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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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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예술이란 인간의 활동 가운데 사물의 창조 등의 특수한 활동을 지시하며, 미는 진·선과 더불어 인간이 추구하는 많은 가치 가운데 하나이다.
미학이라는 학문은, 미가 진이나 선과 구별되며 예술은 과학이나 도덕과 구별되는 고유한 가치의 활동으로서 하나의 독립된 영역을 이루고 있다는 가정 하에 성립된 근대적 사고의 소산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미는 일의적인 것이 아니며, '예술'이라는 말과 그 말이 대변하는 체제는 18세기에 와서 확립되었지만 미학이론을 구성하고 있는 미학사상들의 소산은 고대에도 있었다. 형식상 새로운 것일 뿐 미학이론의 쟁점들은 모두 고대로부터 전승된 것들이다.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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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란 인간이 수행하는 많은 활동 가운데 사물의 창조와 같은 특수한 활동을 지시하는 개념이며, 미는 진·선과 더불어 인간이 추구하는 많은 가치 가운데 하나를 지시하는 개념이다. 여기서 미학이라는 학문은, 미가 진이나 선과 구별되며 예술은 과학이나 도덕과 구별되는 고유한 가치의 활동으로서 하나의 독립된 영역을 이루고 있다는 가정하에 성립된 근대적 사고의 소산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미는 일의적인 것이 아니며, '예술'이라는 말과 그 말이 대변하는 체제는 18세기에 와서 확립되었다. 예술로 번역해서 쓰고 있는 영어의 'fine arts'가 프랑스어인 'beaux-arts'를 번역한 말임을 고려할 때 예술은 'beauty'와 'arts'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합성어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은 사실은 18세기 이전에는 '예술'이라는 말도 없었을 뿐더러, 현재 그 말로 부르는 인간의 활동(시·음악·회화·조각·건축 등)과 미와의 관계가 그다지 긴밀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고전적 고대로부터 18세기 전까지는 미의 개념에 관련하여 위의 활동이 언급되는 경우가 있더라도 미가 예술만을 통해서 실현되는 가치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18세기 전까지는 하나의 독립된 영역을 다루는 형식적 교과로서 미학이라는 별도의 학문이 성립할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근대적 형태의 미학이론은 없었지만 그러나 미학이론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미학사상들, 곧 미와 나중에 예술이라 부르게 된 활동과 그 소산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고대에도 있었다. 형식상 새로운 것일 뿐 미학이론의 쟁점들은 모두 고대로부터 전승된 것들이다.

미와 미론의 역사적 문맥

미는 우리 마음에 즐거움과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서, 이 말을 가리키는 고대 그리스어에는 명사 'kallos'(로마어로는 'pulchritudo')와 형용사 'kalos'(로마어로는 'pulcher')가 있다.

미의 추상적 성질을 지시하고자 할 때는 전자를 사용했고, 개별적인 아름다운 사물을 지시하고자 할 때는 형용사의 명사형인 'to kalon'(the beautiful)을 사용했다.

이와 같은 미의 개념은 현대 서구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넓은 의미였다. 고대인들은 아름다운 사물이나 아름다운 색, 아름다운 음만이 아니라 아름다운 사고나 아름다운 제도라는 말을 썼으며, 플라톤은 미의 사례들로서 아름다운 성격이나 아름다운 법, 그리고 〈향연〉편에서는 미의 이념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또한 플로티노스는 아름다운 과학, 아름다운 덕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고대인들은 시각과 청각에 국한되는 좁은 의미의 미의 개념을 지니고 있지 않았으며, 청각적인 미에 해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화음(harmonia), 시각적인 미에 해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례(symmetria)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처럼 감각적인 대상들 속에 구현된 화음이나 비례는 오늘날 좁은 의미의 미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미의 개념이 최초로 제기된 것은 피타고라스의 음악론을 통해서였으며, 이 음악론은 건축·조각·회화에 영향을 미쳐 그들이 준수해야 할 규범(kanon)의 하나로서 완전한 비례의 이론을 낳게 했다. 그러나 지각에 대한 사유의 우월성이 신봉되고 있고, 사유와 지각과의 밀접한 관계가 인정되고 있는 중에 시각·지각만이 그러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으므로 미의 개념을 감각적인 것에 국한시키고자 했을 때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각·지각에 기초하여 미의 개념을 정립했다.

따라서 미는 수와 척도와 비례에 있다는 이론을 발전시키게 되었고, 이것이 모든 미이론의 기초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W. 타타르키예비치는 이것을 서구미학의 대이론(great theory of beauty)이라 규정짓고 있다.

이 이론은 미의 이성적 본질, 형이상학적 기초, 객관성 및 가치 등에 관련되면서 많은 명제들을 낳고 있다. 참된 미는 감각이나 상상이 아니라 이성 혹은 마음에 의해 파악된다는 미의 이성적 본질에 대한 주장은 비례에 기초한 미의 개념과 아주 자연스럽게 결합되는 것이어서, '미는 곧 진'이라는 명제를 표방했던 르네상스를 통해 아주 강력히 옹호되어왔다.

미의 형이상학적 기초란 피타고라스에게는 수적 본질의 우주론, 플라톤에게는 이원론적 이데아론이었으며, 플로티노스에게는 일원론적 일자론이었고, 중세를 통해서는 신학이론이었다. 이와같은 형이상학적 기초의 차이에 따라 이념으로서 완전한 정신적인 미와 불완전한 감각적 미를 구분하게 되었고, 여기서 후자는 전자의 모방이라는 플라톤의 모방설과 후자는 전자의 유출이라는 플로티노스의 유출설이 제기되었다.

플로티노스의 사상은 그대로 중세의 미론으로 이어지면서 미는 비례뿐 아니라 빛에 있다는 이론이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유출설은 비례를 미의 한 요소로 상대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것은 대이론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완하고 제한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러한 논의가 대두되고 있는 중이라 해도 같은 시기를 통해 비례의 이론은 여전히 고수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미의 객관성에 관한 주장이란 미가 아름다운 사물들의 객관적 성질, 즉 비례에 있다는 주장으로서 이것은 고대의 소피스트들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라는 객관주의적 사고는 미로부터 일체의 상대성의 요소를 배제하고 있다. 이밖에도 고전적인 대이론은 그것 자체가 또한 여러 형태로 발전해왔다. 예컨대 다양의 통일이나 완전성·적합성으로 변형되기도 했고, 내용으로서의 이념과 형식으로서의 비례가 결합되는 형태로 발전되면서 후대의 미학이론에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객관적인 미의 개념으로부터 18세기에 이르러 미란 비례와 같은 객관적 성질을 지시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난 하나의 관념"(F. 허치슨)을 지시하는 말이라는 의미로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 일어났다. 즉 미란 불을 쬘 때 불과는 유사함이 없는 따스함의 관념을 얻는 것처럼 비례와 같은 형식적 성질을 지각할 때 그에 반응해서 일어나는 즐거움의 관념을 말한다.

이와 같은 미의 개념 전환은 존 로크의 영향을 받은 18세기의 사상가들, 예컨대 J. 애디슨 등이 신고전주의를 통해 옹호된 것과는 다른 취미와 경험을 근거로 미의 문제를 경험주의 철학방식으로 접근한 결과로서, 이러한 미학적 작업에 참여한 사상가들은 18세기를 통해 계속 나타났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애디슨을 포함하여 허치슨, D. 흄, E. 버크, A. 제러드, H. 홈, A. 앨리슨 등이 있다. 이들의 미학적 작업의 두드러진 특징은 미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 마음속에 활기 띤 즐거움이 객관적 미의 개념에 있어서처럼 수반되는 성질이 아니라 정의적인 성질로 전환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새로운 개념 역시 한편에서는 여전히 객관적인 대상의 형식적 요소를 수용하고 있는 점에서 전통적 주장을 답습하고는 있으나 이제 그것은 미의 관념, 곧 주관적인 즐거움을 구성하는 한 요소일 뿐 미 자체는 아니게 되었다.

이 경우 미의 경험은 대상으로부터 그러한 미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상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내적 감관으로서의 취미(taste)라는 새로운 개념이 미학사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모든 즐거움이 미일 수는 없다. 바로 이 점에서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인 샤프츠버리가 제기한 무관심성(disinterestedness)의 개념을 경험주의 입장에서 재해석하여, 미의 즐거움은 대상의 유용성이나 감각적 성질처럼 어떤 관심과 결부되지 않은 채 순전히 형식에 대해 반응하는 취미에 의해 환기되는 것이기에, 그것은 '이해가 동기되어 있지 않은' 순수한 무관심적 심리상태에서 갖게 되는 즐거움이라는 특징이 부여되고 있다.

더 나아가 여기서 무관심적 심리상태에 처해 있기만 하면 형식적 성질인 비례와는 거리가 먼 대상의 성질들, 오히려 통제하고 측량하기 힘든 거대한 힘을 지닌 대상으로부터도 역시 어떤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그결과 숭고한 것(the sublime), 풍려한 것(the picturesque)과 같은 새로운 미적 범주가 등장하게 되었다. 버크의 숭고론은 그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새로운 논의는 주관적으로 전의된 전통적인 미의 개념을 또한 상대화함으로써 그것을 퇴조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 사실은 BC 5세기경부터 18세기까지 2,300여 년 동안의 미 개념으로부터의 일탈을 뜻한다.

이러한 경향은 마침내 이론의 체계에도 심각한 변화를 초래하여 전통적으로 객관주의적이었던 미의 대이론은 새로운 취미론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것은 이론 역시 '주관화한' 방향으로 선회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미가 이처럼 미적 가치범주의 하나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식으로 미학이론이 발전되었다면 이는 이제 미학이론의 축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미와 함께 숭고·풍려 등과 같은 여러 즐거움을 묶는 통합적 개념이 필요해졌다. 미의 즐거움이나 숭고의 즐거움이 모두 취미라는 내적 기관에 의해 환기되는 무관심적 즐거움의 한 방식들로 정당화한 것이고 보면, 새로운 미학이론의 초석은 차라리 그러한 무관심적 즐거움의 경험에 놓이게 되지 않을까? J. 스톨니츠에 의하면 영국의 취미론자들이 이러한 경험에 비록 '미적'(aesthetic)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예술이나 자연에 대한 그들의 미학적 논의는 바로 이 미적 경험의 개념을 암암리에 상정하고 전개한 것이라 한다.

여기서 샤프츠버리가 제기했으나 그후 충분한 설명이 주어지지 않은 채 취미론자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기만 했던 무관심적 심리상태에 대한 사고는 I. 칸트에 의해 해명·확립됨으로써 이른바 미적 태도라는 개념이 대두하여 발전하게 되었다. 즉 F. 실러의 유희론에서 '미적 가상'에 대한 '미적 상태'의 사고, A. 쇼펜하우어의 플라톤적 이념에 대한 '미적 관조' 등의 사고를 거쳐 '미적 태도'라는 현대적 개념이 성립했다.

그러한 무관심적-미적 태도를 취한다면 취미론처럼 대상의 특정한 성질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것이 미적인 만족을 환기하는 미적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미적 태도론의 기본입장이다.

20세기에 크게 유행한 미적 태도론은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고전적 고대의 미의 대이론은 18세기 취미론으로, 취미론의 기본구조는 그것을 예술에 적용한 C. 벨이나 I.A. 리처즈 등의 형식주의적 예술론에 의해 계승되고 있지만 칸트를 분수령으로 해서 미적 태도론으로 대체되어 그 기본구조가 완전히 와해되고 말았다.

E. 벌로프의 '심적 거리', 스톨니츠의 '미적인 주목', V.C. 올드리치의 '미적 지각' 등은 여러 형태로 발전된 미적 태도론의 기본개념이 되고 있다.

시와 회화

개요

이와같이 전통적인 객관적인 미가 주관적인 것으로 전의되고, 숭고 등 다른 미적 가치의 대두로 상대화하면서 미의 대이론은 서서히 퇴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한 퇴조를 몰고온 18세기의 취미론조차도 취미의 기준으로서 객관적 미의 공식을 찾으려는 기도가 여전히 주된 관심사였다. P. 나이트나 D. 스튜어트 등이 미의 개념을 분석하여 이러한 작업이 무익하며, 동시에 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판명할 때까지 '미'는 서구 미학사를 통해 가장 중요한 논의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20세기 현대에 이르러 '미'는 미학적 논의에서 사라졌거나, 기껏해야 동일 문맥의 미적 경험에 대한 논의 속의 한 요소로 해소되어버렸고, 대신 예술이 주된 관심사로 대두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미적 경험은 예술을 통해서만 획득되는 것이 아니며 자연을 통해서나 인간에게서도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경향이 짙어졌다. 이것은 개념적으로 미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 간에 근본적인 구별이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 구별은 단순히 두 개념의 외연이 아니라 내포의 차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본래 '미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세계에 대해 어떻게 지각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취하는 어떤 태도의 특성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고, '예술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무엇을 창조(그것이 제작이든 표현이든)한다 할 때 그 창조활동의 특성을 지적하기 위한 말이다. 따라서 '미적 경험'이라든가 '예술적 창조'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도 경험의 일환이라 생각하여 창조적 경험이라는 말을 할 수도 있지만 그 경우 원칙적으로는 창조를 위한 전 단계의 예술가의 경험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서구 미학사상의 초기단계에서 미론과 예술론의 문맥이 각기 달리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에 연유한다.

즉 미적 경험은 미론의 문맥이고, 예술은 창조론(영감론이든 제작의 일환으로서 모방론이든)의 문맥에 속한다. 두 이론이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많은 이론을 낳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근대 이후 서구 미학이론의 특징이지 애초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는 예술이 주된 관심사이지만 고대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는 미가 주된 관심사였다. 그러므로 미를 논할 때 예술이라 할 것이 거론되는 경우가 있다 해도 그것은 지극히 지엽적이거나, 그나마도 부정적인 입장에서였다.

그렇다면 고대를 통해서 예술이라 할 것들은 어떻게 이해되었을까? 예술이란 말과 그 근대적 체계가 없었음은 이미 언급한 바이다. 그렇다면 서구 근대인들이 예술이라 부른 활동을 고대인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애초에는 없었던 말과 체제가 성립되었다면 그것이 성립되는 과정을 알아보는 것은 서구 미학사상의 발전의 중요한 문맥을 파악하는 일이 된다.

영감으로서의 시·음악·춤

발생 초기에 ·음악·은 상호 미분화된 활동이었다.

이처럼 말(시)과 리듬(음악)과 동작(춤)이 미분화된 채 통합된 인간활동의 특수한 형태를 고대 그리스인들은 '코레이아'(choreia)라 불렀다. 이 말은 현재 합창을 뜻하는 'chorus'에서 파생된 것으로 당시에는 군무를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코레이아란 특히 춤과 깊이 관련된 말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것은 고대 원시종교 형태인 제의의 일환인 축제와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인간활동의 형태이다.

제의가 신의 메시지를 기구하는 행사라면 축제는 그러한 기구를 촉진하기 위해 수반되는 행사이다. 이처럼 제의와 축제가 서로 분리되지 않은 채 진행된 것이 초기에는 인간 삶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따라서 제의는 오늘날의 입장에서 볼 때 종교적 측면과 예술적 측면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H. 쿤은 "축제는 예술의 모태"라고 말한 바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종교행사에서 사제가 신의 메시지를 기구하기 위해 신과 교감하는 신적인 상태가 되는 것을 엔토우시아스모스(enthousiasmos)라 했다.

이 말이 오늘날 영어 'enthusiasm'의 어원이 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신적인 상태란 열광적인 상태, 즉 제정신이 아닌 상태를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대 미학사상에서 이같은 사실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까닭은 종교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이 말이 예술현상이라 할 코레이아를 설명하는 데에도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코레이아가 동일한 종교행사의 일환으로서 참여되고 있다는 사실에서뿐 아니라 사제로부터 신의 메시지를 전달받기 위해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 역시 사제와 같이 신에 열광된 상태에 빠져야 하며, 코레이아는 그러한 상태를 촉진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암시해준다.

이러한 엔토우시아스모스가 춤과 음악, 미분화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시의 발생에 적용될 때 '시적 정열'이 되기도 했고 라틴어 'inspirare'로 번역되면서 영어의 '시적 영감'이라는 말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시적 영감은 어떠한 의미로 고대 미학사상에 수용되었을까? 플라톤에 의하면 시인이 된다는 것은 시인 외부의 어떤 신적인 존재, 즉 뮤즈 여신에 게 사로잡힌 상태임을 뜻한다.

이것은 시인이 뮤즈에 홀렸음을 뜻하는 것이며 정신이 나간 일종의 광기(mania)의 상태임을 뜻한다. 시인에 대한 플라톤의 이같은 설명은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에게서도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그 이전부터 내려온 오래된 사고로서 플라톤 역시 이성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비밀스러운 요소가 개입되고 있음을 인식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원 때문에 시에 대한 플라톤의 평가는 긍정적이거나 호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플라톤은 시에 지식의 자격을 부여할 수 없다는 인식론적 입장과 아울러 순전히 이성에 의해 인도되어야 할 젊은이에게 격정을 불러일으켜 그들의 영혼을 타락시킨다는 윤리적 입장에서 시인추방론을 역설하게 되었다.

이처럼 시인과 시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플라톤의 태도를 두고 그가 시적 창조와 경험을 너무 천박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가 시의 창조를 영감에 결부시키고자 했던 것은 시의 창조가 이성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어떤 특별한 힘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시가 지니는 불가항력적인 힘, 곧 시의 매력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플라톤이 시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피력하게 된 것은 시의 발생과 그 경험이 그러한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찬미될 수는 없다는 시대적·사회적 요구 때문이었다.

반대로 이러한 요구 때문에 플라톤이 비난하게 된 바로 그러한 시를 찬미하게 된 낭만주의 철학자들의 평가태도는 플라톤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 점에서 플라톤의 시적 영감론은 오랜 세월을 거친 후 19세기 낭만주의에 이르러 상상과 무의식의 입장에서 다시 그 현대적 형태로 부활하고 있다.

모방으로서의 회화·조각

시가 영감의 개념에 관련되어 이해되었던 데 반해 회화조각은 고대 그리스적인 의미의 '테크네'(techne)라는 개념에 관련되어 이해되었다.

테크네란 동물과는 다른 인간의 한 특징을 이루는 기억에 의해 인간이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것을 만들면서 경험을 쌓고, 그렇게 경험을 쌓는 중에 그것이 지성에 의해 조명됨으로써 그로부터 유도되는 일단의 규칙체계에 기초한 기술(craft)을 뜻하는 말이다. 이러한 의미의 테크네가 라틴어 'ars'에서 영어 'art'가 되었지만 본래의 테크네는 오늘날 예술이라고 불리는 회화·조각·건축과 같은 활동뿐 아니라 제약·농업과 같은 과학, 목공·제화·요리와 같은 단순한 기능(technique)에 적용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제작(making)은 실천(doing)과 함께 테크네의 일환이 되고 있다.

플라톤은 이러한 테크네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분류했는데, 미학적 논의에 관련되는 것으로서는 〈소피스트〉편에 나오는 것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제작기술은 실물을 제작하는 기술과 실물의 이미지를 제작하는 기술, 달리 말해 실물을 모방하는 기술로 분류되어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 당연히 예술이라는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건축은 전자에 속하며, 회화나 조각은 후자인 모방에 속하고 있다. 플라톤은 이러한 모방기술을 다시 분류하여 실물을 실물 그대로 닮은 이미지(eikon)의 제작과 실물을 변형함으로써 실물처럼 보이도록 하는 이미지(phantasma)의 제작으로 나누고 있다. 플라톤이 회화를 모방이라고 했을 때는 우리의 눈을 기만하는 이미지의 제작이라는 후자의 의미에서였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모방이라는 말은 어느 점에서는 회화나 조각만이 아니라 시에도 적용되고 있다.

시인의 시는 시인의 창조가 아니라 신의 말씀을 대변하는 것일 뿐이다.

이처럼 시인은 신의 통로 역할을 하지만 마치 자기가 아킬레스인 양 시 속의 인물을 흉내내고 있다. 또 시인이 아킬레스를 흉내내고 있지 않다 해도 그의 시는 아킬레스에 관한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시 속의 인물을 흉내내고 있다는 행위에서, 또 시는 시 속의 인물에 관한 것이라는 내용에서 시 역시 모방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시인의 모방을 회화나 조각과 같은 모방기술의 하나로 보지는 않는다. 시의 발생은 어디까지나 영감의 소산이고, 회화와 조각은 테크네의 일환으로서 모방기술의 소산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점에서 신적 영감으로서의 시와 인간적 제작으로서의 회화, 즉 시적 창조와 기술적 창조라는 서구 미학의 이원적 창조관이 출발하게 된다. 그렇다면 모방으로서의 회화·조각에 대한 플라톤의 평가는 어떠했을까? 플라톤은 회화를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을 위해 사람이 만든 꿈"이라고 규정한다.

이 규정은 이념계와 현상계를 엄격히 구분하고 있는 그의 이원론적 형이상학의 입장에서 내린 회화에 대한 비난을 함축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회화가 진정한 실재인 이념으로부터 두 단계나 떨어진 이중의 모방이고, 실재와 아무 관계가 없는 한낱 꿈 같은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도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방적이라고 규정한 시를 포함하여 모방기술로서 회화에 대해 플라톤이 〈국가〉 10권에서 행한 공격의 기본입장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플라톤은 영감된 시에 대해서는 인식론적 자격을, 모방된 회화·조각에 대해서는 존재론적 자격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전자인 시가 비합리적 과정의 소산이라면, 후자에 대해서는 그 제작과정이 합리적임을 주장하고 있는 점에서 그의 모방론은 그후 르네상스 및 그로부터 발전된 신고전주의 예술관으로 이어진다.

예술과 체제와 개념

플라톤의 설명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고대 그리스 시대에 시 부류의 표현적 예술과 회화 부류의 조형적 예술은 그들이 존재하는 방식을 달리하고 있다.

따라서 2가지 부류의 활동을 하나로 묶는 개념이 없었다. 모방이 거론되는 경우에도 앞서 언급한 사실 때문에 모방은 양자를 실질적으로 종합하는 통일적인 개념으로 강조되기 힘들며, 동시에 거기에는 건축이 빠져 있다. 설령 건축이 포함되고 음악과 춤이 분리되는 과정을 고려할 때라도 모방은 근대 이후 서구인들이 예술이라고 부르고 있는 2가지 부류의 활동에만 국한된 개념은 아니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테크네의 일환으로서 특수한 부류로 모방기술을 논하고 있는 경우에는 예술 이외에도 궤변, 거울이나 마술의 사용, 나아가 동물 목소리 흉내내기와 같은 도저히 '아름답다'(fine)고 할 수 없는 그밖의 활동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면 모방 이외에 오늘날 예술이라고 하는 활동을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다른 개념은 없을까? 이 점에서 간혹 유용한 기술과 오락술의 구분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여기서 후자는 예술을 수용하는 점에서는 모방기술만도 못하다. 그러므로 시 부류의 활동과 회화 부류의 활동이 동류로 여겨져 근대적인 예술체계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여러 형태의 단계적 논의가 있어야 한다.

먼저 뮤즈에 의한 비합리적 창조로 이해되던 시가 규칙에 입각한 인간의 제작으로 전의되든가, 아니면 그 역이든가 하는 계기가 마련되어야 한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를 보편적 인간행위의 모방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시가 전자의 의미로 전의될 수 있는 이론적 기초를 마련했다. 그의 〈시학〉은 이러한 입장에서 시, 특히 비극적인 시가 제작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시가 준수해야 할 규칙을 논한 시의 입법서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한 시를 보편적인 인간행위의 모방으로 규정함으로써 시가 역사보다 더욱 철학적이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거부했던 인식적인 자격을 시에 부여하고 있고, 플라톤의 비난으로부터 시를 되살려놓고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에 대해 행했던 방식으로 플라톤의 비난으로부터 회화를 되살려놓고 있지는 않다. 즉 〈시학〉에 해당되는 화론을 남겨놓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앞으로 전개될 회화의 운명에 치명적이었다. 피타고라스주의자들에 의해 이론적 계기가 부여되기 시작한 음악과 함께 시는 정신적 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긍정적으로 이해되는 데 반해, 회화는 여전히 일체의 존재론적 의미를 찾아볼 수 없는 사이비 기술(kolakeia)로서 순전한 수공의 의미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즉 신체를 경멸하는 철학적 입장과 신체노동을 하지 않는 귀족정치의 체제 때문에 화가의 사회적 지위는 시인과 같은 것이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시를 인간행위의 모방이라고 규정했다고 해서 시와 음악이 곧 회화와 조각과 동류의 활동으로 간주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플라톤의 비난으로부터 회화나 조각이 구제되어야 했다. 우선 플라톤의 이원론적 형이상학이 일원론적인 것으로 변모해야 했는데 이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실체 개념이 회화를 구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는 있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철학의 입장에서 회화를 논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새로운 철학적 입장에서 회화에 대한 논의는 그리스 문화를 계승하려는 과정에서 수행된 키케로나 세네카의 조각에 대한 논의가 있은 뒤에야 대두했다.

위의 2가지 계기,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회화나 조각에 대한 재평가를 일자의 개념을 기초로 새로운 일원론적 형이상학 속에 종합해놓은 사람이 바로 플로티노스이다. 그는 정신적이고 가치적인 이념과 감각적인 미 사이의 연속성을 말하는 중에 예술만을 열거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근대인들이 예술이라고 하는 활동들을 열거하고 있다.

이것은 여러 예술을 처음으로 일정한 원리하에 체계적으로 종합하고 있으며, 이념과 예술 간에 긴밀한 등식이 성립될 수 있는 첫 계기를 마련해놓고 있다는 점에서 미학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헬레니즘 시대를 통한 이러한 접근은 불안정한 것이었으며, 회화나 조각에 대해서는 이내 고대적 사고로 회귀했다. 그러한 회귀는 곧 찾아오는 그리스도교의 교회철학과 결부되어 일어났다. 복음서의 정신과 금욕주의로 인해 예술은 고대 그리스 이래 오랫동안 점진적으로 획득해온 중요성을 잃게 되었다.

즉 그리스도교 정신은 감각을 매개로 하는 감각적인 미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미는 신과 그 창조물인 자연 속에서만 볼 수 있고 인간의 불완전한 작품 속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세에도 많은 미학적 저술을 통해 미학적 사상을 제기했다고 해도 그것은 미 그 자체에 관한 논의일 뿐 예술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는 중에 회화나 조각에 관한 고대의 모방 개념 역시 사라지게 되었다.

신성으로서의 미를 모방하는 일은 우상을 조장하는 일이 되며, 따라서 미에 관해서만은 아니지만 설령 정신성을 드러내기 위해 가시적·감각적인 예술이 요구될 때라면 모방 대신 상징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예술이라는 것은 고대의 전통을 이어 발전시킨 7가지 리버럴 아츠(liberal arts)와 7가지 머캐니컬 아츠(mechanical arts)의 체제 속에서나 겨우 그 언급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그것도 전자에는 음악, 후자에는 건축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시는 문법이나 수사에 관련되어 언급되고 있으나 회화와 조각은 머캐니컬 아트에도 포함될 수 없을 만큼 그 중요성이 낮게 평가되고 있다.

리버럴 아츠(liberal arts)

ⓒ Herrad of Landsberg /wikipedia | Public Domain

이 경우의 중요성은 유용성을 말하는 것으로, 회화나 조각은 지극히 미미한 것으로 생각되어 캄포룽고의 라둘프나 생 빅토르 위고도 회화나 조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조각가와 화가는 고대처럼 물질적 재료를 가지고 신체노동을 하는 직조인이나 석수와 동일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술이라는 근대적 체제가 성립되기 위한 다음 단계의 논의는 회화나 조각이 시나 음악처럼 리버럴 아트의 자격을 획득하자는 데서 비롯되었다.

사실 1,000년의 한을 실현한 것은 르네상스 시기를 통해서였다.

르네상스 시기는 신의 은총으로서의 이성이 아니라 인간이 지닌 자연적인 힘으로서 이성의 능력을 자각하고 발견해가는 시대이기도 했다. 따라서 인간은 신의 말씀인 성서에 입각해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이성으로 세계를 파악하게 되었다.

근대의 과학적 발견과 발명을 위한 철학적 기초가 서서히 확립되는 중에 화가에게도 자기 앞에 펼쳐진 비옥한 자연과 그 풍경이 소재가 되었다. 그래서 까맣게 잊혀졌던 고대의 모방 개념이 다시 대두하기 시작했으며, 바로 이같은 문맥에서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고대의 모방론을 다시 부활시키고 있다. 우선 과학에서 정확한 관찰이 요구되듯 회화에서도 정확한 모방이 문제되었다. 이를 위해 르네상스인들은 고대의 문헌을 통해 모방에 관한 여러 가지 규칙들을 발견하고 연구했으며, 따라서 원근법·해부학·심리학·인상학 등의 규칙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바탕에서 추후 미술론(theory of art)으로 발전된 새로운 교과의 싹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회화는 미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논의가 발전되었다. 과학자가 자연을 관찰한 후 이성적으로 통찰할 때 그 배후로부터 보편적인 법칙, 곧 진리를 발견해내듯 화가도 이성을 가지고 자연을 통찰할 때 자연의 보편적인 모습인 미를 모방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러한 보편적인 자연을 곧 플라톤이 이념이라고 말한 것이라고 해석함으로써 초월적 의미로서의 전통적인 이념의 개념을 심리적인 것으로 바꿔놓고 있다.

이같은 과정을 통해 진과 미는 동일한 자연의 서로 다른 양상이고 과학자와 화가는 동일한 지적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확립되었다. 그리고 화가에 의해 모방되는 보편적 자연인 이념은 그에게도 이성적으로 파악되는 것이기에 이념은 일단 화가에 의해 구성되어 화가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어야만 한다고 믿었다. 이처럼 머리에 떠오른 생각을 르네상스 화가들은 디자인(disegno)이라고 불렀으며, 그러한 디자인을 갖고 모방작업을 한다는 점에서 회화나 조각은 물론 건축까지도 동일한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미술(Arti del disegno)의 체제가 처음 만들어지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범주적으로 달리 분류되었던 건축이 회화와 조각과 함께 미를 구현하는 동류의 활동으로 여겨졌다.

이제 미술은 이론적으로는 과학과 같은 지적 활동의 자격을 획득하게 되었으므로 그러한 이론적 기초 위에서 미술가의 사회적 지위를 승격시켜야 하는 문제가 남게 되었다. 미술가를 길드의 구성원으로부터 분리시켜 시인처럼 아카데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요구가 일어났고, 이에 따라 1563년 피렌체에 미술학원(Accademia del Disegno)이 세워졌다.

이론적으로 회화는 과학과 같은 정신활동이며 사회적인 입장에서 화가는 더이상 직인이 아니므로, 최종적으로 남은 문제는 미술도 시처럼 리버럴 아트의 일환임을 당당히 주장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실제적 목적을 위해 취해진 이론적 기도가 호라티우스의 시구에서 따온 "시는 그림과 같이"(Ut pictura poesis)의 이설이다. 왜냐하면 미술도 리버럴 아트의 일원임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르네상스를 통해 리버럴 아트 가운데 3과(triuium:문법·수사·논리학)를 확대한 인문과학(studia humanitatis)에 논리학을 대체한 시와 회화가 평행이라는 사고를 발전시켜 양자가 동등한 활동이라는 이론을 세우면 되기 때문이다.

시와 회화의 평행론에 관한 뒤 프레소니의 〈미술론 Ars graphica〉은 이러한 논의의 귀결인 셈이며, 그결과 회화는 최소한 논리적으로는 시와 같은 활동으로서 리버럴 아트의 일원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시의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긍정적 논의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기를 통해 발전된 시적 모방의 개념에는 엄격한 규칙과 함께 플라톤에 의해 논의된 바 있는 영감의 요소가 개입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 점에서 음악과 시는 다같이 보편적인 미를 모방하는 동등한 활동으로 이해되고 있다.

과학으로서의 회화에 대한 사고에 있어서도 영감의 요소가 개입되고 있다. 그러므로 자연의 비밀을 드러내주는 점에 있어서 회화와 과학은 다를 바 없으나 양자의 그러한 차이 때문에 구별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를 다같이 이성의 활동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점이 르네상스인들의 이성개념의 특징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성은 과학적 진리뿐 아니라 미와 선 같은 가치까지 파악하는 폭넓은 의미로 이해되고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J. 베이트는 선과 같은 최고의 가치를 파악하는 것이 르네상스적 이성개념의 특징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윤리적 이성이라 규정하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수학적 이성의 개념을 정립하는 문제가 그후 데카르트 철학의 기본과제가 되었다.

이제 "시는 그림과 같이"의 이설을 통해 시와 음악과 함께 회화를 필수로 한 미술 역시 리버럴 아트의 체제 속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이 5가지 리버럴 아트는 미를 모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18세기를 통해 '예술'(beaux-art)이라는 어법이 만들어졌다.

이상이 미학의 한 문제로서 예술이라는 말과 체제와 개념이 만들어진 역사적 과정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사실은 예술이라는 말과 체제는 근대적 사고의 소산이며 그 개념은 비록 심리적인 것으로 바뀌었지만 형이상학적인 이념·자연·미라는 점에서 여전히 고전적인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전적 개념에 기초한 미의 모방을 데카르트 철학의 엄격한 이성의 개념으로 옹호하고자 한 것이 바로 신고전주의 예술관이다. 그러나 신고전주의 예술관은 오래 지속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계속적인 과학의 발달은 예술을 이성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데 커다란 어려움을 갖게 했고, 따라서 진과 미는 동일한 것일 수 없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전통적인 리버럴 아트의 체제가 붕괴되기에 이르렀으며, 예술은 자신의 정당성을 과학과는 다른 데서 구해야 했다.

여기서 예술은 이성이 아니라 상상의 문제이며 미는 비례와 같은 규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환기시키는 즐거움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는 근대적 예술의 개념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경향은 경제적으로는 중산계급의 대두와 사회적으로는 개인주의적 성향에 편승하여 전통적인 고전적 경향을 점진적으로 대체하게 되었다.

근대미학의 성립

신고전주의 예술관이 변모하는 과정에서 형식적 교과로서의 근대적 형태의 미학이론이 성립되었음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예술이 상상에 관련된 활동이며, 미가 감정에 관련된 가치인 것으로 자각되는 과정을 통해 예술과 미의 문제는 과거처럼 진리의 문제를 다루는 형이상학에 지엽적으로 부수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고유한 영역을 이루는 특수한 문제로 부각됨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로크의 경험주의적 철학에 기초하여 미의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된 미학적 논의가 앞서 미론의 항목에서 언급한 취미론이고, 라이프니츠-볼프의 합리주의적 철학에 기초하여 예술(시)의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된 미학적 논의가 A. G. 바움가르텐이 주장하는 '감성적 인식의 학'으로서의 '에스테티카'(aesthetica)이다.

근본적으로 취미론은 2가지 신념에 입각하고 있다. 하나는 "미는 대상의 성질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각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다"는 흄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영국의 취미론자들은 미의 주관성을 확신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미가 주관적인 즐거움의 문제임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미의 감정을 환기시키는 객관적 기준, 곧 취미의 기준이 있으리라는 신념이다.

이러한 2가지 신념하에서 취미론자들은 주관적인 감정의 문제인 미를 감각적 성질의 문제로 환원시켜 미의 공식을 확립하려 했다.

이에 비해 바움가르텐은 예술을 이성이 아닌 감성의 문제로 파악하고 있다. 이성을 통해 획득되는 명석하고 분명한 관념만이 세계에 대한 유일한 인식이라는 데카르트의 주장을 수정·보완하여, 명석하지만 혼연한 관념의 획득도 이 세계를 파악하는 또다른 방식이라는 라이프니츠의 주장을 발전시킴으로써 바움가르텐은 후자의 관념을 획득하는 능력을 이성에 대해 감성이라고 말했다.

그는 판명하기보다는 불분명하게 세계를 파악하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고급 인식능력인 이성에 비해 감성을 '저급한 인식능력'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감성은 여전히 사유능력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의사 이성'(analogi rationis)이라고도 불렀다. 여기서 바움가르텐은 사유능력으로서의 이성의 법칙을 연구하는 학으로서 논리학이 있듯이 비록 저급하지만 사유능력인 감성 역시 어떤 원리에 따라 사유하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원리에 대한 학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에스테티카라는 학명을 세례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예술을 이러한 사유능력인 감성에 의한 일종의 인식활동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예술가들은 감성 자체의 원리로부터 연역된 규칙을 준수해야 하며, 학·회화론·음악론 등에서 언급되는 제규칙들이 바로 그러한 규칙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의 속에서 미는 감성을 통해 파악된 세계의 완전성(vollkommenheit)으로 규정되었다.

이처럼 미를 객관적인 완전성의 개념에 결부시킨다는 점에서, 그리고 예술을 비록 저급하지만 과학과 같은 인식의 한 방식으로 보고 철저한 규칙준수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바움가르텐은 신고전주의 예술관을 여전히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성 대신 데카르트에게서는 도저히 허용될 수 없는 또다른 인식능력으로서의 감성을 주장하고, 따라서 예술이 과학과 같은 이성의 활동일 수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미학이론은 지극히 근대적인 계기를 담고 있다.

이처럼 18세기는 미의 공식이라든가 예술의 규칙과 같은 고전적인 요소가 여전히 계승되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19세기를 통해 전개되는 다양한 미학이론의 노선을 예비해놓고 있는 징후가 미나 예술의 개념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은 영국의 취미론과 독일의 에스테티카와 같은 근대적인 형태의 미학적 기도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근대미학의 최종적인 귀결로서 18세기말의 칸트라는 거목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의 〈판단력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1790)은 영국의 취미론이나 바움가르텐의 에스테티카를 통해 논의된 미학적 문제들을 수용하고 있다. 동시에 그는 그 문제들을 자기 비판철학의 입장에서 새롭게 조명·해석하여 미의 예술이 진정으로 독자적인 고유영역을 이루고 있음을 보증해줌으로써 미학이라는 학문이 문자 그대로 하나의 독립된 자율적인 교과로 발전될 수 있는 철학적 기반을 마련했다.

따라서 칸트를 분수령으로 그에게 귀결되는 18세기의 여러 미학적 논의들을 근대미학이라 규정하고, 그러한 근대미학적 논의들 속에서 어떤 특수한 사상을 새로운 방법론의 입장에서 더욱 철저히 밀고나간 그후의 다양한 미학이론들을 현대미학이라 규정할 수 있다. 여기서 현대미학을 형이상학적 미론의 전통을 계승한 예술철학(philosophy of art), 취미론에서의 경험주의적 전통을 보다 과학적으로 발전시킨 19세기말 이후의 예술학(science of art), 그리고 1950년대 언어분석의 방법이 미학에 도입되면서 새롭게 대두된 비평철학(philosophy of criticism)이라는 3가지 경향으로 압축된다.

현대 예술철학

예술의 본질을 묻는 미학이론으로서 칸트의 〈판단력비판〉 후반부에 나오는 예술의 개념, 곧 미적 이념을 표현하는 천재의 소산으로서 예술의 개념을 관념론의 중요한 계기로 수용·발전시킬 때 형이상학적인 예술철학이 성립한다.

즉 인간의 정신에 세계를 구성하는 힘을 부여하고, 유일한 실재는 그러한 정신적 실체로서의 절대적 이념일 뿐이라는 관념론적 철학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술이야말로 그 고유한 방식으로 이념을 파악 또는 구현하는 정신활동으로서 관념론의 기본주장을 실증해주는 적합한 사례로 수용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예술은 이념을 파악하여 진리를 획득하는 정신활동의 하나로서 형이상학의 체계 속에 수용되고 있다.

F.W. 셸링 같은 철학자에 있어서 가장 고차적인 진리획득의 기관으로서의 예술은 곧 철학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예술철학이라는 학명이 나왔지만, 그렇다고 그의 예술철학이 유일한 예술철학은 아니다. 상상적 직관보다는 이념을 파악하는 방식으로서 개념을 우위에 둘 때 G.W.F. 헤겔의 예술철학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셸링과 헤겔을 출발점으로 이념을 말하는 형이상학의 특성에 따라 온갖 형태의 예술철학이 전개되어왔는데, 흔히 신관념론자로 불리는 B. 크로체, R.G. 콜링우드와 신칸트주의자로 불리는 E. 카시러 등이 그 대표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예술철학이 관념론적 형이상학자들에 의해서만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이 고유한 인식의 한 방식이라는 기본가정에 입각하여 발전된 교과인 한, 예술철학은 레닌의 유물론적 인식론에 입각하여 예술을 사회적 실재의 반영이라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 예컨대 G.V. 플레하노프나 G. 루카치 등에게서도 강력히 구성되고 있다. 또한 존재론의 입장에서 예술을 존재(Sein) 해명의 수단으로 보는 H. 하이데거의 시론 및 예술을 세계와의 1차적 접촉을 통한 근원적 의미의 개시로 보는 현상학적 입장의 M. 메를로 퐁티 등은 모두 예술철학적 경향의 미학이론을 개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이념이나 절대자, 실재나 존재 등과 같은 실체들이 사실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경험주의적 입장에서 역시 예술을 일종의 특수한 의미의 활동으로 보고, 예술작품을 고유한 의미의 담지체로 간주함으로써 예술철학의 기초를 마련하려는 기도도 있다. 실용주의 입장의 J. 듀이, 기호론적 입장의 S.K. 랑어, 그리고 새로운 지각철학의 입장에서 '회화적 의미'라는 개념을 주장하고 있는 올드리치, 예술을 세계파악의 상징체계의 일환으로 보는 유명론적 입장의 N. 굿먼 등도 예술을 고유한 의미의 담지자로 보는 예술철학적 입장의 미학자들이다. 이처럼 예술을 인식의 한 방식으로 보고 있는 점에서 예술철학은 고전적 전통을 잇는 바움가르텐의 에스테티카 이념을 계승·발전시키고 있다.

현대 예술학

예술학의 성립에는 전에 볼 수 없는 몇 가지 이론적 요인이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첫째, 19세기 중엽 이후 형이상학 자체 내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자기 변모와 함께 대두한 자연주의적 철학 경향은 미와 예술의 문제에 있어서 역시 자연주의적 설명을 허용함으로써 형이상학적인 각종 예술철학을 위기로 이끌고 있다. C. 다윈의 진화론과 H. 스펜서의 유희론은 예술과 미의 발생에 관한 이러한 설명을 촉진시켰으며, G. 페히너의 '밑으로부터의 미학'(Aesthetik von unten)은 미와 예술과 같은 특수한 심리현상에 대해서 역시 심리학과 같은 과학이 접근될 수 있는 길을 터주고 있다.

다음으로 미의 문제와 예술의 문제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K. 휘들러나 K. 랑게 등에 의해 대두되었다. 이어 예술은 미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자체의 고유성이 있다는 점에서 예술에 대한 독자적인 연구를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타났다. 이같은 주장의 대두와 함께 예술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방법이 도입될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된 이상, 심리학의 계속적인 발전과 사회학·인류학·인종학 및 역사(특히 미술사) 등에서 성취한 발전들이 예술의 문제에 계속 개입하게 되었고, 따라서 마지막으로 근대적인 예술의 체제와 개념에 심한 변화가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미학의 경향은 미라는 획일적인 규범미학이 아니라 기술미학의 성격을 띠면서 예술에 대한 구체적·경험적 연구가 진행되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한 연구가 계속될수록 종래의 미학이론, 특히 형이상학적 예술철학을 떠받치고 있던 기본가정들은 점차 허위로 밝혀졌고, 결국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때에 예술에 대한 여러 과학적인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그들 자료를 체계적으로 종합함으로써 예술에 대한 일반법칙을 찾고자 하는 기술적 경험과학으로서의 미학, 곧 예술학이 나타났다. 물론 예술학에서도 학자에 따라 체계구성의 원리와 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여러 형태의 시도가 일어났다.

대표자로는 E. 우티츠, M. 데수아, F. 카인츠, T. 먼로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의 이론은 종래의 예술철학이 지니고 있는 경험적 허구성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발전된 것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바로 그러한 점에서 예술학은 경험주의적인 취미론의 전통을 계승·발전시키는 미학적 노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술학에는 심각한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예술학을 수립하려는 예술학자들은 그 작업이 예술의 이해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분명하건 불분명하건간에 예술의 개념을 전제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술학은 그 개념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 이 점에서 예술학은 예술의 본질을 규정하고자 하는 예술철학을 전제로 하거나 그와 제휴하여 구성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예술의 개념이 요청된다 하더라도 예술학 그 자신이 비판하고 나선 형이상학적인 이론으로부터 그것을 빌려올 수는 없다. 허구라고 해서 앞문에서 차버린 것을 필요 때문에 뒷문으로 슬그머니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학자들은 그들 스스로가 동시에 예술철학적 입장을 취해 예술의 개념을 정의하고 있거나 혹은 그것을 예술철학으로부터 빌려오는 수밖에 없다. 이 점에 바로 학으로서의 예술학의 한계가 있는 것이다.

현대 비평철학

예술학의 정립에 필요한 타당한 예술의 개념을 예술철학이 제공하기 힘들다고 한다면 예술철학이 자신의 한계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탐구할 대상을 제공해주는 예술가들과 그들의 소신에 의지하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예술가임을 자부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들의 소산 모두가 예술작품으로 여겨질 수는 없다. 이 점에서 예술에 대해 훌륭한 취미와 풍부한 조예를 지니고 있는 사람, 즉 어느 대상을 예술로 가치화하고 평가할 수 있는 비평가의 존재가 개입하게 된다.

과학으로서의 예술학은 비평가를 통해 자기의 연구대상을 제공받을 수 있다. 그러나 비평가마다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또다른 문제로서 올바른 비평의 기준을 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비평의 철학은 바로 이와 같은 입장에서 리처즈를 비롯한 신비평의 실제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분석 방법을 배경으로 발전된 미학의 새로운 경향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올바른 비평의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형태의 이론이 있게 된다. 이를테면 전통적으로 취미론의 문맥인 미적 태도론의 기본가정을 받아들여 미적 태도를 취할 때의 지각대상을 올바른 비평의 고유한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 스톨니츠의 이론이다. 한편 미적이라 규정되는 그러한 특수한 태도는 없으며, 따라서 실제 비평가의 비평적 진술을 분석함으로써 고유한 비평적 진술을 가려내고, 그러한 진술의 대상으로서의 미적 대상을 비평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는 M.C. 비어즐리의 이론도 있다.

그러므로 스톨니츠는 미적 태도에 입각한 미적 자각을, 비어드즐리는 미적 대상이 지니고 있는 대상의 특수한 성질을 비평의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비평철학은 근본적으로 대부분의 전통적 미학이론이 저지르고 있는 본질론자의 오류를 지적하는 언어분석의 입장으로부터 발전된 지극히 새로운 경향이다. 이러한 분석은 18세기 영국 취미론의 최종적인 귀결로서, '미'가 정의될 수 없다는 식의 미에 대한 스튜어트의 분석과 일치하고 있는 미학적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비평철학은 예술이 정의될 수 없는 열려진 개념임을 논리적으로 분석해냄으로써 예술의 정의를 기초로 한 체계적인 예술철학이 가능하지 않음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인 예술철학의 근본문제였던 예술의 정의 문제가 기피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문제는 예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술비평가들에게도 전제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술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여전히 그에 대한 답을 기다리고 있다. 이 난문에 부딪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날 미학의 상황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각적인 시도가 일어나고 있지만 이 문제는 미학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철학에서 형이상학의 전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계속 주목해야 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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