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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1세의 초기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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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는 파벨 페트로비치 대공(나중에 파벨 1세가 됨)과 뷔르템베르크몽벨리아르의 공녀인 마리아 표도로브나 대공비 사이에 태어난 맏이였다.

할머니는 당대의 통치자 예카테리나 2세 여제였는데, 맏손자에게 제위를 이을 준비를 시키기 위해 부모한테서 그를 데려다가 자신이 직접 길렀다. 예카테리나는 아들 파벨의 불안정한 성격에 불쾌감을 느꼈기 때문에, 아들한테는 절대로 물려주지 않기로 결심했다. 프랑스 계몽철학자들의 친구이자 제자인 예카테리나는 백과전서파인 드니 디드로에게 알렉산드르의 개인 교수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디드로가 거절하자 예카테리나는 스위스 시민인 프레데리크 세자르 라아르프를 손자의 가정교사로 선택했다. 공화주의자이자 훌륭한 교육자인 그는 제자에게 깊은 영향을 주어 유연하고 개방적인 정신을 심어주었다. 청소년 시절에 알렉산드르는 궁전에서 멀리 떨어진 상트페테르부르크 교외에 있는 가트치나로 아버지를 찾아가도 좋다고 허락을 받았다.

파벨은 이곳에서 우스꽝스러운 작은 왕국을 건설하고 군사 훈련과 열병식에 열중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르는 이곳에서 드세고 엄격한 장교 알렉세이 아락체예프의 지도로 군사 훈련을 받았는데,아락체예프는 알렉산드르를 충실히 섬겼고 알렉산드르도 평생 동안 그를 아꼈다. 그가 16세 때인 1793년에 예카테리나는 그를 14세인 바덴두를라흐의 루이제 공녀와 혼인시켰고 이로써 그의 교육은 끝났다.

그 이른 결혼은 하루속히 로마노프 왕조의 대를 이을 자손을 얻기 위한 것이었으나 처음부터 불행했다. 엘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 상냥하고 매력적인 여자는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았지만 유독 남편의 사랑만은 얻지 못했다. 예카테리나는 1796년 11월 17일(구력 11. 6)에 갑자기 죽었다. 여제는 아들의 상속권을 박탈하고 손자를 제위 계승자로 지명한 선언문서를 이미 써놓았다.

알렉산드르는 이것을 알고 있었지만 감히 선언서를 공개하지 못했고 결국 아버지 파벨이 황제가 되었다.

즉위

파벨 1세의 통치 기간은 러시아의 암흑기였다.

난폭하고 괴상한 군주의 행동 때문에 일부 귀족과 군인들은 황제 암살 음모를 꾸몄고, 결국 1801년 3월 23일(구력 3. 11) 밤 파벨은 암살당했다. 알렉산드르는 이튿날 황제가 되었다. 음모자들은 그에게 미리 털어놓으면서, 황제를 죽이지 않고 퇴위만 요구하겠다고 약속했었다. 알렉산드르는 그들의 말을 믿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고 믿고 싶어했다. 파벨이 러시아를 어둠 속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러시아 백성에게 알렉산드르는 찬란한 새벽과도 같았다.

그는 잘생기고 강하며, 유쾌하고 인정이 있으며 열의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자신의 통치가 행복하기를 원했으며 러시아에 꼭 필요한 대대적인 개혁을 꿈꾸었다. 그는 귀족이면서도 자유주의 사상을 갖고 있는 4명의 친구, 아담 차르토리스키 공(公), 파벨 스트로가노프 백작, 빅토르 코추베이 백작, 니콜라이 노보실체프와 함께 사적인 비밀위원회(Neglasny Komitet)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가 공언한 목표는 '국민 복지의 원천인 좋은 법률'의 틀을 만드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르와 그의 측근은 선대의 통치 기간에 저질러진 많은 부정을 시정하고 많은 행정 개선을 이룩했다. 그들의 주요업적은 방대한 대중교육 계획을 수립한 것이었다. 이 계획안에는 다양한 유형의 학교를 많이 세우고 교사양성기관을 마련하며 대학을 3개 신설한다는 것 등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라아르프한테서 전수받은 인도주의 사상과 백성에게 행복한 삶을 안겨주겠다는 자신의 소망에도 불구하고, 가장 긴급한 과제인 농노제 폐지를 시행하는 데 필요한 정력은 갖고 있지 않았다. 농노제는 황제 자신의 말대로 러시아를 비참한 후진국으로 머물러 있게 하는 '타락'이었다. 그러나 인구의 3/4을 이루는 농노를 해방하면 그들의 주인인 귀족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킬 것이었다. 귀족들은 부와 안락함의 토대인 노예들을 잃고 싶어하지 않았다.

농노제는 러시아인들을 계속 짓누르는 짐이었고 근대화의 장애물이었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유럽의 다른 국가들보다 적어도 1세기는 뒤떨어진 상태였다. 알렉산드르는 이런 상태를 쇄신하고 싶다는 진지한 욕망 때문에 헌법을 제정해 '독재 정치를 제한'할 것을 생각했지만 변화를 거부하는 귀족들에게 갑작스러운 변화를 강요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깨닫고 다시 물러섰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꿈을 현실로 만들지 못하는 공상가였다. 불안정한 성격 때문에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그 생각에 도취하면서도 계획을 실행하는 것은 주저하곤 했다.

결국 알렉산드르와 그의 젊은 동료들이 받은 '서구'의 이론교육은 러시아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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