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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70. 1. 14, 바르샤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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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61. 7. 15, 프랑스 몽페르메유 |
국적 | 폴란드 |
요약 폴란드의 정치가.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가 폴란드의 옛 영토를 분할점령하자 폴란드를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리투아니아 왕족의 후손으로 18세기 폴란드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제후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부친인 아담 카지미에슈 대공은 왕위를 거절했고(1763), 이 왕위는 독립 폴란드 왕국의 마지막 왕인 사촌 스타니수아프 2세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에게 넘어갔다. 아담 예지는 고국에서 완벽한 교육을 받고 독일·프랑스·네덜란드·스위스·잉글랜드·스코틀랜드 등지를 널리 여행했다.
1791년 폴란드로 귀국하자마자 제2차 폴란드 분할(1793)을 초래한 1792년의 대(對)러시아 전투에서 뛰어난 공을 세웠다. 제3차 폴란드 분할(1795)의 계기가 된 1794년 봉기에서 그와 부친은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으나 푸우아비에 있는 그들의 궁전은 파괴되고 가문의 영지는 몰수당했다. 재산을 되찾기 위해 1795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간 그는 러시아 정부 관리가 되어 알렉산드르 대공과 친하게 지냈다. 알렉산드르가 차르가 된 후 그 측근 중 한 사람으로서 정부개혁안을 추진했으며 1802년에 외무차관, 1804년에 외무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프로이센과의 동맹과 대나폴레옹 전쟁 수행에 반대했는데, 이때문에 1805년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패배하자 1806년 해임되었다. 그러나 폴란드의 옛 동부영토를 포함하는 빌노(빌뉴스) 교육부 고문관(1803~)으로 계속 러시아 정부 내에 머물렀다. 나폴레옹의 몰락 후 그는 폴란드를 수복하기 위한 노력을 재개했다. 알렉산드르의 동의를 얻어 1815년 빈 의회에서 폴란드의 대변인으로 활동해 알렉산드르를 왕으로 하는 새로운 폴란드 왕국의 창설을 비롯하여 가능한 모든 성과를 얻어냈다. 폴란드 왕국의 자유주의 헌법을 마련하는 데 참여했고, 상원의원과 행정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나 1816년 알렉산드르에 환멸을 느껴 대부분의 공직에서 은퇴했다.
러시아에 대한 반란을 원하지도 않았고 폴란드인이 싸우는 것보다는 서유럽의 외교적 간섭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1830년 11월 29일 일어난 폴란드의 11월 봉기의 선두에 나서게 되었다. 봉기가 실패한 후 러시아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는 처지가 되어 1831년 8월 15일 망명길에 올랐다. 파리에 있는 그의 거처인 랑베르 저택은 폴란드 망명객들의 정치활동 중심지가 되었다.
비공식적으로 '망명중인 폴란드 왕'으로 인정받았으며 콘스탄티노플·로마 등 유럽의 여러 수도에 비공식 대표단을 파견했다. 러시아의 영향력을 와해시키기 위해서 발칸 제 민족의 민족운동을 고무했으며 후에 오스만 투르크의 지원을 받아 카프카스의 민족운동도 고무했다. 1863년의 폴란드 봉기를 준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봉기가 일어나기 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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