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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문

다른 표기 언어 al-Ma'm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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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786, 바그다드
사망 833. 8, 실리시아 타르수스
국적 아바스

요약 아바스 왕조의 7번째 칼리프(813~833 재위).
정식 이름은 Abū al-⁽Abbās ⁽Abd Allāh al-Ma⁾mūn ibn Ar-Rashīd.

개요

이슬람 내의 분파적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고, 그의 신하들에게 합리적인 이슬람 신조를 강요하려 했던 일로 유명하다.

초기생애

유명한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와 이란인 소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것은 아랍 혈통의 본처에게서 이복형제 알 아민이 태어나기 6개월 전 일이다. 알 라시드는 후계자를 정할 때가 되어 알 아민으로 최종 결정을 내리기까지 오랫동안 주저했다고 한다. 802년 성지 메카를 순례하는 기회에 칼리프는 두 아들에게 각각의 권리를 공식적으로 공포했다. 이에 따라 알 마문은 알 아민이 바그다드 칼리프의 후계자임을 인정했다.

반면 알 아민도 그의 형이 호라산(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의 메르프에 도읍터를 잡고 제국의 동부 주들에 대해 거의 절대적 지배권을 갖고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809년 3월 하룬 알 라시드가 사망하자 두 형제 사이에 불화가 발생했고 이것은 곧 무력충돌로 번져갔다. 알 아민에 의해 사실상 계승권을 박탈당한 알 마문은 자신의 와지르(총리)로 삼은 이란인 알 파들 이븐 살과 이란인 장군 타히르의 지원을 받았다.

오늘날의 테헤란 근교에서 타히르가 알 아민의 군대와 싸워 승리를 거둠으로써 알 마문의 부대는 이란 서부를 점령할 수 있었다. 알 아민은 시리아의 아랍인들로 일부 군대를 새로이 증원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812년 4월 그는 마침내 바그다드에서 포위되어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813년 9월에 도시는 함락당했다. 그 전에 이라크와 아라비아 칼리프의 지위에서 퇴위당했다고 알려진 알 아민은 항복하기를 원했지만 살해당했다. 그러나 이는 알 마문의 명령과는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동부 이슬람에서 가장 잔인하다고 알려진 내란이 끝났다. 이 전쟁은 하룬 알 라시드가 잘못된 자문을 받아 후계자를 결정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또한 이 내전은 아바스 제국의 내부 분열상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두 형제(알 마문이 지적으로 훨씬 우월했음) 사이의 개인적 적대감뿐만 아니라 알 라시드의 통치기간 동안 분명해진 서로 다른 정치적·종교적인 경향간의 갈등에서 빚어진 결과였다.

즉 알 아민이 전통주의와 아랍 문화를 강조한 반면, 알 마문은 사상의 새로운 흐름과 외부의 영향에 대해 개방적이어서 이란의 유명인사와 동부 주들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칼리프로서의 통치

알 마문은 아바스 제국 전체를 지배하는 칼리프가 된 후에도 계속해서 메르프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그는 그곳에서 충실한 이란인 와지르 알 파들의 도움을 받았다. 알 마문은 수니파(마호메트의 삼촌 알 아바스의 후예로서 아바스 왕조 칼리프의 지지자)와 시아파(마호메트의 조카이자 사위인 알리의 후손 및 그 지지자)로 분열된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고자 결심하고, 동시대인들을 놀라게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위까지 위태롭게 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는 후계자로 자신의 가문 출신이 아니라 알리의 후예인 알리 알 리다를 지명했으며, 적대적인 두 가문을 화해시키려는 가시적인 시도로 알리 알 리다에게 자기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했다. 또 잇따른 화해의 상징으로서 전통적인 아바스 가문의 흑색기 대신 알리 가문의 녹색기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극적인 조치는 기대한 성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것은 시아파 과격분자들을 진정시키는 데 불충분했으며 오히려 이라크 등지의 정통주의자나 수니파들을 격분시켰다. 수니파들은 바그다드에서 알 마문의 폐위를 선언하고, 새로운 칼리프로서 제3대 칼리프 알 마디의 아들인 아바스 가문의 이브라힘을 추대했다. 이 반란 소식이 마침내 알 마문에게 전해지자 그는 재빨리 메르프를 떠나 바그다드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 긴 여정 동안 2가지 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즉 818년 2월 와지르 알 파들이 암살당했고, 같은 해 8월 알리 알 리다가 급작스런 병으로 죽었다(연대기는 알리 알 리다의 죽음에 대해 독살이라 쓰고 있음). 이렇게 해서 후계자의 지위에 오름으로써 칼리프 계승 질서를 어지럽힌 사람과 그 정책에 밀접하게 협조해오던 와지르는 제거되었다. 알 마문 자신은 부정했지만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두 사람의 죽음을 그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뒤 15년 동안 알 마문은 현명한 통치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각료들을 빈틈없이 통제했고 더이상 와지르에게 전권을 주지 않았으며 총독들을 엄격히 통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호라산의 총독으로 임명된 장군 타히르에게는 상대적인 자치를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구 철학·과학에 대한 지원

바그다드에 도착하자마자 알 마문은 알리 후예들과의 화해정책을 포기하고 그 상징으로 아바스 가문의 전통적인 흑색기를 다시 내달았다.

그러나 아랍 세계의 통합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려는 희망은 버리지 않고 더 우회적인 노선을 취했다. 그는 메르프에서 이미 무타질라(Mu⁽ta-zilah) 운동의 대표자들에 대해 명백한 동조를 표명했었다. 이슬람에서 이 운동의 지지자들은 합리적인 사유방식을 채택했고, 고대 그리스나 헬레니즘 철학자들의 저서로부터 마니교(이란에 생겨난 이원론적 종교) 같은 교리의 영향에 대적하는 데 적합하게 보이는 추론방법을 빌려왔다.

알 마문은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저서의 번역을 장려했고, '지혜의 전당'이라는 학당을 세워 번역자들을 두었는데 대부분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이었다. 그는 또한 이슬람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중요한 저서들의 사본을 비잔티움으로부터 수입했으며, 과학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이슬람 학자들이 고대로부터 전수받은 천문학 지식을 확인해볼 수 있는 천문대도 세웠다.

알 마문은 번역가들과 과학 연구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모든 백성들에게 순수신성(純粹神性) 개념,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 및 인간의 전적인 책임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무타질라 교의를 강요했다.

이 신정론(神正論)의 매우 혁신적인 측면들 가운데 하나는 신의 말씀인 〈코란〉이 영원불멸한 것이 아니라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수긍한 일이다. 이런 교의는 아바스 정통주의를 지키려는 학자나 경전 해설가들의 영향력을 감소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부도덕한 통치자에 대한 반란을 정당화시켰기 때문에, 이 교의는 칼리프의 뛰어난 도덕성과 종교성을 요구했다. 이런 무타질라 교의는 아바스 칼리프들이 그들 권위의 근거로 삼았던 전통적 관념에서 어긋난 것이며, 이 교의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은 시아파에 대한 공공연한 동조를 표명했다.

알 마문은 무타질라의 지적인 엄밀성에 끌렸으며 거기서 새롭고 더욱 유연한 칼리프의 통치개념을 받아들이도록 여론을 부추길 수 있는 수단들을 발견했다. 사실 827년에 '창조된' 〈코란〉이란 명제를 지지하겠다고 했을 때, 알 마문은 마호메트의 다른 교우들에 대한 알리의 우위성도 주장했다. 이러한 알 마문의 입장은 분명한 정치적 태도를 나타냈다.

무타질라 교의의 강요

833년초 알 마문은 모든 백성에게 무타질라를 신봉하도록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자신은 타르수스 지역에서 비잔틴 원정중이었기 때문에, 그 임무를 바그다드에 있는 그의 대리인인 경찰국장 이삭 이븐 이브라힘에게 위임했다. 이삭 이븐 이브라힘은 먼저 카디(qadis:판사)들을 모두 불러 무타질라 교의를 인정하도록 다그쳤다. 이슬람교의 전승인 하디스 전문가들에게도 교의를 강요했는데 이 집단의 반발이 커지자, 칼리프는 위협을 통해 이를 가라앉히려고 했다. 몇 사람은 〈코란〉이 '창조된' 저작이라는 것에 반대하면서 완강히 반발했다.

이슬람 법학파의 하나인 한발리 학파의 창시자 아흐마드 이븐 한발이 그 대표적 인물인데 그는 엄한 감시하에 칼리프에게 압송되었으나, 833년 타르수스에서 알 마문이 갑자기 죽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용서되었다. 전통주의자들이 재판(mihnah)이라고 부르는 이 일화는 알 마문이 강요하려던 믿음에 반발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여주며 그들의 반대가 커서 칼리프들은 몇 십 년 뒤 신앙의 방향을 돌려놓으려는 의도를 버리고 전통적인 교리로 복귀했다(미흐나).

평가

뛰어나고 영민한 두뇌를 가진 알 마문은 정치적인 영역에서도 개인적 견해를 내세웠지만 현실화시키지는 못했다.

그는 결코 공동체의 분열상황을 종식시킬 수는 없었다. 매우 드문 편견 없는 지도자라는 평판을 받기도 했지만 통치 말기에 이슬람 공동체에 유익할 것이라고 스스로 판단한 교의를 강요하는 과정에서 폭력의 사용도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이미지는 다소 손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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