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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케로

다른 표기 언어 Marcus Tullius Cic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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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BC 106년, 라티움 아르피눔(지금의 이탈리아 아르피노)
사망 BC 43년 12월 7일, 라티움 카이에타(지금의 이탈리아 가에타) 근처 포르미아이(지금의 이탈리아 포르미아)
국적 로마

요약 로마 공화국을 파괴한 마지막 내전 때 공화정의 원칙을 지키려고 애썼지만 실패했다. 저술로는 수사법 및 웅변에 관한 책, 철학과 정치에 관한 논문 및 편지 등이 있다. 오늘날 그는 가장 위대한 로마의 웅변가이자 수사학의 혁신자로 알려져 있다.
키케로는 아르피눔의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로마와 그리스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그는 법조계에서 명성을 확립했고, BC 75년에는 시칠리아 섬 서부에서 콰이스토르(재무관)로 공직생활을 시작하여 집정관이 되었다. 철학사에서 키케로는 그리스 사상의 전달자로서 중요성을 갖는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로마시대의 정치가, 웅변가, 문학가, 철학자이다.

ⓒ K. A. Baumeister/wikipedia | Public Domain

로마 공화국을 파괴한 마지막 내전 때 공화정의 원칙을 지키려고 애썼지만 실패했다.

저술로는 수사법 및 웅변에 관한 책, 철학과 정치에 관한 논문 및 편지 등이 있다. 오늘날 그는 가장 위대한 로마의 웅변가이자 수사학의 혁신자로 알려져 있다.

키케로는 아르피눔의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로마와 그리스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그는 BC 89년 폼페이우스 트라보(폼페이우스의 아버지) 밑에서 군복무를 했으며, BC 81년 처음으로 법정에 등장해 큉크티우스를 변호했다. BC 80(또는 79)년초에 그는 존속살인이라는 날조된 혐의로 기소된 섹스투스 로스키우스를 훌륭하게 변호해 법조계에서 명성을 확립했고, BC 75년에는 시칠리아 섬 서부에서 콰이스토르(재무관)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BC 66년에 그는 당시 막강한 연설을 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카툴루스와 유력한 옵티마테스(원로원의 보수파)에 맞서서, 폰투스 왕 미트라다테스를 토벌하기 위한 원정의 지휘권을 폼페이우스에게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폼페이우스와 마찬가지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를 싫어했으며, 그와 폼페이우스의 밀접한 관계는 그후 그의 정치활동의 요체가 되었다. 그가 BC 64년과 BC 63년에 콘술(집정관)로 선출된 것은 그의 경쟁자인 카틸리나의 혁명사상을 두려워한 옵티마테스가 그를 밀어준 덕분이었다.

콘술에 선출된 뒤 첫번째 연설에서 그는 로마를 떠나 있던 폼페이우스를 위해 세르빌리우스 룰루스의 농업법안을 반대했다.

그러나 그의 주요관심사는 카틸리나의 반란 음모를 폭로하는 것이었다. BC 64년의 콘술 선거에서 키케로에게 패한 카틸리나는 BC 63년에도 다시 선거에 출마했다(이 선거를 주재한 키케로는 만약을 위해 겉옷 밑에 갑옷을 입고 있었음). 카틸리나는 선거에서 다시 패배하자 이탈리아에서 무장 반란을 일으키고, 로마에 불을 지르려는 음모를 꾸몄다. 키케로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이 위험을 납득시키느라 애를 먹었지만 10월 22일 마침내 계엄령 선포와 유사한 '최후의 포고령'(세나투스 콘술툼 울티뭄)이 원로원을 통과했다.

키케로는 암살기도를 모면한 뒤 11월 8일 원로원에서 카틸리나를 비난하는 최초의 연설을 했고, 그날 밤 카틸리나는 로마를 떠났다. 음모자들의 죄를 입증하는 증거가 확보되자 원로원에서는 그들의 처리 문제를 둘러싼 토론이 벌어졌다. 이 토론에서 카토는 음모자들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카이사르는 처형에 반대했다. 토론이 끝난 뒤 음모자들은 키케로의 책임으로 처형되었다.

키케로는 '빅세룬트'('그들은 죽었다'라는 뜻)라는 한 마디를 대중에게 말해 모든 계층의 박수 갈채를 받았고, 이 열렬한 환영은 그후 그가 정치에서 '콩코르디아 오르디눔'('계층간의 화합'이라는 뜻)을 호소하려는 마음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카툴루스는 그를 '나라의 아버지'라고 찬양하기까지 했으며 이때가 그의 생애의 절정기였다.

BC 60년말에 카이사르는 키케로에게 카이사르와 크라수스 및 폼페이우스의 정치동맹에 참가하라고 권유했지만, 키케로는 이 정치동맹이 위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권유를 거절했다.

BC 59년에는 갈리아 원정을 앞둔 카이사르가 키케로에게 자신의 참모로 일해달라고 제의했지만, 그는 이 제의도 거절했다. 그와 사이가 나쁜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가 BC 58년에 호민관이 되자 키케로는 위험에 빠졌다. 목숨이 위태로워진 키케로는 폼페이우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거절당하자, 실의에 빠져 BC 58년 3월에 로마를 탈출했다.

이튿날, 클로디우스는 로마 시민을 재판 없이 처형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어서 클로디우스는 키케로를 추방자로 선언한 2번째 법률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률의 적법성은 의심스럽다. 키케로는 마케도니아의 테살로니카로 갔다가 다시 일리리쿰으로 갔다. 그는 폼페이우스와 호민관 밀로가 적극적으로 애써준 덕분에 BC 57년 8월 4일 추방에서 풀려나 로마로 소환되었다. 키케로는 그날 브룬디시움(지금의 이탈리아 브린디시)에 상륙하여, 로마로 가는 동안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1개월 뒤에 로마에 도착했다.

BC 57~56년 겨울에 키케로는 폼페이우스를 카이사르에게서 떼어놓으려고 애썼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폼페이우스는 키케로의 충고를 무시하고, 카이사르 및 크라수스와 맺은 협약을 BC 56년 4월 루카에서 갱신했다. 그후 키케로는 폼페이우스의 압력에 굴복하여 정치에서 그들 세 사람과 제휴하기로 동의했으며, 이런 취지의 글을 쓰겠다고 약속했다. 〈속주의 집정정치에 관하여 De provinciis consularibus〉라는 연설은 그의 새로운 동맹관계를 나타낸 것이었다. 그는 불쾌한 변호를 수없이 떠맡아야 했고, 결국 공직 생활을 포기했다.

그후 몇 년 동안 그는 〈웅변에 관하여 De oratore〉(BC 55)·〈공화정에 관하여 De republica〉(BC 54~52)를 끝마쳤고, 〈법률에 관하여 De legibus〉(BC 52)를 쓰기 시작했다. BC 52년에 밀로가 클로디우스를 죽이자 그는 기뻐했지만, 밀로를 변호하는 데는 실패했다(이 변론은 나중에 〈밀로를 위하여 Pro Milone〉라는 책으로 출판되었음).

BC 51년에 그는 사람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1년 동안 로마를 떠나 소아시아 남부의 실리시아 지방을 다스리기로 했다.

이 지방은 파르티아의 침략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그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고 도리어 키케로는 아마누스 산의 산적들을 진압했다. 키케로가 로마로 돌아올 무렵,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서로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키케로가 로마 교외에 이르렀을 때인 BC 49년 1월에,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너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1월 17일 로마 교외에서 폼페이우스를 만난 키케로는 캄파니아에서 신병 모집을 감독해달라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키케로는 3월 17일 폼페이우스와 함께 이탈리아를 떠나지는 않았다. 그의 우유부단함은 불명예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폼페이우스의 전략에 대한 그의 비판은 미숙했다. 3월 28일에 카이사르와 면담한 키케로는 용감하게 자신의 조건, 즉 원로원에 가서 카이사르가 더이상 폼페이우스와 싸우지 못하게 하자고 제의하겠다는 의도를 제시했지만, 이것은 카이사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독재권을 비난했다. 그러나 잇따른 전투(이 전투는 BC 45년까지 계속되었음)에서 만약 카이사르의 적들이 승리했다면, 그 자신이 맨 먼저 희생되었으리라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이때는 그가 집중적으로 글을 쓴 2번째 시기였다. 이 시기에 쓴 저술로는 BC 46년의 〈브루투스, 궤변, 웅변가 Brutus, Paradoxa, Orator〉, BC 45년에 쓴 〈최고선에 관하여 De finibus〉, BC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에 완성한 〈Tusculanae disputationes〉·〈신의 본성에 관하여 De natura deorum〉·〈도덕적 의무에 관하여 De officiis〉 등이 있다.

키케로는 BC 44년 3월 15일에 있었던 카이사르 암살 음모에 관여하지 않았고, 카이사르가 살해되었을 때 범행 현장인 원로원에 있지도 않았다.

3월 17일에 그는 원로원에서 일반 사면을 주장하는 연설을 했지만, 그후에는 다시 철학 저술에 몰두했고 아테네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들을 찾아갈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대신 그는 8월말에 로마로 돌아가 BC 44년 9월 2일부터 BC 43년 4월 21일까지 14차례의 필리포스 탄핵 연설(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를 공격한 데모스테네스의 연설을 모방했기 때문에 그렇게 부름)을 통해 힘차게 정계로 복귀했다.

그의 정책은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를 최대한 이용하고, 타협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원로원을 부추겨 안토니우스에 대한 전쟁을 선언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옥타비아누스의 성숙한 지성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고, 카이사르가 죽은 직후 사태를 장악한 안토니우스는 갈리아키살피나 지방에서 암살범을 추적하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가 4월 14일에 갈리아키살피나에서 안토니우스를 무찌른 뒤인 8월에 로마로 행군하여 콘술 자리를 차지할 때까지 몇 개월 동안, 그가 어떻게 키케로를 속였는가를 보여주는 문헌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 젊은이한테는 칭찬과 명예를 주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제거해야 한다"는 키케로의 말을 옥타비아누스가 전해들은 것은 5월이었다. 10월말에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및 레피두스의 삼두정이 성립되었고, 이들은 곧 키케로를 처형하기 위해 그를 찾았다. 키케로는 12월 7일에 카이에타 근처에서 붙잡혀 죽음을 당했다. 그의 머리와 두 손은 로마의 포룸에 있는 연설자들의 연단인 '로스트라' 위에 전시되었다.정치에서 키케로는 정적들을 끊임없이 중상모략했고 동료들의 미덕을 과장했다.

그는 고귀한 조상을 갖지 못한 '신출내기'로서 원로원의 지배집단인 옵티마테스에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BC 53년부터 계속된 정치적 불운을 그는 자기만족에 빠진 옵티마테스의 시기와 나약한 무관심 탓으로 돌렸다. 폼페이우스와 밀접한 정치적 제휴 관계를 맺고 싶어했지만 이런 소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공화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이상을 양보할 각오가 되어 있었고, 〈국가론 De republica〉에서는 공화정이 안정을 확보하려면 강력한 개인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로마 공화정의 본질적인 약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옵티마테스와 포풀라레스).

키케로가 BC 67년부터 BC 43년 7월까지 주고받은 편지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900통이 넘는다.

이 가운데 835통은 키케로가 직접 쓴 것인데, 416통은 친구이자 재정 고문이며 출판업자인 기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나머지 419통은 94명의 친구와 친지 및 친척에게 쓴 것이다. 이것은 키케로가 주고받은 편지 가운데 극히 일부인 것이 분명하다. 고대에 알려져 있던 많은 편지는 지금 남아 있지 않다. 카틸리나의 반란 음모가 담긴 편지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것은 키케로가 BC 63년말에 폼페이우스에게 보낸 편지인 〈술라를 위하여 Pro Sulla〉·〈플랑키오를 위하여 Pro Plancio〉에 언급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소실되었다. 키케로가 죽은 뒤 많은 편지가 정치적 이유로 사라진 것은 분명하다.

오늘날 키케로의 서간집으로는 4가지가 남아 있다. 〈아티쿠스에게 Ad Atticum〉(16권)·〈친구에게 Ad familiares〉(16권), 〈브루투스에게 Ad Brutum〉·〈형제에게 Ad Quintum fratrem〉(3권)가 그것이다.

이 편지들은 고대 세계의 다른 어느 지역에도 존재하지 않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를 담고 있다. 이 편지들이 없었다면 사건의 연대를 정확히 확정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내전에 대한 카이사르의 논평의 정확성을 의심하는 데도 키케로의 편지가 이용되었지만, 여기서는 그리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반면에 사건에 대한 키케로의 보고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객관적이지 않다. 그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잘못 기억할 수도 있고,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일부러 왜곡하여 전달할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키케로는 라틴어 시의 역사에서 사소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다.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시(오늘날에는 단편만 남아 있음)는 〈그의 콘술 지위에 관하여 De consulatu suo〉·〈그의 인생과 시대에 관하여 De temporibus suis〉인데, 이 작품은 자화자찬 때문에 당시에도 비난을 받았다. 키케로의 운문이 중요성을 갖는 것은 그 기법 때문이다. 그는 행 끝에 2, 3개의 음절로 된 낱말을 사용하는 6보격을 세련되게 다듬어 낱말의 자연스러운 억양이 운율의 박자와 일치하게 했고, 수사학을 시에 적용했다. 그는 베르길리우스의 업적을 뒷받침해준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다.

키케로는 정계와 법정에서 웅변가로 명성을 얻었는데, 피고를 변호하러 법정에 나가기를 더 좋아했고, 그의 연설이 갖는 감동적인 호소력 때문에 그것으로 재판이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불행스럽게도 그가 맡은 사건이 모두 도덕적으로 건전하지는 않았다. 그 당시 로마 웅변가들은 '아시아파'와 '아티카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퀸투스 호르텐시우스로 대표되는 아시아파는 화려하고 현란하며 웅장한 문체가 특징이었고, 카이사르와 브루투스 같은 아티카파는 솔직함과 단순함을 특징으로 삼았다. 키케로는 어느 유파에도 속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절충적인 성향을 지닌 로도스의 몰론에게 훈련을 받았으며, 웅변가는 다양한 문체를 마음대로 구사하고 융합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특히 문장이나 절의 마지막에서 청중에게 강한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운율을 면밀히 연구했다. 키케로의 수사법은 복합예술 형태였고, 청중의 귀는 이 효과를 예민하게 감지했다. 그의 연설 가운데 불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까지 포함하면 58개가 지금까지 남아 있고, 약 48개가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키케로는 〈브루투스〉에서 자신이 웅변가로서 갖추고 있는 자질, 즉 철저한 문학지식, 철학에 대한 기초지식, 법률에 관한 전문지식, 역사에 관한 해박한 지식, 상대를 꼼짝 못하게 묶어놓고 배심원을 웃기는 능력, 일반 원칙을 응용하여 특정 사건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 재미있는 여담, 분노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능력, 당장 중요한 요점에서 사고력을 집중하는 능력을 은연중에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결코 부당한 묘사가 아니다. 이런 자질들을 일시적인 수완에서 지속적인 능력으로 바꾸는 것은 연설의 '인간미'이다. 그는 〈무레나를 위하여 Pro Murena〉에서 카토의 평판을 떨어뜨리기 위해 스토아 학파를 조롱할 때 가장 뛰어난 익살을 보여주었으며, 〈카일리오를 위하여 Pro Caelio〉에서 클로디아를 공격할 때 가장 신랄한 해학을 보여준다.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그의 능력은 카틸리나를 공격한 첫번째 연설의 첫 대목에서 볼 수 있으며,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은 〈밀로를 위하여〉의 마지막 장에서 볼 수 있다. 복잡한 살인사건 재판에서 그가 행한 연설인 〈클루엔티오를 위하여 Pro Cluentio〉는 불리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승소로 이끄는 기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실례다. 후에 키케로는 자신이 "배심원들의 눈에 흙먼지를 끼얹어 멋지게 그들을 속였다"고 했다.

키케로는 에피쿠로스 학파인 파이드루스(BC 140~70)와 스토아 학파인 디오도투스(BC 60경 죽음) 및 아카데미 학파인 필로(BC 160~80) 밑에서 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철학의 주류를 이루는 네 학파 중 세 학파에 대해 철저한 기초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아카데미 학파를 자처했지만 이것은 주로 그의 인식론에 적용되어 필연성을 주장하기보다는 개연성에 이끌렸고 이런 식으로 자기 저술의 모순을 정당화했다. 그는 윤리학에서는 좀더 독단론으로 기우는 경향을 보였고, 스토아 학파에 매력을 느꼈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보다는 소크라테스로부터 자기 논리의 근거를 찾았다. 그는 종교에서는 거의 평생 동안 불가지론자였지만, 엘레우시스를 처음 방문했을 때와 BC 45년에 딸이 죽었을 때는 심오한 종교적 체험을 했다. 그는 대개 일신론자로서 글을 썼지만 그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종교적 열정은 〈공화정에 관하여〉의 마지막에 나오는 〈스키피오의 꿈 Somnium Scipionis〉뿐이다.

키케로는 BC 54년경까지는 철학에 대해 진지하게 글을 쓰지 않았다.

BC 54년에 불안한 정치적 휴전기가 시작되자, 〈국가론〉에 이어 BC 52년 〈법률에 관하여〉를 쓰기 시작한 것 같다. 이 글들은 그리스 정치사의 관점에서 로마 역사를 해석하려는 시도였다. 그의 철학 저술은 대부분 BC 45년 2월부터 BC 44년 11월까지 쓴 것이다. 저술의 방대함과 주제의 광범위함은 놀랄 정도였다. 이 시기에 그가 쓴 글은 다음과 같다. 지금은 소실된 〈위안에 관하여 De consolatione〉는 딸의 죽음에 자극을 받아 쓴 글이다.

철학 공부를 권장한 〈호르텐시우스 Hortensius〉는 나중에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개종에 이바지했다. 내용이 어려운 〈아카데미 학파 철학 Academica〉은 판단 보류를 옹호하고 있다. 그밖에도 그는 〈최고선에 관하여〉(최고선은 쾌락이냐, 미덕이냐, 아니면 그보다 좀더 복잡한 것이냐?)·〈도덕적 의무에 관하여〉를 썼다. 〈도덕적 의무에 관하여〉의 마지막 권을 제외하면, 키케로는 어떤 저술에 대해서도 독창성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책들은 남의 생각을 베낀 사본이다.

나는 거기에 낱말을 공급했을 뿐이다. 나는 낱말을 많이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 로마에 일종의 철학백과사전을 제공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그는 스토아 학파와 아카데미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및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소요학파)의 저서에서 자료를 얻었다. 그가 사용한 형식은 대화체였지만, 그가 본보기로 삼은 사람은 플라톤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헤라클레이데스 폰티코스였다. 철학사에서 키케로는 그리스 사상의 전달자로서 중요성을 갖는다.

이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는 로마와 유럽에 철학적 어휘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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