요구에 직면했다.
그는 국민군을 지휘하기로 동의하고 비밀리에 크라쿠프 근처로 갔으나 준비가 미흡하다고 판단, 봉기를 연기하고 다시 외국으로 나갔다. 그의 판단은 어리석은 것이었는데, 그결과 적에게 시간을 주어 광범위한 체포와 병력축소로 봉기계획이 흔들리게 되었다. 남은 사람들은 숨어지내며 1794년 3월 12일 거사를 시작했다. 이들의 요구에 따라 3월 24일 크라쿠프에 도착한 그는 수많은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침략세력들(주로 러시아와 프로이센)에 대한 민족봉기를 개시한다고 엄숙하게 선언했다. 또한 모든 정치적 책임과 군지휘를 떠맡으면서 반란 정부를 세우고 군대를 조직했다.
이를 위해 그는 소수정예의 적군에 대해 인해전술로 대응해야 했다. 그리하여 징병제를 도입, 신병을 추가해 기존 병력을 확충했으며 새로이 군을 편성했다. 군수산업이 전혀 없어 그의 군은 통상적인 화기도 갖출 수 없었으므로 그는 자신의 농민군을 창과 재래식 무기인 낫으로 무장시켰다.
4월 4일 라쿠아비체에서 그가 직접 지휘해 낫을 든 군대가 크게 승리를 거둔 뒤, 포병이 후위에 서고 낫으로 무장한 대열이 전위에서 공격하는 특이하고 새로운 전술이 개발되었다.
농민 대중에게서 더 많은 의용병을 모집하기 위해 5월 7일 그는 포우아니에츠 선언을 발표, 농노제를 중지시키고 부역량도 반으로 줄이겠다고 선포했다. 여기에 어느 정도 귀족들의 반대가 따랐다. 여러 차례의 패배로 코시치우슈코는 최후의 거점인 바르샤바로 후퇴해야 했다. 약 2개월 동안 프로이센군과 러시아군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이 도시를 방어한 것은 전략가로서나 기술자로서 그가 거둔 엄청난 군사적 승리였다.
그는 도시의 주민들로 하여금 방어물을 구축하도록 하고 정규군으로 도시 외곽을 방어하게 하는 방법으로 꾸려나갔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순간에서는 그 스스로 총검을 꽂은 돌격대를 이끌었다. 다음으로 그는 포위군의 후미에 있는 점령지 비엘코폴스카 지방에서 봉기를 선동해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로 하여금 퇴각하도록 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이 재빨리 병력을 강화하면서 보복해왔다. 그는 적시에 병력을 집중시킬 수가 없어 마치에요비체에서 참패,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지도자를 잃은 봉기는 곧 무너졌고 제3차 폴란드 분할로 국가는 사라졌다.
말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 수감된 코시치우슈코는 천천히 건강을 회복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예카테리나 2세가 죽고 그의 아들 파벨 1세가 황제로 등극해 1796년 그를 사면해주었다. 절룩거리는 환자였지만 그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1797년 8월 18일 필라델피아에 도착해 대중들에게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나 현직 연방주의자들에게는 의심을 샀다. 미국에서 그는 활발한 사교활동을 하며 당시 미국의 부통령이었던 토머스 제퍼슨과 지속적인 우정을 맺기 시작했으나 프랑스에서 폴란드의 독립을 촉진하는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소식을 들은 뒤 1798년 5월 5일 비밀리에 미국을 떠났다.
떠나기 전에 그는 이미 미국에서 자기 소유의 흑인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그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소유지를 처분했다. 그의 프랑스 귀환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진정한 공화주의자였던 그는 나폴레옹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나폴레옹의 계획에 조국 해방이 포함될 때만 협력하겠다며 오로지 프랑스만을 위한 싸움에서 폴란드 연대 지휘를 맡는 것을 거부했다. 결국 그는 공직 생활에서 은퇴해 퐁텐블로 근처에 있는 베르빌에 거처를 정했다. 1806년 나폴레옹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코시치우슈코의 협조를 얻으려 애썼다.
그러나 코시치우슈코가 다시 정치적인 약속을 조건으로 요구하자 나폴레옹은 자신의 계획에 더욱 협조적인 다른 폴란드인을 구했다. 그는 바르샤바 대공국(1807)으로 조국이 재건되었을 때도 망명중이었다. 따라서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폴란드 영토 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그의 도움을 요청해왔다. 빈 회의가 끝나고 1815년 러시아 치하의 새로운 폴란드가 탄생한 뒤 알렉산드르 황제는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바라면서 그를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비현실적인 조건을 제시하면서 사회개혁을 실시하고 드비나 강과 드네프르 강으로 국경을 정하자고 요구했다. 이에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는 스위스의 졸로투른으로 갔고 폴란드에 있는 자기 소유의 모든 농노들을 해방시키고 부역을 철폐했다. 1817년 그가 죽자 유해는 크라쿠프로 옮겨졌고 1819년 크라푸르 대성당 내 왕들의 묘가 있는 곳에 묻혔다. 폴란드인들은 오랜 관습을 되살려 크라쿠프 근처에 그를 기리기 위한 봉분을 거대하게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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