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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69. 10. 4(구력 9. 23), 러시아 노브고로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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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34. 5. 3(구력 4. 21), 노브고로트 그루지노 |
국적 | 러시아 |
요약 러시아의 장교·정치가.
알렉산드르 1세의 재위(1801~25) 마지막 10년간 러시아의 국내 문제를 좌우했으며 그때문에 이 기간은 '아락체예프시치나'(아락체예프의 학정)라고 알려졌다. 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1783~87년에 포병 및 공병사관학교에서 공부하고 1787년 러시아 군 포병장교로 임명되었다. 황태자 파벨의 절친한 측근이자 조언자였으며 파벨이 1796년 황제로 즉위하자 러시아군 전체를 재편성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엄격한 군기확립 조치로 장교단과 사이가 멀어지면서 해임되었다가(1798), 알렉산드르 1세가 즉위한 후에야 현역으로 복귀했다.
1803년 포병부대의 감찰총감이 되어 포병부대를 재편성했다. 그후 육군장관이 되었으며(1808), 러시아-스웨덴 전쟁(1808~09) 중이던 1809년에는 망설이는 러시아군을 몸소 지휘하여 꽁꽁 얼어붙은 핀란드 만을 건너 올란드 제도를 공격하게 했다. 이 작전은 결국 스웨덴이 핀란드를 러시아에 양도하도록 만드는 성과를 가져왔다(1809. 9).
그는 대체로 알렉산드르가 추진하려던 자유주의적인 행정 및 헌정 개혁에 반대했다. 알렉산드르가 자문기구인 국무협의회를 만들자(1810), 육군장관직을 사임했으나 나중에 이 기구의 군사부장직을 수락했다. 알렉산드르의 가장 신임받는 군사고문으로 1812년 전쟁 때는 황제의 모든 군사관계 통신문과 전령문서를 취급했다. 그 후 알렉산드르가 외교문제에만 거의 전적으로 몰두하게 되자 각료회의의 내정 운영을 감독하는 책임을 맡았다(1815).
이후 10년간 러시아의 내정을 좌우하면서 잔혹하고 비정하게 능률 위주로 관료의 직무를 수행했다. 근본적으로 보수주의자였음에도 그는 러시아 발트 해 지방의 농노해방에 관여했으며(1816~19), 러시아의 모든 농노의 점진적 해방을 위한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1818). 그외에도 둔전병제(屯田兵制)에 입각한 정착촌 제도의 창설을 지휘하여, 1816~21년 여기에 러시아 상비군의 거의 1/3을 수용했다. 니콜라이 1세가 알렉산드르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1825), 모든 관직을 사임하고(1826. 4)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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