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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패배
나폴레옹과 60만 명의 대군은 1812년 6월 24일 러시아를 침공했다.
러시아인들은 그후에 벌어진 전투를 당연히 애국 전쟁이라고 불렀다. 이 전쟁에서 러시아 전국민은 완강한 저항과 뛰어난 끈기를 보여주었다. 전쟁은 알렉산드르를 변화시켜, 그를 정력과 결단력으로 가득 채웠다. 프랑스군은 러시아군이 후퇴하는 만큼 빠른 속도로 진격해 러시아군을 작전 기지에서 몰아냈다. 나폴레옹은 일단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러시아 황제가 항복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보로디노에서 피비린내나는 전투를 치른 뒤, 나폴레옹은 주민이 거의 떠나버린 모스크바에 입성했고 모스크바는 그 직후에 화재로 거의 폐허가 되었다.
정복자는 도저히 머물 수 없을 만큼 폐허가 된 도시에서 야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는 평화조약을 간청하지 않았다. 한편 러시아 황제는 여론의 압력에 굴복해 그가 싫어하는 쿠투조프를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 늙은 군인은 뛰어난 전략과 영웅적인 유격대원들의 도움으로 적군을 추격, 러시아에서 몰아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퇴각한 것은 스페인에서 맛본 좌절과 함께 그의 몰락을 재촉했다.
알렉산드르는 "나폴레옹이냐, 아니면 나냐! 지금부터 우리는 함께 통치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는 모스크바 화재가 "내 영혼을 밝게 비추어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유럽을 향해 무기를 들고 일어나 나폴레옹의 정복으로 노예가 된 사람들을 구원하라고 호소했다. 그의 열정과 끈기, 그리고 승리를 향한 굳은 의지는 프로이센 왕과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자극을 주었고, 용기를 얻은 동맹군은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제(諸) 국민의 전투'로 승리를 결정지을 수도 있었지만 알렉산드르는 파리에 도착할 때까지 평화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1814년 3월에 의기양양하게 파리에 입성했다. 나폴레옹이 퇴위하자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부르봉 가문의 왕정복고를 마지못해 받아들였으며 새로운 왕 루이 18세의 정통성을 인정해 주었다.
알렉산드르는 프랑스가 패전국으로서 이행해야 할 조건을 완화하고, 자신은 프랑스 국민과 싸운 것이 아니라 나폴레옹과 싸웠다고 주장하면서 프랑스에 대해 너그러움을 보였다. 알렉산드르는 원했던 대로 가장 강력한 군주이자 유럽 운명의 조정자가 되었다. 그는 1814년 가을 빈에서 역사상 최대의 국제회의가 소집될 수 있도록 했다. 빈 회의는 호화로운 축제인 동시에 외교적 음모와 신랄한 논쟁의 무대였다.
알렉산드르 황제가 구원한 동맹국들은 그의 세력을 두려워해 러시아의 폴란드 합병을 반대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가 자신의 공로에 대한 대가로 요구한 것은 폴란드 합병뿐이었으므로 그는 이를 이루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나폴레옹이 유형지 엘바 섬에서 돌아와 황제의 자리를 되찾자 다시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나폴레옹이 1815년 6월 18일 워털루에서 동맹군에 최후의 패배를 당함으로써 끝났다. 승리한 군주들은 다시 파리에 모여 평화조약의 뼈대를 만들었고 이번에도 알렉산드르가 프랑스를 위해 개입했다.
마지막 10년
이 기간은 알렉산드르 황제에게는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나라가 외세의 침입을 당한 뒤 그는 신앙심을 갖게 되어 날마다 성서를 읽고 자주 기도했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경건파 교도이며 몽상가인 바르바라 율리안 크뤼데너를 자주 방문하다가 결국 신비주의자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을 하느님이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예언자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개인적인 영향력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지만 알렉산드르는 새로 접한 복음주의적 열정을 끝까지 유지했고, 퀘이커교도와 모라비아교도들에게 강한 영향을 받은 비교조적인 '보편 종교'를 믿는다고 고백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르는 폴란드를 얻어 거기에 왕국을 세우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며, 헌법을 부여하고, 자신은 '자유로운 제도'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으며 "나에게 의존하는 모든 나라에 자유로운 제도를 확대하고 싶다"고 선언했다.
이 말은 러시아에 커다란 희망을 불러일으켰지만 오랜만에 조국으로 돌아온 황제는 더이상 개혁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 성서협회와 군인 거주지 건설에만 관심을 쏟아 군인과 가족들이 좀더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땅을 주어 정착시키려고 애썼다. 착상부터 잘못인 이 계획은 결국 군인과 농민들에게 고통을 주었을 뿐이다.
제2차 파리 조약을 맺은 뒤 알렉산드르는 신앙심에 이끌려 신성동맹을 결성했는데, 유럽 군주들과 유럽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에 바탕을 둔 평화를 가져다 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 동맹을 유럽 연방의 시초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정치적 토대가 아니라 종교적 토대를 가진 연방이었을 것이다. 알렉산드르 황제의 이상주의적 공상은 슬픈 종말을 맞이했다. 신성동맹은 국민과 맞서는 군주들의 동맹이 되었기 때문이다.
파리 회의 이후에도 엑스라샤펠과 트로파우, 라이바흐(류블랴나) 및 베로나에서 잇따라 추가 모임을 가진 동맹국들은 독재정치의 옹호자이며 무력으로 유지되는 질서의 수호자임을 드러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독재정권을 반대하는 일련의 봉기가 일어나자 '신성동맹'은 유혈 진압으로 대응했다. 알렉산드르 자신은 러시아 세묘노프스키 연대의 반란에 심한 충격을 받았고, 마침내 혁명적 급진주의의 존재를 찾아냈다고 생각했다.
이것으로 그의 자유주의적 꿈은 막을 내렸다.
이때부터 그는 모든 반란을 신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같은 종교를 믿는 그리스인들이 투르크의 폭정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을 때, 알렉산드르는 그들도 다른 반역자들과 똑같다고 주장하면서 지원을 거부해 국내에 충격을 주었다. 알렉산드르에게서 유럽 문제의 주도권을 넘겨받은 오스트리아 총리 메테르니히 공은 그의 정신 상태를 파렴치하게 이용했다. 알렉산드르는 러시아로 돌아온 뒤, 모든 일을 아락체예프에게 맡겼다. 알렉산드르에게 이 시기는 피곤함과 낙담, 그리고 우울한 생각으로 가득찬 시기였다.
러시아에는 반동과 반(反)계몽의 시기였고, 진짜 반란 및 가공의 반란과 맞서 싸우는 시기였다. 알렉산드르는 곳곳에서 '사탄의 지배'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반대편에서는 젊은이들의 비밀결사가 퍼져갔다. 이 비밀결사는 대부분 나라를 재건하고 자유주의를 수립하고자 애쓰는 젊은 군인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은 음모를 꾸몄다. 알렉산드르는 여기에 대한 경고를 받았지만 단호하게 행동하기를 거부했다. 그의 제관은 그를 무겁게 짓눌렀고, 그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제위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소망을 감추지 않았다.
황후가 병들자 알렉산드르는 황후를 아조프 해 연안의 타간로크로 데려갔다.
바람 많고 쓸쓸한 이 마을은 기묘한 온천장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서먹서먹하게 지냈던 황제 내외는 이곳에서 조용한 행복을 즐겼다. 그 직후에 알렉산드르는 크림 반도를 시찰하다가 폐렴 또는 말라리아로 보이는 병에 걸려 타간로크로 돌아오던 길에 죽었다. 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의 신비주의, 측근들의 허둥댐과 머뭇거림은 모두 그가 시베리아의 은둔지로 '떠났다'는 전설을 만들어내는 원인이 되었다. 황제가 죽은 뒤 측근들이 관을 열기를 거부함으로써 이러한 의구심은 더욱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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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알렉산드르 1세의 후기생애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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