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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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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아리스토텔레스 사후 지금까지 그의 저작을 연구하고 그의 학설과 방법을 채택·규명하는 작업은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해석하거나 왜곡했고, 칭찬하거나 비난했으며 재구성하거나 완전히 변형했다. 이러한 활동은 고대에는 그리스·북아프리카·로마, 중세에는 페르시아·스페인·시칠리아 및 브리티시 제도, 근대에는 독일·북아메리카에서 나타났다.

그리스 전통

아리스토텔레스 사후 수십 년 동안 그의 페리파토스 학파(소요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을 유지하며 비판적 연구의 중심지로 남아 있었다.

직속 후계자인 테오프라스토스는 스승의 형이상학과 심리학을 독자적으로 보완하고 자연(식물학과 광물학)과 논리학(명제이론과 假言 삼단논법)에 대한 그의 연구를 발전시켰다. 어떤 제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당시의 다른 철학유파와 결합하기도 했다.

리케이온 외부에서는 스토아 학파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부분적으로 추종하면서 형식논리학·의미이론·범주사용 등에 관심을 가졌다. 스토아 학파는 또 자연에 대한 관심, 자연과학의 여러 측면, 인간은 본래 사회적 동물이라는 믿음뿐 아니라 경험주의의 관점을 취했다는 점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적이었다. 회의론자들은 종종 그들의 체계적 회의를 입증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형식에 의존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초기 신학과 심리학을 논박하고 그의 성숙기 철학을 무시한 에피쿠로스조차 '의지에 대한 학설', '우정의 관념', '만족과 기쁨을 주는 고귀한 목적으로서의 지식 추구' 등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유사성을 보여준다.

BC 1세기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비전'(秘傳) 저작들은 비교적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좀더 대중적·문학적·플라톤적 경향을 가진 저술들은 파나이티오스와 그의 제자 포세이도니오스 같은 절충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영향은 로마의 철학자·법률가인 키케로를 징검다리로 해서 4~5세기로 이어졌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조화시키려는 끈질긴 경향은 여기에 기초했다. BC 1세기 아리스토텔레스의 비전 저작들은 로데스의 안드로니코스 등에 의해 집성되고 비판적으로 편집되었다.

역사학자·철학자인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오스는 이 판본을 가지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를 설명했다. 이것은 학문적이고 스콜라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개별 저작들이 논평·강의되기 시작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Categoriae〉을 비롯한 논리학 관련 저작들이 체계적인 철학 연구의 입문서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형태는 그후 1700년 동안 계속되었다. 비전 저작에 근거한 순수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4세기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아프로디시아스의 알렉산드로스 등은 논리학·미학·형이상학·자연철학 그리고 심리학 저작들에 대한 상세하고 명쾌한 주석서를 썼다. 이 학자들이 수세대 동안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을 주도했다. 테메스티오스를 필두로 한 다른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많은 논문을 좀더 현대적인 언어와 읽기 쉬운 문체로 다시 썼다.

3세기에는 신플라톤주의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원용했다.

이 학파의 대표자 플로티노스는 그의 지성론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부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추종했다. 플로티노스의 제자 포르피리오스는 논리학 분야에 관한 간략한 개론서 〈이사고게 Isagoge〉를 썼다. 사실 〈이사고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주 사용한 5개의 개념(유·종·종차·성질·우유성)을 간단하고 개략적으로 다룬 저작이었다.

이 입문서는 곧 〈오르가논 Organon〉(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관련 논문집임)의 필수 부분이 되었고 이후 1500년 동안 모든 학파에서 큰 권위를 인정받았다. 이때부터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신플라톤주의와 불가분하게 결부되었다. 5세기 이전에 그리스도교 신학은 부수적·간접적으로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 대한 원리적 연구는 신학자의 엄격한 훈련을 위해 필수불가결함이 입증되었다. 그의 〈자연학 Physica〉·〈형이상학 Metaphysica〉에 나오는 몇몇 개념은 교리를 합리적으로 정식화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게 되었다. 포르피리오스의 용어 5개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 10개는 그리스도교적 신플라톤주의 학파로 알려진 위(僞)디오니시우스파(5세기경)의 신비적 신학에서 이용되었다.

신에 대한 서술과 세 위격(位格)의 구별은 점점 더 전문적인 의미에서 실체·본질·우연·형상·질료·종·본성·질·양·속성 등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포함하게 되었다. 그결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8세기의 교회학자인 다마스쿠스의 성 게오르기오스의 교부철학에 수용되었다.

9세기 비잔틴의 르네상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관심도 되살아났다(비잔틴 제국). 고서들이 재발견·재편집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겸 르네상스의 주도자인 포티우스는 자신의 백과사전적 저작들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원리를 요약하기도 했다. 11~12세기에 콘스탄티노플 아카데미가 재건되면서 더욱 광범위한 학문활동이 시작되었다. 아카데미에서는 강의와 주석작업이 병행되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열에 대한 논의와 철학에 대한 종교 학파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이 활동은 별로 약해지지 않았다.

이때의 특징은 아리스토텔레스 연구가 논리학에만 집중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치이론·윤리학·생물학 등에 관한 저서를 비롯해 거의 모든 저작이 다루어졌다. 13~14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니케포루스 블레미데스, 게오르기우스 파키메레스, 테오도루스 메토키테스 등의 저작을 통해 대중화·체계화하기 시작했다.

시리아·아랍·유대의 전통

언어적·민족적 동질성에 대한 자각이 커지고 네스토리우스교나 그리스도 단성론(單性論) 같은 이단 종교운동이 5~6세기에 일어남으로써 페르시아와 비잔틴 제국 내에 시리아 연구 중심지들이 형성되었다.

레사이나의 프로바와 세르기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본 논리학 문헌과 그 주석을 번역하여 시리아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연구가 활성화되는 데 기여했다. 640년경 아랍인이 비잔틴과 사산 제국을 침략했을 때부터 이후 수세대 동안 이 중심지들은 중요성을 더해갔다. 시리아의 그리스도교도들은 9세기에 아바스 왕조의 7번째 칼리프인 알 마문이 바그다드에 새로운 이슬람 제국의 학문 중심지를 세웠을 무렵 지식인 계급을 이루고 있었다(이슬람 철학). 그때 이미 시리아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대부분을 입수·번역했다.

또 그들은 이 저작들을 시리아어 또는 직접 그리스어 저작들을 아랍어로 번역했고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서를 첨가했다. 9세기에 아랍인 알 킨디는 처음으로 아랍어를 사용하여 아리스토텔레스 개설서를 썼다. 10세기에 투르크 이슬람교도 알 파라비는 더 전문적인 연구를 통해 논리학 관련 서적을 해설했고 철학과 이슬람교 사이의 관계를 정립하려 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아랍 문화의 필수부분이 된 것은 이븐 시나아베로에스(12세기)의 저작을 통해서였다.

11세기초 아랍인 이븐 시나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이용하여 자신의 독창적인 철학체계를 세웠다. 이븐 시나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실제보다 훨씬 더 체계적이고 일관된 사상가로 해석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기껏해야 암시만 했던 문제와 해답이 이븐 시나의 저작에서는 분명한 형태로 나타난다.

스페인계 아랍인 아베로에스는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진리를 가르친다고 주장했고 계시나 계시종교는 단순하고 소박한 사람들을 위해 통속화한 철학이라고 보았다. 아베로에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훌륭한 철학적 소양과 풍부한 식견으로 샅샅이 해부하고 재구성했다. 인간 영혼의 무한성, 세계의 영원성, 전체 인류에 대응하는 단일 정신의 존재 등이 아베로에스의 주요주장이다. 이 주장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어느 정도 기초를 두고 있다.

13세기까지 유대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북아프리카·메소포타미아·스페인의 아랍 문화 속에서 발전했다.

이러한 발전은 아랍어로 이루어졌는데 철학과 유대교의 관계에 계속적인 관심을 보인 점이 독특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여러 개념이 이사크 벤 솔로몬 이스라엘리(10세기의 신플라톤주의자)의 저작 〈정의의 서 Kitāb al-ḥudūd〉·〈원리의 서 Kitāb al-usṭuqusāt〉에서 다루어졌다.

한편 아비 케브론으로 알려진 11세기의 시인·철학자인 솔로몬 이븐 가비롤의 신플라톤주의 체계는 형상과 질료 개념을 기초로 했다. 유대교의 지적·정신적 삶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용하려는 시도는 12세기 중엽 톨레도의 아브라함 이븐 다우드에 의해 이루어졌다.

코르도바의 모제스 마이모니데스는 경험적 인식의 요구와 계시의 요구를 조화시킬 길을 찾음으로써 당대 아베로에스의 견해와 명확한 대조를 이루었다. 13세기부터는 철학자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아베로에스의 저작들이 히브리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곧 성서와 〈탈무드〉에 근거한 정통이 우세하게 되었다.

라틴 전통

플로티노스와 포르피리오스는 3~4세기초 로마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관심의 최초의 결과는 빅토리누스가 포르피리오스의 〈이사고게〉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을 라틴어로 번역한 일이었다. 이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작들이 몇몇 그리스 주석서와 함께 보이티우스(6세기초 로마의 학자·정치가임)의 손에 들어간 듯하다. 그는 이 저작을 번역했고 주석서를 수정·보완했다. 이때까지가 전기 라틴 전통에 속한다. 1115년 이전에는 매우 짧은 글인 〈범주론〉·〈해석에 관하여〉만이 라틴 세계에 소개되어 있었다.

두 저작은 800년경부터 보이티우스판으로 유포되었다. 그러나 1278년이 되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거의 모든 저작이 라틴어로 번역되어 널리 유포되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전면적 재발견은 콘스탄티노플 및 다른 그리스 중심지와의 문화적 접촉과 몇몇 학자의 활약에 힘입은 것이었다.

1255~78년경에 활동한 플랑드르의 번역가 무르베케의 기욤은 아리스토텔레스 라틴어 전집을 완성했다.

포르피리오스의 〈이사고게〉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 대한 연구는 9세기 이후 여러 분야에서 사용된 논리적 방법론(변증론)의 기초가 되었다. 중세 최초의 위대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인 아벨라르두스는 변증론을 분석과 진리발견을 위한 중요한 방법으로 보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에 기초하여 보편자의 언어적·정신적·객관적 측면을 명쾌하게 설명했으며 그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언어이론과 논리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다.

이와 함께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초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우주론·형이상학이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1190년경 사레셸의 앨프레드는 〈심장의 운동에 관하여 De motu cordis〉를 쓰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원용했고, 1210~35년에는 로버트 그로스테스트가 〈자연학〉을, 1245년에는 로저 베이컨이 〈자연학〉·〈형이상학〉 일부를 주석했다.

비그리스도교적인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랍 철학의 도입은 파리에 두려움과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13세기초 파리 교황청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형이상학·심리학에 관련된 강의를 금지했다. 그러나 이 금지령은 1240년대에 이미 사문화했고 1255년에 이르면 당시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철학 논문은 파리의 대학과정에서 필수내용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으면 이단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주석자인 아베로에스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13세기와 마찬가지로 14세기에도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성행했다. 형상과 질료, 인과성 등은 둔스 스코투스의 체계에 아리스토텔레스적 틀을 부여했다. 오컴의 유명론(唯名論), '쓸모없는 실체'를 잘라내는 면도날, 개별자 중심의 형이상학 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여러 이론을 극단적인 형태이지만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나 아베로에스보다 더 충실히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랐다. 14세기에 각축한 토마스주의·스코투스주의·오컴주의 등의 다양한 스콜라 철학 학파들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바탕으로 삼았지만 그를 서로 다르게 해석했다.

근대의 발전

15세기 이탈리아는 다양한 형태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하나로 모이는 곳이 되었다.

이탈리아의 대학, 종교 학파와 파리대학 사이의 교류는 이미 오래 전부터 활기를 띠고 있었다. 또 투르크의 지배를 피해 그리스 학자들이 서쪽으로 밀려들어오면서 강력한 지적 자극이 일어났다. 많은 필사본이 이탈리아로 들어왔고 그리스와 라틴 학자들이 이 문헌을 번역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과 자연철학은 17세기의 윌리엄 하비와 갈릴레오 같은 과학자들이 계승했다.

또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근대철학자 대부분에게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방법론과 그의 기본 형이상학 개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여전히 원운동의 완전성에 매료되어 있었다.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존중했고 질료형상론과 관련이 깊은 단자(單子)의 형이상학을 전개했다.

프랑스의 장 보댕 같은 정치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처럼 현존하는 유기체와 자연환경을 연구함으로써 국가의 성질을 연구했다. 문학분야에서는 1500년까지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시학 Poetics〉이 그리스어판과 라틴어판으로 읽혀지고 분석되었다.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가 널리 퍼졌고, 행동·장소·시간의 일치라는 원칙은 비극 작가들의 창작지침으로 자리잡았다(미학).

좀더 현대로 오면 철학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주로 프리드리히 아돌프 트렌델렌부르크와 프란츠 브렌타노가 설립한 독일의 학파들에 국한된다.

트렌델렌부르크는 독일 관념론에 맞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재평가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그의 작업은 펠릭스 애들러, 조지 실베스터 모리스, 존 듀이 같은 미국의 사상가에게 영향을 미쳤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과 인식론은 브렌타노의 '기술(記述) 심리학'과 경험이론에 출발점을 제공했고,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에도 기여했다.

독일 밖에서는 라베송 몰리앙과 데이비드 로스 경이 각각 자신의 형이상학과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에 힘입고 있다고 인정했다. 또 1879년 교황 레오 13세가 토마스 아퀴나스를 복권시킨 이래 아리스토텔레스와 그가 그리스도교에 미친 영향에 대한 관심이 증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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