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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135. 3. 30, 코르도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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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204. 12. 13, 이집트 |
국적 | 유대 |
요약
마이모니데스는 중세 유대주의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종교·철학·의학에 걸쳐 업적을 남겼다.
스페인 코르도바의 유명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슬람교도들의 가혹한 종교적 탄압을 피해 아버지와 함께 카이로에 이주해 자유롭게 유대교 신앙을 실천했다. 아버지와 동생의 사망으로 경제적 압박을 받게되자 직업 의사가 되었다. 얼마 안 가 명성이 널리 알려지며, 이슬람 군사 지도자 술탄 살라딘과 그의 아들 알 아프달의 궁정의가 되었다. 또한 유대 공동체의 지도적 인물이 되어 대중을 가르쳤으며 개인적인 문제에서 공동체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여러모로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가장 유명한 저서 <혼란에 빠진 자들을 위한 길잡이>를 통해 여러 종교인들과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히브리어로 유대 법전을 쓰기도 했다.
중세 유대주의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첫번째 주저는 23세에 쓰기 시작하여 10년 만에 완성한 미슈나에 관한 주석서였다.
그뒤 히브리어로 기념비적인 유대 법전을 썼고 아랍어로 〈혼란에 빠진 자들을 위한 길잡이 Dalālat al-ḥa⁾irῑn〉를 썼다. 그밖에도 매우 중요한 저술을 많이 남겼다. 종교·철학·의학에 끼친 그의 공헌은 유대인 학자와 비유대인 학자 모두에게 영향을 주었다.
스페인 코르도바의 유명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박식한 아버지와 개인교사에게 교육받았는데, 탁월한 이해력과 다재다능으로 교사들을 놀라게 했다. 평화로웠던 어린시절은 13번째 생일을 앞두고 갑자기 닥쳐온 전쟁과 박해로 끝났다. 이슬람 치하의 스페인에 속해 있던 코르도바는 시민들에게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주고 있었지만 혁명적·광신적 이슬람 종파인 알모아데파(알 무와히둔:이슬람교 일신론자) 때문에 이슬람 치하의 지중해 세계는 동요를 겪게 되었다.
1148년 코르도바를 점령한 알모아데파는 유대 공동체에게 이슬람교를 따르든가 다른 곳으로 떠나라는 가혹한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마이몬가(家) 사람들은 집안에서는 남몰래 유대교를 신봉하면서 공식적으로는 가능한 한 이슬람교도처럼 행동했다. 마이몬가는 약 11년 동안 코르도바에 머물러 있었고, 마이모니데스는 당시 유행하던 여러 과학뿐만 아니라 유대 학문도 계속 공부했다.
계속해서 이중생활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너무 많음을 알게 된 마이몬가는 마침내 1159년경 코르도바를 떠나 모르의 페스에 정착했다.
페스도 알모아데파의 지배 아래 있었지만 코르도바보다는 나았던 것 같다. 페스에서 마이몬가는 이방인인 셈이고 그들의 위장도 발각되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 그는 랍비 학설과 그리스 철학 등 자신이 좋아하는 과목을 계속 공부했고 의학도 배웠다. 그러나 페스는 잠시 동안의 은신처에 지나지 않았다. 마이모니데스와 함께 공부한 적이 있는 랍비인 유다 이븐 쇼산이 1165년 유대교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한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유죄선고를 받고 처형당했다.
이를 본 마이몬가는 또다시 떠날 결심을 했고 이번에는 팔레스타인으로 갔다. 그러나 그곳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몇 달 뒤 그들은 다시 이집트로 건너가 카이로 근처 포스타트에 정착했다. 그곳에서는 일단 이슬람교로 개종했던 유대인이 유대교로 되돌아가면 사형을 당했지만, 그렇지 않은 유대인은 자유롭게 자신들의 신앙을 실천할 수 있었다.
마이모니데스는 배교한 이슬람교도로 고소당하기도 했지만, 자신이 정말로 이슬람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음을 입증함으로써 무죄방면되었다.
이집트가 고난과 박해로부터의 피난처이기는 했지만 마이모니데스는 곧 개인적인 문제들에 부딪혔다. 아버지는 이집트에 도착한 뒤 곧 죽었고 부유한 보석상으로 마이모니데스의 생계에 많은 도움을 주던 동생 다비드마저 가족의 전 재산을 싣고 배를 타고 가던 중 난파되어 죽었다.
이제 마이모니데스는 혼자서 가족을 부양해야만 했다. 당시 랍비라는 직책은 어떠한 보수도 받지 않는 공적인 봉사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는 랍비가 될 수는 없었다. 경제적 압박을 받게 된 그는 의학 지식을 이용해 직업 의사가 되었다. 얼마 안 가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고, 곧 유명한 이슬람 군사 지도자 술탄 살라딘과 그의 아들 알 아프달의 궁정의가 되었다. 그는 개업의를 계속했고 국립병원의 동료 의사들 앞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또 유대 공동체의 지도적 인물이 되어 대중을 가르쳤으며 개인적인 문제에서 공동체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여러모로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저작
마이모니데스의 저작은 많고 다양했다.
16세 때 쓴 최초의 작품은 논리학과 형이상학의 여러 전문용어들을 연구한 〈논리학 용어법 Millot ha-Higgayon〉이었다. 초기저작 중에는 〈논리학 용어법〉과 같이 아랍어로 쓴 〈달력에 관한 에세이〉(히브리어 제목은 〈Ma' amarha⁽ibur〉)가 있다.
23세 때 쓰기 시작한 첫번째 주저는 미슈나에 관한 주석서 〈키타브 알 시라지 Kitāb al-Sirāj〉로 역시 아랍어로 썼다. 미슈나는 초기부터 3세기까지 유대법의 판례들을 모아 해설한 책이다.
마이모니데스의 주석서는 하나하나의 단어와 구절의 의미를 명확히 밝혔고 고고학·신학·과학에서 관련 정보들을 자주 인용했다. 이 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미슈나에서 언급된 일반적인 철학문제들을 다루는 서론격의 에세이라는 점에 있다. 이 에세이 가운데 하나는 '신앙 13개 조문' 신조 속에 들어 있는 유대교의 가르침을 요약하고 있다.
33세에 그는 미슈나에 관한 주석서를 완성했다.
그뒤 대표작인 유대법전 집필을 시작했는데, 이것 역시 10년이 걸렸다. 〈토라 평전 Mishne Torah〉이라는 제목으로 히브리어로 쉽게 쓴 이 법전은 모든 유대 법률과 교리를 탁월하게 체계화한 것이다. 그는 유대 법전에 관한 저작을 2권 더 썼다. 이 저작들은 앞의 저작에 비해 법위가 좁은데, 하나는 세상물정에 어두운 독자를 위해 유대 법률을 아랍어로 요약한 〈명령서 Sefer ha-mitzwot〉이고, 다른 하나는 팔레스타인 탈무드에 실려 있는 법률들을 히브리어로 요약한 〈예루살렘 법전 Hilkhot ha-Yerushalmi〉이다.
1176년에 시작해 15년 만에 완성한 다음 주저는 종교 철학에 관한 고전 〈혼란에 빠진 자들을 위한 길잡이 Dalālat al-ḥā⁾irῑn〉였다.
이 책은 뒷날 〈More nevukhim〉라는 히브리어 제목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자신이 매우 합리적인 유대주의 철학이라고 부른 것을 변호하는 이 책은 과학·철학·종교의 화해에 크게 이바지했다. 마이모니데스는 이 책을 아랍어로 써서 개인적 의견교환을 위해 애제자 요셉 이븐 아크닌에게 보냈는데, 마이모니데스 생전에 히브리어로 번역되었고 사후에 라틴어와 대부분의 유럽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 책은 종교사상사에 뚜렷한 영향을 미쳤다.
마이모니데스는 소규모의 저작들과 유대 공동체의 당면문제를 다룬 시론도 많이 썼고, 학자·학생·공동체 지도자들과 폭넓게 서신을 교환하기도 했다. 소규모 저작들 가운데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예멘에게 보내는 서한 Iggert Teman〉·〈배교에 관한 서한 Iggeret ha-shemad/Ma⁾amar Qiddush ha-Shem〉·〈점성술에 관한 서한 Iggeret le-qahal Marsilia〉(원래 제목 그대로 번역하면 〈마르세유 공동체에 보내는 서한〉) 등이다.
그는 의학에 관한 작품도 많이 썼다. 그중에는 건강요법을 다룬 대중적인 가벼운 수필도 있는데, 그는 이 책을 술탄 알 아프달에게 바쳤다. 20세기 중반의 역사가 발데마르 슈바이스하이머는 마이모니데스의 의학 저서들에 관해 "마이모니데스의 의학적 가르침은 결코 낡은 것이 아니다. 사실 몇 가지 점에서 볼 때, 그의 저서들은 그 성격과 내용에서 놀랄 만큼 현대적이다"라고 말했다.
마이모니데스는 자신이 많은 직무에 억눌려 평화를 빼앗기고 건강을 해쳤다고 불평하곤 했다. 그는 1204년에 죽어 팔레스타인의 티베리아스에 묻혔다. 오늘날에도 그의 무덤을 찾는 경건한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의 진보적 견해는 그의 생존시 이미 반대에 부딪혔고, 이러한 반대는 사후에도 계속되었다. 1233년 남부 프랑스 몽펠리에의 한 광신자 랍비 솔로몬이 〈혼란에 빠진 자들을 위한 길잡이〉는 위험한 이단서적이므로 불살라야 한다고 교회 당국을 선동했다.
그러나 얼마 뒤 이 논쟁은 잠잠해졌고, 마이모니데스는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서뿐만 아니라 전통 신앙의 지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의 교의는 정통 신학의 일부가 되었다. 마이모니데스가 유대주의에 미친 획기적인 영향은 유대세계 밖으로도 퍼져나갔다. 그의 철학 저작은 라틴어로 번역되어 중세의 뛰어난 스콜라 저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같은 뒷날의 사상가는 자기 사상의 일부를 그의 저작에서 끌어오기도 했다. 그의 의학저술들은 의학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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