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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022경, 코르도바 칼리프 통치구역 말라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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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070경, 발렌시아 발렌시아 |
국적 | 유대 |
요약
유대인 시인·철학자.
(아). Abū Ayyūb Sulaymān ibn Yaḥyā ibn Gabirūt. (라). Avicebron/Avencebrol. 정식 이름은 Solomon ben Yehuda ibn Gabirol.
무어인 지배하의 스페인에서 유대의 황금기 동안 활동한 종교적·세속적 히브리 시파의 뛰어난 인물이었다.
또한 중요한 신플라톤주의 철학자이다.
1022년경 말라가에서 태어나 사라고사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다. 그곳에서 코르도바 출신의 망명자들로 이루어진 학식있는 소집단에 가담했는데, 그 집단은 유명한 학자들과 영향력있는 궁정 대신인 예쿠티엘 이븐 하산이 중심이 되어 만들었다.
이븐 가비롤은 나중에 자신의 아름다운 시구 속에서 불멸의 존재로 만든 이 후원자의 보호 아래서, 16세의 나이에 능숙한 히브리어로 종교적인 송가를 지어 유명해졌다. 안달루시아 문학의 관습 언어는 아랍어였으며 히브리어가 유대 시의 표현 수단으로 쓰인 것은 얼마 안 된 때였다. 16세의 이븐 가비롤은 세계적인 명성을 뽐낼 만했다. "……나의 노래는 왕들을 위한 왕관이요/지배자의 머리 위에서 빛나는 면류관이니./내 몸은 땅 위를 걷지만/내 머리는 구름 위로 오른다./나를 보라. 열여섯 나이에 내 마음은/여든 살의 노인처럼 지혜롭도다."
그러나 이븐 가비롤은 그라나다 베르베르 왕국의 떠오르는 유대 정치가이자 대신인 사무엘 하 나기드를 풍자하는 실수를 범했다.
사무엘 하 나기드 는 재능있는 시인이었으며, 〈탈무드〉 연구가, 전략가, 모범적인 문필가였다. 그러나 이븐 가비롤은 그후 시를 통해 사과함으로써 오히려 이 대신의 호감을 산 듯하다. 곧이어 그는 사무엘 하 나기드의 궁전에 드나드는 주요예찬가가 되었다. 이 일은 이븐 가비롤이 히브리 언어학을 둘러싸고 사라고사 문법학자들과 그라나다 문법학자 사이에서 벌어진 평형을 잃은 싸움에서 그의 시가 사라고사 편에 개입하면서 일어났다.
해방된 코르도바 사람인 그는 아이가 없는 것을 찬양하고 '세계'를 비난하며 신플라톤주의를 받아들이고 거의 미친 사람처럼 스스로를 과장하는(이와 함께 반대자들에게는 동물 이름을 별명으로 사용함) 이단적인 방법으로 정통을 공격했다. 이븐 가비롤은 사라고사에서 도망쳐야만 했다. 그는 〈다툼의 노래 Song of Strife〉라는 시에서 자신이 떠나야만했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비뚤어지고 멍청한 녀석들 틈바구니에서/오직 그(시인)의 마음만이 지혜롭도다./어떤 놈은 독사의 독으로 그대를 녹이려 들고/다른 놈은 입에 발린 말로 그대의 머리를 휘저으려 한다./머리 속에서 그대에게 올가미를 쳐놓고 있는 녀석이/그대에게 말한다 '제발, 주인님'이라고./그 애비들이 내 양을 지키는 개들만큼이나/멸시를 받아야 할 인간이……"
〈다툼의 노래〉와 다른 시들은 그가 유대 시인이라는 사실이 같은 종교를 지닌 사라고사 지방 사람들의 증오를 막아주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이들은 이븐 가비롤이 세속적인 교육을 받았다는 이유로 그를 그리스인이라고 불렀다. 후원자 예쿠티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븐 가비롤은 신플라톤주의 철학에 관심을 집중했다. 이에 앞서 그는 아랍어로 된 잠언집 〈진주의 선택 Mukhtār al-jawāhir〉을 썼고, 비록 고루하지만 매우 독창적인 것으로 인간 기질에 대한 당시 이론에 바탕을 둔 윤리학 연구서 〈도덕적 성질의 개선 Kitāb iṣlāḥ al-akhlāq〉을 역시 아랍어로 썼다.
〈도덕적 성질의 개선〉에는 시각과 관련된 자존심·온화함·겸손·경솔 등과 청각 및 다른 감각과 관련된 사랑·증오·동정·냉혹함 등을 다루는 장들이 있다.
왕을 죽이고 권력을 빼앗은 사람들이 1039년에 예쿠티엘을 추방하자 새로운 후원자를 찾을 필요가 생긴 이븐 가비롤은 사무엘 하 나기드의 도움으로 궁정시인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라나다의 지도적 정치가가 된 하 나기드는 시인의 권위가 필요했다. 이븐 가비롤은 사무엘과 나중에 그라나다의 대신직을 승계한 그의 아들 헤호세프(유수프)를 위해 메시아적 색채를 띤 유명한 시들을 지었다.
이븐 가비롤에 대한 그밖의 전기 자료들은 그가 발렌시아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빼고는 모두 그의 시를 통해 추측할 수밖에 없다.
시
무어인 지배하의 안달루시아(남부 스페인)에서 유대 문화는 아랍 귀족들의 문화적 압박으로부터 탄생했다. 이븐 가비롤이 받은 이중 교육은 대도시의 유대 지식인들에게는 전형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성서, 〈탈무드〉, 기타 랍비의 저술들과 특히 히브리 언어학 등 히브리의 문학 전통 전체와 〈코란〉을 포함하여 아랍의 세속적·종교적 시와 시학, 철학·문헌학 및 의학 문헌들을 섭렵해야 했다.
이븐 가비롤의 시는 당시 히브리 시파 전체의 시가 그렇듯이 아랍의 시를 본뜬 것이었다. 시작법(詩作法), 리듬 체계, 그리고 고도로 발달한 상상의 대부분은 아랍 학파를 추종한 것이었으나, 성서에서 따온 언어가 특별한 색조를 더해주었다. 그의 시 중 많은 것이 아랍의 귀족 시인 알 무타나비와 염세주의자 아부 알 알라 알 마아리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븐 가비롤 시의 세속적 주제에는 아랍 정신의 과장된 자기 칭찬이 들어있는데, 어렸을 때의 천재성이 이를 정당화하는 구실을 했다. 그밖의 주제로는 사랑의 시(단호하지만 매우 섬세한 시), 자신을 옹호하는 고상하고 학식있는 사람은 치켜세우고 다른 사람은 신랄하게 풍자하여 끌어내리는 시, 애도시(이중 가장 감동적인 것은 무고하게 추방된 예쿠티엘과 관련된 것임), 술에 대한 시(때로 방탕한 시), 봄과 비를 노래한 시, 꽃을 묘사한 시. 피부병을 고통스러울 만큼 사실적으로 묘사한 시, 히브리 문법에 대한 교훈적인 장시 등이 있다. 이븐 가비롤이 성(城)에 대해 길게 묘사해놓은 시 덕분에 헤호세프가 세운 최초의 알람브라 궁전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의 시를 모은 책은 남아 있지 않지만, 매우 풍부한 시작 활동 때문에 약 200편의 세속시와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종교시가 보존되었다. 세속시 원고의 단편 중 많은 부분은 히브리 문자를 존중하는 동료 종교인들에 의해 유대 교회당 다락방에 보관되어 있다가 최근에 와서야 빛을 보았다. 그의 종교시 중 많은 것은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교 기도 책자들 안에 들어 있다.
그의 종교시, 특히 개인을 위해 쓴 예리한 짧은 기도시들은 무어인의 지배를 받고 있던 스페인의 일반적인 높은 교양 수준을 전제하고 있으며 아랍적인 색조를 보여주고 있다. 운율을 지닌 유명한 산문시 〈왕국의 왕관 Keter malkhut〉은 우주 영역의 광대함에 대한 명상을 담고 있다. 이 시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왜소함에 대해 비참한 느낌을 갖게 하지만, 뒤이어 신의 은총을 선언함으로써 독자의 희망을 북돋운다.
다음의 아침 명상은 그의 종교시가 지니는 모습을 보여준다. "새벽녘에 나를 보라, 나의 바위여./곤궁에 처한 나의 피난처여./밤에 그랬던 것처럼/그대의 얼굴 앞에서 다시 말하노라./고통에 찬 상념을 쏟아부으며/그대가 나의 마음을 뚫어보고 있다는 것/그리고 내가 무얼 생각하는가를/나는 두려움 속에서 깨닫는다./내 마음과 내 입술이 그대에게/보내는 것이 비록 하찮을지라도/(나의 영혼이 제 힘으로 대체 무얼 할 수 있겠는가?)/우리가 그대 앞에서 부르는 찬송을 그대여/가득히 받아들여주오. 그래서/그대가 나의 숨을 북돋워주면/나는 그대를 그대의 고귀함으로 찬양할지니./아멘."
철학
5편의 논문으로 이루어진 이븐 가비롤의 〈생명의 샘〉은 아비케브론 또는 아벤케브롤이라는 저자명이 붙은 라틴어 번역본 〈Fons vitae〉만 남아 있다. 살로몬 문크는 1846년 이 책이 이븐 가비롤의 작품임을 밝혀냈다. 이 책은 레온 헤브레오(유다 아브라바넬)와 바루흐 데 스피노자 이외에는 다른 유대 철학자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유대 비교 신비주의의 추종자들인 카발라주의자에게 영감을 주었다. 또 개념과 실재를 동일시한다고 해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 책은 그리스도교 스콜라주의에 뚜렷한 영향을 미쳤다.
플로티노스 등 신플라톤주의작가들 및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형이상학에 기반을 두고 이븐 가비롤은 필론의 로고스(또는 신의 '말씀')와 비슷한 신의 의지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하나의 이론체계를 발전시켰다. 초월적인 신성과 신이 무(창조를 위한 잠재성으로 이해됨)로부터 창조한 우주 사이를 이어주는 것은 해와 햇빛처럼 상호관계하는 신의 창조력 및 신과 함께 하는 창조력의 본질적 통일이다. 물질은 근원 물질인 신성으로부터 직접 흘러나오는데, 이 근원 물질은 '지성적' 실체, 곧 천체를 움직이는 신령이나 천사들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실체의 기반이 된다.
스콜라주의의 프란체스코 학파는 이러한 개념을 받아들였지만, 물질이 아니라 형상(다수가 아니라 하나인 형상)이 창조의 원리라고 본 성 토마스를 비롯한 도미니쿠스 학파는 이를 거부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로티노스에 의하면 물질은 '형상을 갖기를 열망하며' 그래서 신 가까이로 움직여감으로써 천체를 회전하게 한다. 그런 까닭에 가장 높은 천체의 가장 미세한 물질은 가장 강력한 '열망'으로 움직인다. 이 열망은 신에게서 나온 것이면서 신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이고 인간 속에서 활동하는 것이다(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마지막 구절처럼 '사랑은 태양과 다른 별들을 움직인다'). 그러나 이 메마른 철학 연구가 신플라톤주의자인 이븐 가비롤의 열정적인 탐구를 배반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사랑은'으로 시작하는 한 편의 철학 시는 인간적 관심을 드러낸다. 이 시에서 제자는 철학자이자 시인인 선생에게 세계가 신성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의미가 무엇이냐고(이때의 신성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용어로, 곧 자신의 완전성을 사유할 뿐인 신성이라는 의미로 이해됨) 묻는다. 시인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형상을 지니려는 물질의 열망을 갖고 있다고 대답한다. 나아가 시인은 이 열망은 성서에서 가르치듯이 하늘이 선포한 '영광'을 신에게 돌릴 수 있다고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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