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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네스토리우스 교파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독립성을 강조하여 그리스도의 두 본성은 결합된 2개의 인격이라고 주장했다. '동방의 교회' 또는 '페르시아 교회'가 대표적인 네스토리우스 교파이다. 현재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은 대부분 이라크·시리아·이란에 살고 있다. 페르시아 교회는 486년에 네스토리우스파 신학의 주요권위자인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를 올바른 신앙의 수호자로 인정했고, 그때부터 페르시아 교회는 네스토리우스 교파가 되었다. 네스토리우스교는 인도·중국·이집트·몽골·이란 등에 전파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재결합한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은 칼데아교도라 했으며, 원래의 네스토리우스교도는 아시리아교도라고 했다. 1898년 이란의 우르미아에서는 일단의 네스토리우스교도가 러시아 정교회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독립성을 강조하여 그리스도의 두 본성은 느슨하게 결합된 2개의 인격이라고 주장했다.
오늘날에는 '동방의 교회' 또는 '페르시아 교회'가 대표적인 네스토리우스 교파이며, 서양에서는 흔히 이들을 아시리아교도, 또는 네스토리우스교도라고 부른다. 오늘날 약 17만 명에 이르는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은 대부분 이라크, 시리아 및 이란에 살고 있다.
페르시아 교회가 424년에 다른 지역의 그리스도교 교파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여, 외국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혹에서 벗어날 때까지 페르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끊임없는 박해를 받아왔다. 페르시아 교회는 니시비스의 수도대주교 바르수마스의 영향을 받아, 486년 2월에 네스토리우스파 신학의 주요권위자인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를 올바른 신앙의 수호자로 인정했다.
바바이 총대주교(497~502)는 이것을 재확인했고, 그때부터 페르시아 교회는 네스토리우스 교파가 되었다(이란 종교).
네스토리우스는 성모 마리아에게 테오토코스('신을 낳은 사람')라는 칭호를 붙이면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을 손상시키게 된다고 주장하면서 그 칭호 사용을 비난했기 때문에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파문당했다.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에데사(그리스 마케도니아 지방의 도시) 신학교에 모이자, 황제는 489년에 그 신학교를 폐쇄했고, 남아 있던 열렬한 네스토리우스 신봉자들은 페르시아로 옮겨갔다.
그뒤 에데사의 유서깊은 전통을 이어받은 니시비스의 새 학교가 페르시아 교회의 지적 중심지가 되었다.
5세기말에 이르러서 페르시아에는 7개의 대주교 관구가 생겼고, 아라비아와 인도에도 여러 개의 주교 관구가 설치되었다. 페르시아 교회는 분열(521경~537/539경)과 박해(540~545)의 시기를, 조로아스터교에서 개종한 마르 아바 1세 총대주교(540~552 재임)의 지도와 니시비스 근처 이잘라 산에 수도원을 세운 카슈카르의 아브라함(501~586)이 일으킨 수도원 부흥을 통하여 잘 견뎌냈다.
637년에 아랍인이 페르시아를 정복한 뒤 아랍의 통치자인 칼리프들은 동방의 교회를 밀레트, 즉 독립된 종교 단체로 인정하고 법적으로 보호해주었다.
네스토리우스파 학자들은 아랍 문화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총대주교는 때로 통치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약 3세기 동안 페르시아 교회는 칼리프의 보호를 받으며 번영을 누렸지만, 차츰 세속에 물들면서 문화적인 면에서도 지도력을 잃어버렸다. 10세기말에는 칼리프가 지배하는 지역에 15개의 수도대주교 관구가 있었고, 인도와 중국을 비롯한 해외에도 5개의 대주교 관구가 있었다.
네스토리우스교는 이집트까지 퍼졌다. 그곳의 그리스도교 교파는 단성론자(單性論者)들로서 그리스도의 1가지 본성만을 인정했다. 중국에서는 7~10세기에 네스토리우스 교단이 번창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일부 타타르 부족이 거의 완전히 개종하여 그리스도교는 시베리아 동부의 바이칼 호 근처까지 퍼졌다. 몽골 영토를 여행한 서양인들은 그곳에 있는 네스토리우스 교회의 성직자들이 무식하고 미신적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이 상당히 많고, 심지어는 황제의 궁전에도 있는 것을 발견했다.
14세기에 터키 지도자 티무르의 기습으로 동방의 교회가 사실상 전멸하자 네스토리우스 교단은 메소포타미아 지역, 특히 티그리스 강과 반 호 및 우르미아 호 사이의 쿠르디스탄 지역 몇몇 마을에 남아서 겨우 명맥을 유지했고 일부는 터키와 페르시아로 들어가기도 했다.
일부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은 1551년에 로마 가톨릭 교회와 재결합하여 칼데아교도라고 하게 되었고, 원래의 네스토리우스교도는 아시리아교도라고 했다.
토마의 그리스도교로 알려진 일부 인도의 네스토리우스교파는 1599년에 로마 가톨릭과 합쳤다가 다시 분열했고, 이들의 절반은 시리아 야코부스파 안티오크 총대주교(단성론자)에게 충성을 바쳤다(1653). 1898년 이란의 우르미아에서는 한 주교가 이끄는 일단의 네스토리우스교도가 러시아 정교회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칼데아 가톨릭 교회, 토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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