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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126, 코르도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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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198, 알모하드 마라케시 |
국적 | 이슬람 |
요약
이슬람의 종교철학자.
중세 라틴어로는 Averrhos. Averro
s라고도 함. 정식 이름은 Abū al-Walīd Muḥammad ibn Aḥmad ibn Muḥammad ibn Rushd.
이슬람 전통과 그리스 사상을 통합했다(→ 이슬람 철학). 칼리프 이븐 앗 투파일의 요청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부분의 작품들과 플라톤의 〈국가 Republic〉의 요약본과 주석서를 저술했다(1162~95). 이 저서들은 수세기 동안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신학자들에 대항하여 종교에 대한 철학적 연구를 옹호하기 위해 〈종교법과 철학의 일치에 관한 결정론 Decisive Treatise on the Agreement Between Religious Law and Philosophy〉(〈파슬 Faṣl〉)·〈종교 교리에 대한 증명법의 고찰 Examination of the Methods of Proof Concerning the Doctrines of Religion〉(〈마나히즈 Manāhij〉), 〈부조리의 부조리 The Incoherence of the Incoherence〉(〈타하푸트 Tahāfut〉)를 썼다(1179~80).
초기생애
이븐 루슈드는 코르도바의 유명한 법학자 가문에서 태어나 알모하드(알 무와히둔) 왕조의 북아프리카 수도인 마라케시에서 사망했다.
전통적인 이슬람학(특히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과 마호메트의 언행록인 하디스에 대한 해석, 그리고 이슬람 법학[fiqh])에 통달했다. 의학을 배웠고 철학에 정통했던 그는 코르도바(쿠르투바)의 카디(qādῑ)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이것은 이름이 같았던 그의 할아버지가 알모라비드(알 무라비툰) 왕조에서 역임했던 지위였다.
철학자 이븐 투파일이 죽은 뒤, 이븐 루슈드는 그를 계승하여 1182년 칼리프 아부 야쿠브 유수프, 그리고 1184년에 그의 아들 아부 유수프 야쿠브의 시의가 되었다. 1169년 이븐 투파일은 이븐 루슈드를 명철한 철학도였던 아부 야쿠브에게 소개했는데, 아부 야쿠브는 이때 이븐 루슈드에게 하늘의 창조 여부에 대한 질문을 하여 그를 놀라게 했다. 자신의 물음에 스스로 대답하여 이븐 루슈드를 마음 편하게 해주었으며, 칼리프는 이븐 루슈드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눈 뒤 값진 선물을 주어 돌려보냈는데, 이 일은 그의 출세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얼마 후 칼리프는 절박하게 필요한 일이었던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서의 정확한 번역을 이븐 루슈드에게 부탁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 그는 카디로서 바쁘게 지내면서도 세비야에서 시작하여 코르도바로 이어진 여러 해 동안 이 일에 몰두했다. 그가 정부의 핵심 지위 중의 하나이며 그 권한이 사법행정에만 국한되지 않았던 코르도바의 재판장에 임명된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다.
저작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주석서
1169~95년 이븐 루슈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부분의 작품들(예를 들면 〈논리학 Organon〉·〈영혼에 관하여 De anima〉·〈자연학 Physica〉·〈형이상학 Metaphysica〉·〈수사학 Rhetorica〉·〈시학 Poetica〉·〈니코마코스 윤리학 Nicomachean Ethics〉·〈동물의 신체기관에 관하여 De partibus animalium〉·〈자연에 관한 단편들 Parva naturalia〉·〈기상학 Meteorologica〉)에 대한 주석서들을 썼다.
그는 요약서와 중편 혹은 장편의 주석서를 썼는데 한 작품에 대해 흔히 2, 3 종류를 모두 썼다. 이븐 루슈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Politica〉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플라톤의 〈국가〉에 대한 주석서(이것은 형식상 의역서이자 중편 주석서임)를 저술했다. 그의 주석서는 모두 라틴어역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에 실렸다. 이들 주석서들은 아랍어 원본이나 히브리어 번역본 또는 2가지가 모두 남아 있다.
그리고 번역본 중의 일부는 분실된 것으로 보이는 아랍어 원본들,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플라톤의 〈국가〉에 대한 귀중한 주석서 등을 대신할 수 있는 유용한 것이다.
이븐 루슈드의 주석서는 이후 수세기 동안 유대인들과 그리스도교도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명석한 통찰력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정확히 대변해주었고 그의 사상에 대한 이해력을 상당히 증진시켰다. 그는 고전적인 주석가들인 테미스티우스와 아프로디시아스의 알렉산더, 그리고 이슬람 철학자들인 알 파라비, 이븐 시나, 이븐 시나와 같은 고향 사람인 이븐 바자 등을 비판적으로 능숙하게 활용했다.
자연과학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문의 주석서에서는 이븐 루슈드의 대단한 관찰력이 엿보인다.
철학에 대한 이븐 루슈드의 옹호
그의 첫 저작은 1162~69년에 쓴 〈의학 Kulliyāt〉(라틴어로는 Colliget)이다.
법률에 관한 저술은 소수가 현존하며 신학에 대한 저술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저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진 종교 철학적 논쟁에 관한 3권의 논문이다. 즉 1179, 1180년에 씌어진, 부록이 딸린 〈파슬〉과 〈마나히즈〉및 철학을 옹호한 〈타하푸트〉가 그것이다. 앞의 두 책에서 이븐 루슈드는 대담한 주장을 펼쳤다.
즉 예언적으로 계시된 성법(聖法:Shar⁽ 또는 Sharῑ⁽ah) 속에 내포된 교의를 해석할 능력과 자격이 있는(동시에 해석해야만 하는) 사람들은 이슬람의 무타칼리문(mutakallimūn:변증술을 쓰는 신학자)이 아니라 바로 형이상학자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타칼리문은 변증적 논증에 의존하지만 형이상학자는 삼단논법의 증명방법을 써서 완전하게 해석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신앙과 신념의 진정한 내면적 의미를 밝히는 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의 목표이다. 이러한 내면적 의미는 대중들에게 드러내서는 안 된다. 대중들은 성서(〈코란〉)의 이야기와 직유와 은유 속에 담겨 있는 분명하고 외면적인 의미만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븐 루슈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3가지 논법(논증적인 것, 변증적인 것, 설득적인 것, 즉 수사적인 것과 시적인 것)을 철학자·신학자·대중에게 적용했다.
3번째 저서는 특히 그의 선배 철학자 알 가잘리가 이븐 시나와 알 카라비에게 가한 공격을 반박하고 철학을 옹호하기 위해 씌어졌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옹호는 비록 기백있고 성공적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철학을 예전의 지위로까지 회복시킬 수는 없었다. 당시 스페인과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 사회는 자유롭게 사색을 추구하기에는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븐 투마르트(1078경~1130)는 순수한 유일신교를 회복할 목적으로 개혁 활동을 펼쳤는데 그결과 알모라비드 왕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베르베르 왕조인 알모하드 왕조가 세워져 이븐 루슈드는 이 왕조하에서 활동했다.
당시 법률학의 강조점은 이슬람 성법을 이전의 권위에 의존하여 현실에 적용하는 것에서 탈피하고, 성법 원리에 대한 연구와 이븐 투마르트의 가르침에 근거한 독립된 법률적 판단의 부활에 동등한 강조점을 두는 쪽으로 바뀌었다. 아마도 보다 널리 영향을 미친 것은 실천과 지식이 겸비될 수 있도록 아직까지 무지한 대중들에게 샤리아의 명백한 의미 내용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 이븐 투마르트의 사상일 것이다.
이러한 변화와 발전은 철학자들(falāsifah:이븐 루슈드의 〈파슬〉에 의하면 '사색의 길을 따르고 진리를 알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이 샤리아의 이론적인 가르침에 대한 해석에 논증적 방식을 적용하도록 고무시켰다. 그러나 재판관과 신학자들의 세력이 너무 강력했기 때문에 철학에 대한 이븐 루슈드의 옹호는 불리한 상황에서 수행될 수밖에 없었다.
이븐 루슈드는 아부 야쿠브의 지원에 사례를 표하는 뜻으로 〈플라톤의 국가에 대한 주석 Commentary on Plato's Republic〉을 그에게 헌정했다.
그러나 그는 카디들과 함께 고관의 지위를 차지하고 광신적인 대중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던 무타칼리문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철학적 탐구를 계속했다. 이것이 아마도 그가 아부 유수프의 후원을 갑자기 잃게 된 원인이었을 것이다. 1195년 아부 유수프는 스페인의 그리스도교도들과 지하드[聖戰]를 벌이면서 이븐 루슈드를 고위직에서 해임하고 루세나로 추방했다.
대중들의 전폭적인 충성심과 지지가 필요했던 칼리프는 이런 방식으로 신학자들을 무마시켰던 것이다. 이런 설명이 아랍 측 자료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아마도 재판관과 신학자들의 사주로 폭도들이 이븐 루슈드를 공격했다는 것)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븐 루슈드의 불명예는 그에게는 뼈아픈 고통을 준 긴 시간이었지만 단기간에 그쳤다. 칼리프는 마라케시로 돌아온 다음 이븐 루슈드를 그의 궁정으로 다시 불렀던 것이다. 이븐 루슈드는 죽은 뒤 처음에는 마라케시에 묻혔지만 후에 코르도바의 가족묘지로 이장되었다.
통치자가 공식적으로는 철학을 부정하고 철학의 지지자들을 박해하며 철학서적을 불태우고 종교법의 준수에 필요한 것 이외의 세속학문의 연구를 금지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철학자를 총애하고 그들과 교분을 갖는 것은 이슬람 세계에서 드문 일이 아니다.
칼리프의 격려가 없었다면 이븐 루슈드는 〈플라톤의 국가에 대한 주석〉·〈파슬〉·〈타하푸트〉, 그밖의 독창적인 철학 논저(예를 들면 능동 지성과 인간의 지성의 통일에 관한 논저 등) 등에 반영되어 있듯이 신학자들에 대항해서 철학을 변호하기 위해 전생애를 바쳐 싸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븐 루슈드가 섬긴 2명의 군주이자 후원자들이 이븐 투마르트의 신학을 점차 멀리하고 이슬람의 성법에 심취된 것도 아마 그에게 도움이 된 것 같다. 이븐 루슈드는 자신의 공적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면서 동시에 철학연구를 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의 신체기관에 관하여〉에 대한 주석 등 곳곳에서 스스로 언급하고 있다.
이븐 루슈드 저작의 평가
이븐 루슈드의 사상을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의 작품을 전체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특히 그의 종교적·철학적 논고들과 그의 〈플라톤의 국가에 대한 주석〉을 비교해보면, 이슬람이 교시한 샤리아에 대한 그의 입장, 그리고 그에 따른 철학에 대한 입장, 더 엄밀하게는 플라톤의 철인왕(哲人王)의 법인 노모스(nomos)에 대한 그의 결정적인 입장이 근본적으로 동일함을 알 수 있다. 이런 비교를 통해 보면 이븐 루슈드에게는 오직 하나의 진리만이 존재한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그에게는 종교적 성법의 진리 또한 형이상학자가 추구하는 진리와 동일했다. 이중진리설은 이븐 루슈드가 아닌 오히려 라틴계의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분명히 정식화되었다. 철학과 형이상학자들과의 관계가 종교와 대중과의 관계와 같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이븐 루슈드는 종교는 3계급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명확하게 말했다. 즉 샤리아의 내용은 모든 신앙인에게 전부이며 유일한 진리이다. 그리고 일반대중과 마찬가지로 엘리트들도 보상과 벌, 내세에 대한 종교적 가르침의 평범한 의미를 받아들여야 한다. 철학자는 최선의 종교를 선택해야만 한다. 이슬람교도들에게 있어서 최선의 종교는 그리스도교가 예수의 시대에 최상의 종교였고 유대교가 모세의 시대에 그러했듯이 최후의 예언자인 마호메트가 설파한 이슬람교이다.
이븐 루슈드가 〈플라톤의 국가에 대한 주석〉에서 성법과 철학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고 〈파슬〉에서 "철학은 샤리아의 친구이자 양(養)자매"라고 말했던 것은 의미가 깊다.
철학을 이론철학(물리학과 형이상학)과 실천철학(윤리학과 정치학)으로 구분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받아들인 이븐 루슈드는 샤리아가 양자, 즉 신의 인지(認知)라고 할 수 있는 추상적 지식과 성법이 요구하고 있는 윤리적 덕목(〈플라톤의 국가에 대한 주석〉)인 실천을 완전하게 가르치고 있다고 본다.
그는 〈타하푸트〉에서 "성법은 진리와 일치하며 모든 창조물의 행복을 보장하는 행동에 대해 알려준다"라고 말했다. 이븐 루슈드의 진실성에 이의를 제기할 이유가 없다. 이 말에서 그가 법에 대해 동일한 입장을 취하고 행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고의 선(善)인 행복은 정치학의 목표이다. 이븐 루슈드는 이슬람교도의 입장에서 모든 신도들이 현세와 내세에서 행복을 성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행복주의). 그러나 플라톤 추종자의 입장에서는 이것을 제한했다.
즉 최고의 지적 완성은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처럼 형이상학자에게만 해당된다. 그러나 이슬람교도들의 이상국가에서는 예언으로 계시된 법이 있기 때문에 일반대중 또한 행복해진다. 이 점에서 이슬람의 법은 그리스인의 노모스보다 우월하다. 철학자 이븐 루슈드는 행복을 정도에 따라 구분하고 모든 신자들에게 각자의 지적 능력에 상응한 행복을 할당했다. 그는 플라톤이 제3계급을 무시했다고 비난했다. 이븐 루슈드는 모든 사람이 행복을 나눌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이슬람의 샤리아만이 유일하게 모든 신자들을 돌보아준다. 샤리아는 신자들에게 신의 존재를 알도록 요구하기 때문에 사색을 정당화한다. 소박한 신자는 신에 대한 지식을 은유를 통해 전달받는다. 형이상학자만이 논증을 통해 은유의 내적 의미를 이해한다. 이 점에 대해 모든 철학자들이 동의하며 그들 모두는 신성한 계시로부터 유래한 샤리아의 우월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븐 루슈드만이 노모스보다 샤리아가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올바른 신앙과 신념의 형태로 종교의 교의를 해석할 수 있는(플라톤의 철인왕과 같은) 형이상학자의 특권(이는 신이 그들에게 부여한 의무라고 여겼음)을 주장한 이븐 루슈드는 샤리아가 인간의 이해력을 뛰어넘으면서도 그것이 신성하게 계시된 진리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모든 신앙인들이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일반 대중과 신학자들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철학자는 그들만큼이나 성법에 명백히 규제받고 있다.
형이상학자의 어떤 증명법과는 대조적으로 카디가 비록 주관적인 추론만을 사용하더라도 카디가 법을 해석할 때와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자는 진리를 추구할 때 아랍어 사용에 의해 제한받는다. 이것은 철학자는 논증 결과 모순된 것은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물질의 영원성을 논증했기 때문에 무(無)에서 유(有)가 창조되었다는 신앙을 파기할 수 있다.
창조는 하나의 계속적인 과정이다. 이븐 루슈드는 이러한 입장의 정당성을 입증했는데 이것은 실제 법률과 규정이 관련된 엄격하게 법률적인 맥락 속에서 식자(識者)들의 합일만이 이슬람교도들을 규제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창조의 문제와 같은 어떤 이론적 명제에 대해 아무런 합일점이 없기 때문에 철학자는 그것에 따를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신인동형동성설(神人同形同性說)은 받아들일 수 없고 신을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한 성서의 구절들은 은유로서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신은 보편자만을 알 뿐 개별자는 모른다는 문제에 대해 이븐 루슈드는 신은 개별자를 인지하지만 신의 인지는 인간의 인지와 다르다고 말함으로써 교묘하게 회피했다. 이와 같은 몇 개의 사례는 그의 논술에도 모호함과 상호모순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플라톤의 국가에 대한 주석〉에서 이븐 루슈드는 다른 주석서에서 볼 수 없는 그의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그는 예로부터 성법과 그리스 철학을 종합하려는 오랜 시도에 재도전하면서 이전의 철학자들에게 상당히 의존했으나 그들을 능가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수정된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고 또한 그것을 이슬람 국가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븐 루슈드는 철학자가 군주는 되지 못한다 해도 이상국가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정치적 영향력이라도 행사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플라톤식 관점에서 일련의 비판을 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플라톤의 사상을 당시의 알모라비드 왕조와 알모하드 왕조에 적용했다. 왜냐하면 이상적인 헌법으로서 샤리아에 토대와 중심을 두는 이상적인 이슬람 국가 다음으로 플라톤의 이상국가가 최상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플라톤의 〈국가〉에서 보이는 여성의 동등한 시민권과 비교하여 이슬람 여성의 지위를 개탄했다. 여성의 능력을 아이를 낳고 기르는 데만 쓰는 것은 경제적으로 손실이며 국가가 빈곤한 원인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이것은 극히 탈정통적 시각이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상적이고 완전한 국가가 4개의 불완전한 국가로 변질되고 타락한다는 플라톤의 사상을 받아들인 사실이다.
이슬람의 전통에서 처음의 4대 칼리프까지의 이상적인 국가를 왕조권력의 국가로 타락시켰다고 보는 무아위야 1세에 대해 이븐 루슈드는 이상국가를 금권정치(명예욕에 근거한 정권)로 바꾸었다는 플라톤적 관점으로 해석했다. 마찬가지로 알모라비드와 알모하드 국가는 원래 완전한 샤리아 국가와 유사한 국가로부터 금권정치·과두정치·민주정치·독재정치로 타락해간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븐 루슈드는 여기에서 이슬람의 관념과 플라톤적 개념을 결합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당시의 그릇된 철학가들, 특히 무타칼리문을 플라톤이 말한 궤변가들에 비유했다. 이븐 루슈드는 그들을 이슬람의 순수성과 국가 안전을 저해하는 진짜 위험물이라고 단언하면서 변증론의 신학자들이 대중에게 그들의 신앙과 신조를 말하는 것을 금지시키라고 지배권력에게 요구했다.
그들의 설교는 대중을 혼란하게 만들고 이단과 종파분열, 그리고 불신앙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국가〉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철학자들은 이슬람의 종교적·정치적 통합이라는 이슬람의 고전적 이론 내에서 샤리아가 차지하는 정치적 성격과 내용을 보다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븐 루슈드는 10세기의 철학자 알 파라비가 플라톤의 정치철학에 대해 행한 논법에 많이 의지하여 〈국가〉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각에서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이븐 루슈드에게 최초로 정치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따라서 그는 플라톤의 이론적 서술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국가〉의 2~9권에 대한 상세한 주석에만 주력하고 반면에 플라톤의 변증법적 서술과 특히 그의 설화와 신화, 주로 에르의 신화에 대해서는 무시했다. 그는 플라톤에 대해 설명했지만 플라톤의 〈법학 Laws〉과 〈정치학〉에 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론 후편 Analytica posteriora〉·〈영혼에 관하여〉·〈자연학〉·〈니코마코스 윤리학〉에 의해 알게 되었고 이들의 관점에서 활용했다.
자연히 그리스의 이교도적 사상과 제도가 이슬람의 그것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시(〈호머〉)에 대한 플라톤의 비평법은 그가 비난한 아랍의 이슬람 이전 시들에 적용시켰다.
이븐 루슈드는 샤리아가 노모스보다 우월하다고 확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샤리아와 플라톤의 일반법(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해석) 사이에 상당한 공통적 근거가 있다고 간주했다. 그는 플라톤의 철인왕과 이슬람의 이맘(지도자이자 입법자)을 동등하게 본 알 파라비의 입장을 수용했다.
그러나 그는 이상적인 군주가 예언자이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그대로 남겨두었다. 이렇게 한 것은 이븐 루슈드가 성실한 이슬람교도로서 마호메트를 신이 계시한 샤리아를 최종적으로 선포한 '예언자들의 봉인'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그는 마호메트를 전체 예언자의 반열에서 제외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다른 철학자들처럼 유출설을 가지고 예언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분명히 배격했다. 지성에 대한 그의 이론이 완전히 아리스토텔레스적이고 유출설과 전혀 무관한 것처럼 그의 저작 속에서 이와 같은 이론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븐 루슈드의 종교·철학적 작품의 개요와 〈국가〉에 대한 주석서에 나타난 통일성은 그의 정치철학에 이슬람적 성격과 색조를 명백히 부여하는 것이며 바로 이 점이 종교철학자로서의 그의 중요성을 더 크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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