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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1세의 중기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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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대외정책

알렉산드르의 놀라운 변덕은 그가 대외정책에 몰두하기 위해 내정개혁을 포기한 데서 나타났다.

그는 통치 기간의 대부분을 외교에 전념했다. 유럽 대륙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에 민감한 그는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유럽인'이었다. 그는 '유럽의 중재자'라고 불린 할머니 예카테리나처럼 조정자가 될 사명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알렉산드르는 집권하자마자 파벨 1세가 깨뜨린 영국과의 동맹을 다시 맺었다. 한편 보나파르트의 정복욕을 억제해 보나파르트를 '온건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프랑스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일종의 기사도 정신 때문에 프로이센 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루이제 왕비한테도 애착을 느꼈으며, 프로이센과 우호조약을 체결했다. 나중에는 오스트리아와도 좋은 관계를 맺었다. 이상주의에 사로잡힌 그는 이런 동맹이 결국 유럽 연방으로 이어질 것으로 확신했다.

나폴레옹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남의 나라 영토를 침범했고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야망을 드러냈으며, 1804년에는 프랑스 황제가 되었다. 이에 알렉산드르는 나폴레옹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색인:나폴레옹 전쟁). 총사령관 역할을 떠맡은 그는 오스트리아 장군들에게 의지했고, 명민한 전략가인 러시아 장군 쿠투조프 공의 조언을 무시했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동맹군은 1805년 12월 2일 모라비아의 아우스터리츠에서 패배했고,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는 자신의 영토가 적군에게 점령당했기 때문에 평화조약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 영토는 국경 뒤에 무사히 남아 있었으며 나폴레옹은 러시아 황제를 용서하고 싶어했다. 그는 알렉산드르의 우정을 얻고, 세계를 알렉산드르와 나누어 갖고 싶어했다. 그러나 복수를 원하는 알렉산드르에게는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1806년 나폴레옹은 예나와 아우어슈테트에서 프로이센을 무찔렀다. 러시아 황제는 어머니와 조언자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우방을 도우러 달려갔다. 전투는 프로이센 동부에서 벌어졌다. 베니히센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군은 아일라우에서 부분적인 승리를 거둔 뒤, 1807년 6월 14일 프리틀란트에서 참패했다.

이어서 틸지트에서 조금 떨어진 네만 강 한복판의 뗏목 위에서 두 황제의 회담이 열렸다(6. 25). 그러나 뒤따른 사건들을 보면, 틸지트 회담에서 러시아 황제는 프랑스 황제를 속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시간을 벌기 위해 자신의 매력을 최대한 이용하며 나폴레옹을 찬미하는 친구 역할을 연기했다. 그는 승리자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여 영국과 관계를 끊고, 나폴레옹이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수립한 대륙(봉쇄)체제에 충실하고, 1795년 폴란드 분할 때 프로이센이 얻은 폴란드 영토에 바르샤바 대공국을 수립하는 것을 승인하겠다고 약속했다.

나폴레옹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알렉산드르에게 스웨덴과 투르크로 진출할 자유를 주었다.

틸지트에서 1812년의 침략까지

대부분의 러시아인은 틸지트 동맹에 분노와 굴욕을 느꼈다.

그들은 영국과 교역을 단절하면 심각한 경제 상황이 닥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지만, 알렉산드르는 복안을 숨기고 때를 기다렸다. 그는 가트치나에서 온 교관이며 그에게 없어서는 안 될 동지가 된 유능한 아락체예프의 도움을 얻어 러시아 군대를 개편하고 강화했다. 그러는 동안 군주의 인기는 뚝 떨어졌다. 모든 계층의 백성들이 러시아인의 피를 헛되이 희생하고 나라를 파멸로 몰고간다고 그를 비난했다. 알렉산드르는 다시 한번 내정 개혁에 관심을 돌렸다. 그는 내정 개혁의 책임을 저명한 법률가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스페란스키에게 맡겼다.

스페란스키는 평민 출신이었으나 재능이 뛰어나 급속히 출세했다. 그는 러시아의 법률 체계를 완전히 개편할 방대한 계획을 세웠으며, 러시아 법률을 완벽하게 집대성한 법전과 체계적으로 배열한 법률 요람을 작성했다. 그러나 이 방대한 계획 가운데 극히 일부분만 실시되었는데 그 이유는 알렉산드르가 계획의 시행을 또다시 취소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알렉산드르가 대외적인 사건에 정신을 빼앗긴 나머지 제국을 새로운 토대 위에 재건하는 일에 관심을 쏟지 못하게 된 탓이기도 했다.

러시아인들은 프랑스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지만 황제는 1808년 작센의 에르푸르트에서 다시 나폴레옹을 만났다.

여기서 그는 틸지트에서 동맹자였던 나폴레옹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1809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자 알렉산드르는 나폴레옹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진격 시늉만 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가 중립국 선박으로 위장해 영국과 교역했으며 알렉산드르의 누이동생 안나 파블로브나를 아내로 달라고 한 데 대해 이를 거절했다고 하여 알렉산드르를 비난했다.

한편 알렉산드르는 나폴레옹한테서 폴란드 독립 왕국을 세우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려고 애썼지만 실패했다. 나폴레옹이 알렉산드르 황제의 처남의 봉토인 올덴부르크 대공국을 포함해 발트 해 연안의 독일 영토를 병합하자, 알렉산드르는 이것을 개인적인 모욕으로 생각하고 나폴레옹에게 격렬히 항의했다. 이 모든 것은 양쪽에게 전쟁 준비의 구실로 작용했다. 러시아에서는 나폴레옹에 대한 여론이 급격히 달라졌다.

궁정에서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이 높아지자 알렉산드르는 나폴레옹 및 나폴레옹 법전의 숭배자인 법률고문 스페란스키를 추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는 다시 견해를 바꾸어 총애하는 누이동생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가 이끄는 애국 집단의 반동 사상을 받아들였다. 당시 러시아가 처해 있던 상황에서는 전통적인 제도를 지키는 것이 가장 좋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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