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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인간이 생명의 유지 및 성장에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해 음식을 먹는 양식화된 행위.
목차
펼치기- 서양 식생활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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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식생활의 변천
- ┗ 중국
- ┗ 인도
- ┗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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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아니아의 식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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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식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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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식생활
- ┗ 개요
- ┗ 상고시대
- ┗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 ┗ 고려시대
- ┗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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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식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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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식생활
인류의 기본 생활 중의 하나로서 문화적 행위를 포함한다는 데 특징이 있다. 즉 인간은 식생활을 통해 식욕을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미각과 시각을 만족시킨다. 따라서 음식을 어떻게 요리하고, 어떤 그릇을 사용할 것인가 등이 식생활에 포함되는 문제인 것이다. 식생활의 양식은 시대나 민족에 따른 문화의 한 부분으로서 풍토나 전통의 바탕 위에서 조금씩 다른 양식으로 굳어져 왔다.
서양 식생활의 변천
원시시대
인류의 식생활에 가장 큰 혁신을 가져온 것은 불의 발견이었다.
불을 사용하기 전 원시시대의 인류 최대의 관심사는 굶어죽지 않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들풀이나 과실, 잡아먹을 수 있는 들짐승 및 어패류가 인간의 주식을 이루었는데, 불의 발견으로 익힌 음식을 먹기 시작했으며, 그와 함께 식량의 계획생산에 착안하여 유목민 또는 정착민의 형태로 농경과 축산을 시작하게 되었다.
고대 이집트
이집트에서는 이미 1만 년 전부터 농업이 행해져왔다.
BC 3000년경부터 파라오의 치하에 고도의 문화를 발달시켰던 이집트인들은 당시에 이미 조류, 어패류, 야채류, 대추야자의 열매, 마늘, 파피루스 순 및 각종 열매를 먹었다. 조미료로는 아비시니아의 암염을 먹었는데, 바닷소금은 종교적인 이유에서 금지되었다. 빵이 주식이었으며, 지위가 높은 귀족이나 제후들은 각기 자기 소유의 빵집을 소유하고 발효시키지 않은 딱딱한 빵을 만들어 먹었다. 포도주는 오늘날의 것과 똑같은 것이었으리라 추측되나, 돼지고기·잠두 등은 역시 종교적인 이유에서 금지되었다.
평민들의 식사는 소박하여 야자열매·생야채·생선 등을 먹었으며, 피라미드 건설에 동원되는 사람들에게는 양파·파슬리·마늘 등이 지급되었다.
고대 동방의 여러 나라
메소포타미아는 인류 문명발상지의 하나로서 천혜의 기름진 토지를 바탕으로 눈부신 문화를 꽃피웠다.
그중 가장 오래 된 것은 3,000년에 걸쳐 번성했던 수메르인의 문화였다. 그들은 가축을 사육했으며, 이집트와 비슷한 수준의 농업을 행하고 있었는데 특히 밀 종류의 생산이 많았다. 한편 칼데아 지방에서는 채소의 재배에 전력했다.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에는 여러 가지 식용식물 외에 조류, 육류 및 각종 어류가 열거되어 당시 식생활의 단면을 보여준다.
음료로서는 포도주 외에 맥주도 마셨으며, 효모의 사용법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포도주에 대한 이야기가 성서 속에 500여 회나 나오고 그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이야기되고 있으며, 팔레스타인에서는 여자들에게 포도주 마시는 것을 특별히 금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중동의 다른 여러 나라와 마찬가지로 헤브루에서도 여자가 식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또 항해를 주로 하는 페니키아인들은 농경이나 조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식민지였던 카르타고에서는 농업이 중시되었으며, 특히 포도주 생산이 유명했다.
고대 그리스
그리스는 평원이 없는 석회질 땅으로 초목의 혜택을 받지 못한 나라이다.
따라서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서쪽 아르카디아에서는 오로지 도토리를, 반도의 북쪽에서는 수유나무 열매를, 그리고 아테네 주변에서는 무화과를 빵이나 죽과 함께 먹을 수 있을 뿐이었다. 특히 아테네에서는 밀가루에 대한 정책이 엄격하여 소맥 생산자들이 아테네 이외의 지역에서는 판매할 수가 없었다. 빌레 항에 들어오는 밀가루의 2/3는 아테네에서 소비되었으며 나머지 1/3만이 다른 곳으로 수출되었다. 아테네에서 소비되는 밀가루의 대부분은 식민지 테베에서 반입된 것이었다.
그밖에 발달한 해안선을 이용하여 어패류를 채취해 먹었으나, 풍족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페리클레스 시대(BC 6~5세기)가 되면서 요리가 그리스인의 일상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빵은 변함없이 발효시키지 않은 것이었지만, 밀가루와 보리를 사용한 딱딱한 빵이 만들어졌다. 또 포도주 외에 이집트 술, 소금, 꿀 등이 있었으며 설탕은 의약품으로 취급되었다. 육류 요리도 발달해서 돼지고기 요리 외에 거의 모든 종류의 가금·야금(野禽)이 식탁에 올랐다.
호메로스에 의하면, 트로이 전쟁에 출정했던 군인들은 자기들 스스로 요리하여 먹었다고 하지만, 국운이 융성해지자 전문 요리사가 등장하게 되었다. 요리사들은 권력자의 가정에서 일하거나 임시로 고용되기도 했으며 그들을 위한 직업 소개소까지 있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식사는 일종의 제사적 색채가 짙었는데, 식사를 시작할 때 고기의 일부를 불에 구워 희생물을 대신했고 포도주를 바쳤다.
당시에 어떤 사람이 디오게네스에게 "식사는 언제 하는 것인가?"라고 묻자, 그는 "부자는 먹고 싶을 때에 하고 가난한 사람은 배가 고플 때에 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식사는 보통 하루에 3번 하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하루 3번을 채우지 못한 경우도 많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대 로마
이탈리아 반도에 살았던 최초의 문화민족은 에트루리아인이었다.
그후 로마인이 주변 민족을 차례로 정복·합병함으로써 거의 이탈리아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초기 로마인들의 식사는 채식이 주였으며, 내용은 아주 부실했다. 주식은 풀르스, 또는 풀르멘둠이라 불리는 곡물죽이었고, 그밖에 콩류·양배추·양파·마늘 등이 주요식품이었다. 초기에는 밀가루를 사용할 줄 몰라서 밀을 부숴서 죽을 쑤어 먹었다. 밀가루 빵을 가정에서 만들기 시작한 것은 트라야누스 황제(52~117) 때부터였다.
로마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아우구스투스(BC 63~AD 14) 이후의 제정시대(~340경) 동안 채식은 잡식으로 바뀌었으며, 들짐승고기보다는 가축고기를 먹게 되었다.
기름은 올리브유가 주를 이루었고, 소금·식초·포도주가 사용되었지만 설탕은 쓰이지 않았다. 주요조미료로는 지금의 간장에 해당하는 가룸이 있는데, 여기에 물·기름·식초·포도주 등을 넣으면 각각 4종류의 가룸이 만들어졌다. 고대 로마인들은 초기에는 하루 3회의 식사를 했다. 그러나 1세기말부터는 아침은 냉수 한 잔으로 대신했다. 점심은 신선한 고기와 과실에 포도주와 냉수를 곁들여 먹었다.
주로 현관 앞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목욕이나 손을 씻는 의식은 없었다. 이에 비해 저녁은 대단히 성대하여 일종의 주연과도 같았다. 대개의 로마인들은 향연을 즐겼는데, 네로 황제는 정오부터 시작한 향연을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했다고 한다. 고대 로마의 유명한 미식가로는 아피키우스를 들 수 있다. 그는 유럽 최고(最古)의 요리서를 남겼으며, 전재산을 먹는 일에 써버렸다고 한다.
건국 초기의 로마인들의 생활은 검소했으나, 여러 지역을 정복해감에 따라 동서양의 갖가지 진미를 알게 되었고, 그 결과 그들의 식탁은 더없이 사치스러워졌다. 그리하여 시민의 가장 절실한 소망을 나타내는 '빵과 투기(鬪技)'라는 말이 생길 만큼 조악한 식사로 시작했던 로마는 미식(美食)으로 멸망해갔다.
중세 유럽
BC 1세기경에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해온 갈리아인은 처음에 독일에 거주했다.
그들은 돼지를 사육해 돼지고기를 먹었으며, 햄과 순대를 만들었다. 또 보리로 맥주를 만들었고 떡갈나무 종류로 술통을 만들었다. 돌소금을 채취해 때로는 그것들을 로마에 팔기도 했다.
갈리아인들이 독일에서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방으로 이동할 당시에는 돼지나 염소보다 들소를 많이 먹었다. 그들은 고기를 끓이거나 구워 먹었고 훈제로 만들어 대량 소비했다. 그리고 들소를 다 잡아먹었을 무렵에 소를 사육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유럽 목축의 시작이었다.
문헌에 의하면 갈리아인들은 건초를 깔고 앉아서 식사하거나 그다지 높지 않은 식탁을 땅에 놓고 식사했다. 식기로는 토기·은기(銀器)·청동기를 사용했으며, 때로는 소쿠리 종류도 썼다. 그후 로마에 정복되자 로마 문화에 동화되어 갔으며, 농경을 주로 하면서 도시를 이루고 로마의 식생활을 받아들였다. 그 이전까지는 갈리아인과 똑같은 생활을 했던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인들은 중세 초기에 갈리아인들의 땅에 들어오자, 갈리아인들이 이루어놓은 로마화한 갈리아 문화에 동화되어 꽃으로 장식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음식 역시 로마화한 갈리아인의 사치를 흉내냈다.
5세기에 들면서 갈리아 지방을 통일한 프랑크인들은 프랑크 왕국을 세웠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전국 곳곳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들을 통해 로마의 식생활 전통이 게르만족 사회에 깊이 침투했다. 카를 대제 때는 식품 취급에 관한 칙령을 내려 베이컨·쇠고기·식초·포도주·치즈·버터·맥주·밀가루 등의 식품위생에 대해 규정했다.카롤링거 왕조 때에도 로마의 사치스러운 식생활 풍조는 계속 도입되었으며, 아피키우스의 요리법을 배우기도 했다.
그 이전까지는 정찬에 여성이 동석할 수 없었는데, 카를 대제 때부터 그것이 허용되었던 듯하다. 또 식사할 사람들은 각자 나이프를 가지고 식탁에 앉았으며, 스푼은 그다지 쓰이지 않았고 포크는 전혀 없었다.
9~10세기에 걸쳐 전란과 흉작으로 국토가 황폐해지자, 식생활 역시 황폐하게 변했다. 일부 수도원을 제외하고는 사치스러운 식사는 생각지도 못했으며, 여러 곳에서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자들이 생겼다. 라울 그라펠이라는 방랑 수도사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당시에 인육을 먹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예도 있었다고 한다.
그후 십자군 원정에 의해 동방의 여러 나라로부터 생강·월계수잎 등 새로운 향신료가 전해지면서 유럽 소스의 맛이 일시에 변화되었다. 이들은 베네치아를 경유하여 전 유럽으로 팔려나갔다. 곡류로는 대맥·소맥·호밀 등이 경작되었고, 440년 이래 제빵·제과업은 특허를 얻어서 빵류·과자류를 제조·판매했다. 또 나폴리에는 빵보다도 먼저 마카로니가 공업화되었고, 육류의 소비도 급격히 증가했다.그러나 하층민의 생활은 궁핍했다. 14세기에는 타유방이라는 사람이 〈르 비앙디에〉라는 이름으로 프랑스 최초의 요리서를 저술했다.
또한 궁정에서는 샤를 7세의 애첩인 아니에스 소렐 등이 유능한 요리사를 고용하여 왕에게 훌륭한 음식을 대접하게 했는데, 여러 종류의 요리에 그 이름들이 남아 전한다.
16~18세기
1535년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감자가 소개되자, 독일 등 밀이 재배되지 않는 북방 여러 나라의 식량사정은 점차 호전되어 갔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식생활은 수송의 곤란으로 인해 다양하지 못했으며, 지방의 생산물에 따라 현저하게 달랐다. 그때까지 유럽에서는 이탈리아 요리가 최고로 꼽혔다. 프랑스 왕 앙리 2세와 앙리 4세가 향신료의 수입으로 부자가 된 이탈리아의 메디치가(家)에서 각각 왕비를 맞아들인 결과, 프랑스 궁정요리는 이탈리아에서 온 뛰어난 요리사에 의해 두드러지게 향상되었다.
셔벗, 이탈리아식 소스 등이 소개되자, 귀족들은 식사법을 배웠고 이들 요리는 유럽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때는 아직 포크가 없었고, 왼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었으므로 손을 닦기 위한 냅킨이 사용되었다. 궁정에서는 접시마다 냅킨을 바꿔냈다. 16세기에 〈수상록〉을 쓴 몽테뉴는 그의 글에서 "일반 가정에서도 접시마다 냅킨을 바꾸는 것이 좋다"고 썼다. 당시에도 서민의 식탁은 보잘것없었으므로 앙리 4세는 "백성들에게 1주일에 2번씩 닭고기를 먹이고 싶다"고 한탄했다고 전한다. 이무렵에 올리베르 드 세르에 의해 채소의 재배법이 제창되었다.
17세기에 들면서 프랑스에서는 미식가였던 루이 14세의 영향으로 새로운 조리법이 연구되었고, 식사법에도 일정한 규칙이 생겼다.
17세기말에는 채소와 과실의 재배가 큰 진전을 이루었으며, 과실건조법이 행해졌고 보존식도 발전했다. 각지에서 포도주가 생산되었고, 1668년 이후에는 발포성 샴페인이 만들어졌다. 프랑스 요리가 가장 발달했던 18세기에 루이 15세의 식탁에 12코스짜리 요리가 등장했다. 유명한 조미료인 마요네즈 소스는 그 무렵 리슐리외 추기경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미식의 정점에 달했던 궁중의 식생활에 비해 농민들의 식생활은 가난했다.
고기는 일요일이나 축일에 수프에 베이컨을 넣어 먹는 정도였고, 음료도 포도주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B. 사바랭은 1740년에 남긴 기록에서 당시 도시 중류가정의 식사에 대해, "제1코스는 오트볼, 제2코스는 칠면조구이·채소요리·샐러드·크림, 제3코스는 치즈·과일·잼"이라고 소개했다.
한편 18세기의 영국에서는 신대륙으로부터 감자·당근·옥수수·토마토 등의 식물이 도입되면서 식생활이 개선되었으며, 이것은 유럽 각지로 전파되었다.
조리 기술의 진보와 함께 수프 종류에는 스푼이 사용되었고, 1720년경부터 끝이 4개로 갈라진 포크가 유럽 전역에 보급되었다. 또한 러시아에서는 1709년 인접 제국을 격파한 표트르 대제가 왕위에 올라 러시아인을 중심으로 한 국가를 확립했는데, 그들의 식생활은 대단히 빈약했으나 프랑스인 요리사들에 의해 19세기에 들어 두드러진 향상을 보았다.
19세기 이후
18세기 후반에 일어난 산업혁명은 식생활에도 풍요로움을 가져왔다.
식품의 보존법이 발달하는 한편, 수송수단의 발달에 따라 먼 거리까지 신선한 식품이 공급되게 되었다. 그와 함께 요리기술도 정점에 달해, 오늘날 문명사회에 널리 알려진 서양요리가 이때에 확립되었다. 또한 마가린이 개발되어 버터 제품의 부족을 보완했고, 가종 유제품의 개발도 눈부시게 이루어졌으며 여러 가지 치즈와 함께 요구르트도 만들어졌다. 파리에 일류 레스토랑이 생긴 것은 1865년의 일이며, 메뉴는 콩소메·알요리·가금요리 등이었다. 파리에 이후 수많은 레스토랑이 생겨났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시에는 극심한 식량난에 부딪혔으며, 전쟁 이후에는 식품의 생산과 조리기술이 한층 발달했다.
그와 함께 영양학과 식품공업이 급속한 발달을 보았다. 다만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식량사정이 곤란한 가운데, 마가린에 버터의 맛을 가미하고 커피 대용품에 커피 향기를 넣는 방법 등이 고안되었다. 20세기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조리기술이 발달했는데, 이는 많은 유명 조리사의 등장에 힘입은 것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은 〈요리지침〉·〈식단의 서(書)〉 등을 쓴 에스코피에로서, 독일 황제에게서 '요리사의 황제'라고 격찬받은 바 있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영국의 유명한 호텔 주방에서 보냈으며, 그의 저서는 유럽 및 미국에서 출판되어 프랑스 요리의 진수를 세계에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미식에 대한 의식도 달라졌으며, 식사는 즐기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생존하기 위한 것이 되었다. 또한 살을 빼기 위한 미용식도 등장하여 전통적인 프랑스 요리는 점차 퇴조하는 추세이다.
동양 식생활의 변천
중국
중국땅에 3족회도(三足灰陶)가 등장한 것은 신석기시대였다.
음식을 끓이거나 찌는 데 쓰는 토기로서 부뚜막의 역할까지 겸하는 대단히 편리한 것이었다. 중국에서 농업이 시작된 것은 은(殷)나라 때부터이며, 은·주(周) 시대에는 조·수수·보리 등의 곡식과 육류를 먹었다. 한(漢)나라 때는 조가 주식이었으며, 그밖에 보리·밀·쌀·수수·콩 등의 곡물과 감자류, 참외·파 등의 채소류, 밤·복숭아·밀감 등의 과일, 그리고 조류·어류·양·돼지 등의 고기를 먹었다. 후한 때는 밀가루가 등장하여 분식이 시작되었고, 조나 쌀 등은 낱알인 채로 시루에 쪄서 먹었다.
당나라 때는 차를 마시는 풍습이 생겼으며, 송나라 때는 사탕수수의 재배가 시작되었다. 전매제도에 의해 보급되는 소금·술의 소비량이 급증했으며, 또한 식생활의 향상과 함께 음식점이 등장하고, 돼지고기를 주재료로 하는 요리가 발달해 오늘날의 중국요리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면류(麵類)가 다양해지고 생선이 곁들여지게 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쌀을 주식으로 하게 된 것은 명(明)·청(淸) 시대의 일이나, 대개는 고구마·콩 등의 잡곡을 섞어먹었다.
오늘날 세계 제일로 칭송되는 중국요리가 정착한 것은 청대의 일이다.
세계 면적의 1/4을 차지하는 광대함으로 인해 중국요리는 지방마다 기후·풍토·산물(産物)이 달랐으며, 따라서 청조 궁중요리를 포함한 베이징[北京]·상하이[上海]·난징[南京]·쑤저우[蘇州]지방, 광둥[廣東]·푸젠[福建] 지방, 쓰촨[四川]·윈난[雲南]·구이저우[貴州] 지방 등의 요리와 맛에는 독특한 개성이 있었다. 이들 요리는 크게 차이[菜:요리]와 뎬신[点心:가벼운 식사]으로 나뉘었으며, 메뉴도 궁정요리·접대요리·가정요리에 따라, 그리고 계절·행사·기호 등에 따라 달랐다.
전반적인 공통점은 주객(主客)에 엄격한 구별이 있었고, 식사는 생활과 사교의 중심이 되는 일로서 식사시에 말을 많이 했다는 점이다. 조미료로는 각종 식물성 기름을 사용했다. 남쪽에서는 쌀을 주식으로 하는 밥과 죽을, 북쪽에서는 보리·옥수수·조·수수 등의 잡곡식을 일상식으로 했는데, 빈부와 신분의 차이에 따라 음식도 크게 달랐다. 농촌에서는 보통 하루 2식을 먹었고, 남녀가 따로 식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중화민국시대의 농촌에서는 하루 3식이었고 농번기에는 4식이 행해졌다고 하나, 빈농은 아침밥·저녁죽의 2식이었으며 여기에 감자단자나 쌀겨 등을 먹었다.
부식은 채소·두부 등이었고, 생선과 돼지고기 등은 서민들로서는 맛보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인도
인도는 지리적 조건, 많은 종교, 수천 가지로 갈라지는 카스트 제도 등 여러 가지 사정에 따라 각각 다른 식생활 양식을 유지해온 나라인데, 특히 힌두교·자이나교·이슬람교·조로아스터교·그리스도교 등이 침투해 온 시기에 따라 식생활 양식이 조금씩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인도의 식생활 관습에서 종교나 종파를 초월하여 공통성을 가진 것은 손가락은 신이 내려준 젓가락이라는 믿음 아래 모든 음식을 오른손 손가락으로 집어먹는 것과, 음식에 카레 가루로 대표되는 풍부한 향료와 기름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또 식사가 사교(社交)에 이용되는 일은 동일교파·동일계급 내에서만 가능하며, 가정에서의 식사는 보통 주부가 뒷바라지한다. 문헌에 의하면, 1930년대 인도 봄베이 주 농촌의 지주·자작농의 식사는 하루 2식이었으며, 전날밤의 음식을 조금 남겨 두었다가 이른 아침에 그것을 먹고 들에 나갔다.
오전 11~12시에 먹는 첫번째 식사의 주요 메뉴는 키차디라고 하는 죽 종류와 망고절임이었고, 때로는 버터를 먹기도 했으며 축일이나 잔치 때는 밀가루 음식을 먹었다. 2번째 식사는 저녁 8시경에 하는데, 바자리 또는 코도라라고 하는 음식에 우유를 섞은 빵, 야채, 채소절임 등을 먹었다. 그러나 소작인의 경우 아침은 아예 없었으며 점심과 저녁만을 먹었는데, 흉년이 든 해에는 횟수가 더 줄어들기도 했다. 또한 식료품을 모두 구입해야 하는 도시노동자의 경우, 탄수화물 위주의 농촌에 비해 지방질 위주의 음식을 먹는 편이었다.
현재 인도의 서북 지방은 밀가루를 주식으로 하고, 동서 벵골과 첸나이 지방은 쌀을 주식으로 하고 있는데, 금주(禁酒) 및 채식주의를 실천하는 힌두교도의 주식품은 곡류·우유·과일, 그리고 물을 타서 묽게 한 엉긴 우유 등이다.
이처럼 엄격한 방침을 가졌음에도 시바파는 그 반대여서 브라만·바이샤층에서도 오늘날에는 부자와 마찬가지로 은밀하게 술과 고기를 먹는다고 한다. 농민들은 야자즙을 발효시켜 만든 술을 마시지만, 일반적인 음료는 과일 주스·홍차·커피·우유·물 등 이다. 또한 힌두교나 자이나교에서도 음식물은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교의(敎義)에 따라 고기와 채소의 종류를 선택해서 먹는 이슬람교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 것으로 여겨진다.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쇠고기·돼지고기를 모두 먹으며 술도 자유롭게 마신다.
옛날에는 남녀가 식탁에 함께 앉지 않았다고 하나 현재는 함께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인도에서 가장 근대화한 식생활 문화를 가진 종파로 꼽힌다.
종교의 지배에 따른 식생활의 영향은 식기(食器)에도 나타난다. 힌두교도는 놋쇠접시나 바나나잎, 또는 다른 나뭇잎을 접시 모양으로 엮은 그릇을 앞에 놓고 상에 앉아서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는다. 토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한번 더럽혀진 것은 깨끗해지지 않는다는 신앙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교도는 토기나 알루미늄제 용기를 사용하며,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여기에 포크와 나이프도 사용한다. 현재 인도의 신헌법은 종교·인종·카스트·성(性)·출생지 등에 의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으므로 인도의 식생활은 점차 근대화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식생활 중 공통점은 대부분 쌀을 주식으로 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수렵채집, 밭농사 위주의 농경문화, 논농사 위주의 농경문화 등 역사적 발달에 차이가 있듯이 식생활도 지역·종족·문화에 따른 차이가 있다. 동남아시아 반도부에서는 중국의 식생활 영향이 강하고, 이슬람교도가 많은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에는 이슬람의 식생활이 도입되었다. 또한 인도식 조리법의 영향은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발견되지만, 인도의 우유 이용 관습은 전래되지 않았다. 여러 가지 향신료의 발달, 발효식품의 발달도 동남아시아 식생활의 특색 중의 하나이다.
이밖에 콩을 삶아서 세균이나 그밖의 균류로 발효시킨 음식, 쌀밥에 생선이나 육류를 섞어서 유산발효시킨 초밥 등이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만들어지는 음식들이다. 또한 내륙부에서는 생선을 소금에 절이며, 그 침출액을 조미료로 사용한다.
오세아니아의 식생활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과 태즈메이니아 섬의 주민들을 제외하면, 오세아니아의 폴리네시아·멜라네시아·미크로네시아의 주민들은 농경생활을 하던 사람들로서 농산물을 주식으로 한다.
오세아니아의 가장 중요한 작물은 타로토란과 참마이다. 고구마는 뉴질랜드의 원주민, 파푸아뉴기니 여러 종족의 주식이었다. 뉴기니·멜라네시아 습지에서는 사고야자의 전분이 주식이었다. 바나나·코코스야자 등도 오세아니아 전역에서 재배되는 작물이다. 이들 재배 작물의 특징은 거의가 영양번식하는 식물로서, 종자번식되는 곡류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백인이 들어오기 전의 가축은 돼지·개·닭뿐이었다.
해안에서는 어업이 성행했으며, 어패류를 많이 섭취했다. 미크로네시아·멜라네시아 일부에서는 토기를 사용하여 음식을 끓이는 일이 행해졌지만, 폴리네시아에서는 철제 냄비가 도입되기 전까지는 물을 사용해서 음식을 끓이는 조리법은 행해지지 않았다. 오세아니아에 널리 퍼진 조리법에는 석증법(石蒸法)이 있는데, 구덩이 속에 달군 돌을 넣고 그 위에 바나나 잎 등으로 싼 음식물을 얹은 다음 흙을 덮어서 음식을 찌는 방법이다. 부식의 조리에는 코코스야자의 배젖에서 짜낸 소스가 이용되었다.
아프리카의 식생활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 된 생활양식을 전해주는 종족은 대륙 중앙부에 거주하는 피그미족,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먼, 탄자니아 내륙부의 핫자족 등 수렵채집민들이다. 그들은 들짐승과 들새, 그리고 과실과 근경류(根莖類) 야채를 주식으로 한다. 근래에 금속제 냄비가 도입되기 전까지 이들 종족은 토기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음식을 끓여서 요리하는 일은 없었다.
육류 및 근경류는 모닥불에 구워 먹었고, 과실은 대개 날로 먹었다. 식사 횟수도 정해져 있지 않아, 음식이 손에 들어올 때가 바로 식사시간이었다.
북아프리카 전역은 이슬람교권이므로 돼지고기를 금했고, 단식월(斷食月) 동안의 식사는 해가 진 후에만 허락되었다. 또한 보리로 만든 빵이 주식이었으며, 육류로는 양고기를 많이 먹었는데, 아랍 요리와 터키 요리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향신료를 많이 사용하는 요리법이 발달했다. 사하라 사막에서는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대추야자 재배가 성행했으며, 말린 대추야자 열매는 중요한 식품이었다.
사하라 사막에 사는 낙타 유목민들의 주식은 말린 대추야자 열매와 낙타젖이다. 빵을 굽는 식생활과 보리의 재배는 북아프리카와 아비시니아 고원의 여러 부족들 사이에서만 행해지며, 사하라 사막 이남에서는 볼 수 없다. 수단에서 동아프리카에 걸쳐 사는 사바나 유목민들은 소를 중요한 가축으로 사육하며, 그밖에 염소·양을 기른다. 주식은 우유이며, 요구르트나 버터 등의 유제품을 만든다.
사하라 남부 아프리카의 조리법은 콩류·감자류·바나나 등의 식품을 페이스트 모양으로 가공해서 먹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면 서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에서 카메룬에 걸쳐 동서로 펼쳐진 지대에서는 데친 감자를 절구에 찧어서 전병 모양으로 빚은 것이 주식이다. 서아프리카의 나이저 강 중부 지방에서는 아프리카 재래종 벼가 재배되며, 파보일드 가공하여 식용된다.
사하라 남부에서 가장 일반적인 곡물은 토신비에·수수·옥수수이다. 옥수수는 신대륙으로부터 온 식물인데 각지에 급속히 전파되어 재배되기에 이르렀다. 부식으로는 고기·생선·야채 등을 끓인 수프가 곁들여지는데, 여기에 소금과 향신료가 첨가되는 일이 많다. 또한 부식의 조리에는 식물의 씨앗에서 짠 식용유가 많이 사용되는 것이 특색이다.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인들이 가져온 옥수수·감자 등은 주식으로서, 토마토는 부식으로서 각지에 전파되었다. 또 아랍으로부터 양파·오이·사탕수수 등의 식품과 요리법이 들어와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요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편 동아프리카에는 19세기부터 인도의 카레 요리가 전해졌다.
한국의 식생활
개요
한국의 식생활문화는 기후·토질 등의 자연환경, 생활양식, 사회적 여건과 함께 변천해 왔다.
즉 북위 50°에 걸쳐 있는 지리적인 조건은 수렵과 목축에 알맞아 곡류와 육류 음식을 함께 발전하게 했으며, 국토의 3면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는 농경사회 이전의 주된 식량공급원이었다. 또한 4계가 분명하여 다양한 식품의 산출이 가능했고, 비철에 대비한 식품의 저장법과 가공법의 발달을 가져와 다양하고 특색있는 식생활의 기초를 이루게 했다.
상고시대
자료상 어느 정도 판명되어 있는 것은 빗살무늬토기시대 이후부터인데, 이 시대에는 강이나 바닷가에 거주하면서 조개줍기와 고기잡이에 중점을 둔 식생활이 영위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조개더미를 비롯한 각종 유적지에서는 조개류와 함께 많은 어류의 골편이 출토되었고, 짐승류로는 멧돼지·사슴·노루 등이 식용되었음을 보여 주는 자료가 출토되었다. 조류로는 꿩과 야생닭 등이 식용되었다. 식물류(植物類)는 거의 소멸되었지만, 일부 유적에서 도토리·밤과 함께 기장·수수·콩·보리 등의 잡곡류가 발견되었다. 주거지 안에서 발견된 화덕자리는 이때 이미 화식(火食)을 했음을 알려 주는 증거가 되고 있다.
한편 무늬없는토기시대로 일컬어지는 부족국가시대에는 농업이 정착되고 벼농사가 이루어졌으며, 소·돼지 등의 가축 사육이 성행했다. 식생활의 큰 변화로는 소금의 사용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식물류를 주식으로 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 시기에 발효법이 개발되어 술이나 장을 담그기 시작했고, 말리거나 굽는 저장법이 행해졌다.
식사형태는 주로 대형 토기를 사용한 공동식사였을 것으로 짐작되며, 토기 또는 나무로 만든 댓잎 모양의 숫가락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소반은 청동기시대에 사용되었는데, 최고(最古)의 유물인 낙랑삼족동반(樂浪三足銅盤)에서 보이는 3개의 짧은 다리는 좌식(坐式)생활을 했음을 알려주는 예이다.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삼국시대는 국가체계가 갖추어지고 농경이 확립된 시대로서, 농사에 소가 이용되었고 쌀과 잡곡이 주식이었으며 주부식(主副食)이 분리되어 정착했다.
또한 귀족과 서민을 가르는 신분제도의 도입에 따라 식생활 양식도 이중구조를 가지게 되었는데, 귀족은 쌀을 주식으로 한 데 비해 서민의 주식은 잡곡이었다. 식기도 귀족은 금·은기를 비롯하여 청동기·철기·칠기·유리제를 썼고, 서민들은 토기·목기를 주로 사용했다. 또한 메주 발효법, 식품의 염장법, 제빙풍습 등이 도입되어 식생활이 한층 풍요로워졌다. 부식으로는 무와 상추를 재배하기 시작했으며, 채소절임이 등장했다.
과실에는 잣·밤·자두·배 외에 제주도에서는 밀감도 생산되었다. 말·소·돼지·개·닭 등 가축의 사육 및 육류의 이용이 활발해졌고, 술·차(茶)와 같은 기호식품이 등장했으며, 기름·꿀·장·젓갈 등의 조미료의 사용과 함께 식품의 조리법이 다양해졌다. 식사의 횟수는 하루 2식 또는 3식이었다.
고려시대
농경정책이 적극 추진된 사회로서, 곡물 생산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밥과 반찬의 일상식 양식이 토착화했다.
숭불사조(崇佛思潮) 아래서 계층에 관계없이 육식의 절제가 행해졌으나, 고려 후기에 이르러 숭불정책의 퇴조와 함께 다시 육식이 활발해졌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소금의 전매가 이루어졌으며, 부식으로는 쌈·국·무침 등의 채소 음식이 발달했는데, 특히 종래의 채소절임과는 다른 나박김치·동치미 등의 침채류가 등장하여 우리 김치의 원형을 이루었다. 채소류에는 전시대의 것에 더덕·연근·오이·파·아욱·표고버섯 등이 쓰였다.
육류는 몽골의 영향으로 말과 소를 사육해 먹었으며, 닭·돼지·거위·오리 등도 식용했다. 국과 새우젓이 등장했고, 식초·참기름·물엿 등의 조미료도 도입되었다. 밥과 국의 기본 상차림이 정착된 것도 이 시대로서 밥에는 쌀밥·찰밥·잡곡밥 등이 있었고, 국에는 토란국·미역국·아욱국 등이 있었다. 그밖에 시루떡·가래떡·유밀과·다식·칼국수·메밀국수 등이 곡물을 이용한 별식(別食)으로서 현재와 거의 같은 방식으로 조리되었다. 특히 유밀과는 연등회·팔관회와 같은 국가적인 행사 및 대소 연회에 필수적인 의례음식으로 꼽혔다.
기호품으로 특기할 만한 것은 차와 술의 유행이었다.
신라시대말에 전래된 차문화는 고려시대에 들어 떡과 정과류(正果類)의 발달과 함께 의례음식으로 크게 융성했고, 그 결과 청자 찻잔과 물병, 은제 솥 등의 다기(茶器)도 발달했다. 또한 신라시대에 이어 맑은 술을 걸러내는 청주(淸酒) 및 계절에 따라 국화·청포 등의 꽃으로 빚는 화향주(花香酒), 각종 약재를 섞어서 빚는 약주의 제조가 행해졌으며, 몽골로부터 새로이 소주법(燒酒法)이 전래되었다.
이 시대에 많이 쓰인 그릇으로는 놋그릇과 무쇠솥·목기·오지그릇이 있었고 고급그릇으로는 금·은기, 청동기, 칠기 및 자기가 있었다.
조선시대
고려시대에 이어 권농정책이 추진되고 왕권중심의 중앙집권제도가 확립된 시기로서, 조상에 대한 봉제사와 가족제도에 따른 식생활이 중시되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서 식품의 저장·가공법, 조리기술이 한층 발달하고, 궁중음식 위주의 화려하고 풍요로운 상차림의 규범이 정착되었다. 주식은 역시 곡류로서 품종이 다양화하여 쌀의 경우만 해도 30종에 이르렀으며, 기장이 5종, 조가 15종에 달했다. 그밖에 수수·보리·밀·팥·콩·옥수수 등이 경작되었으며, 18세기 중반에 일본의 쓰시마 섬[對馬島] 전래된 고구마와 감자는 구황식품으로 추가되었다.
육류는 교통수단으로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소와 말의 도살이 방지되어 돼지·닭·개 등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수산물도 종류가 다양해져서 어류가 50여 종, 해조류가 10여 종에 이르렀는데, 명태가 이때 처음 등장했다. 그밖에 조개·오징어·어란·대합·꼴뚜기 등의 젓갈류가 만들어졌고, 새우젓·멸치젓 등이 전국적으로 소비되었다. 한편 채소류는 무·배추·송이버섯·시금치·미나리 등에 호박과 토마토가 외국에서 들어왔다. 특기할 것은 고추의 도입인데, 이는 일본에서 유입된 이래 젓갈류와 함께 김치에 쓰여 우리 식탁에 가히 혁명적인 변혁을 가져왔다.
그밖에 과실류에는 전시대의 것 외에 사과·포도 등이 추가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루어진 중인계급의 출현은 상하층의 간격을 좁혀 식생활 습관의 통일에 한몫을 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식생활의 가장 큰 특징은 궁중음식을 중심으로 한 의례음식의 발달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한식(韓食)의 기초가 된 것으로서, 지위에 따라 상차림이 달랐고 같은 사람이라 해도 생일·명절·향연에 따라 그 차림이 달랐다.
궁중의 경우 평일의 수라상에는 12첩을 차렸으며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왕이 받는 상에는 각종 음식을 높이 괴었는데, 이것들을 만들기 위해 진연도감(進宴都監)이라는 관청을 두었다. 각 전각(殿閣)마다 올리는 상의 이름, 상의 수, 음식의 가짓수, 분량 등이 모두 달랐다. 이러한 진연·진작(進酌)·진찬(進饌) 음식은 봉송(封送)이라 하여 양반 가정에 전해지기도 했다.
현대의 식생활
세계 각국의 식생활 역사에서 공통되는 점은 그것이 쌀을 주로 하는 곳이든 밀을 주로 하는 곳이든 그 지방과 민족에 알맞은 식생활 전통을 지녀왔다는 점이다. 또한 오늘날 식생활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풍토나 민족의 특수성뿐만 아니라 영양학 또는 식품학이라 불리는 새로운 과학지식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식생활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영양이다. 생명을 유지하고 건강을 보전하기 위해서 식사의 영양은 반드시 필요하며, 영양을 무시하는 식사를 계속하면 질병을 초래하므로, 식사는 언제나 영양의 균형을 고려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이 연구·제안되었는데, 식품을 몇 개의 군(群)으로 나누어 이 군에 속해 있는 식품을 가능한 한 빠짐없이 섭취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다. 또한 최근에는 식사에 함유된 영양소의 양과 그 배분을 중시하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 예로 학교 급식 등에서는 식사의 영양기준이 표시되고, 이에 따라 식사가 만들어진다.
미래의 식생활
인구의 세계적 증가, 식량공급의 부족 등이 예견되는 가운데, 미래의 식생활은 식량재료 확보를 위해 보다 공업화한 식품을 공급하는 일에 집중적인 노력이 경주되어야 할 것이다. 생물공학이 식량공급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은 필연적인 일로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감각의 식품개발도 전망된다.
이런 배경 속에서 세계의 식생활은 점점 복합적인 양상을 띠게 될 것이며, 그중 많은 사람들에게 선호되는 식사가 일상화될 것이다. 물론 각 지역의 특색 있는 식생활도 남아 있겠지만, 그것은 특별한 날에 행해지는 행사식(行事食)이 될 가능성이 짙다. 또한 노동형태의 변화에 따른 식생활의 변화도 생각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손쉽게 먹을 수 있는 패스트 푸드와 같은 음식들이 식사의 일부로 대체되고 있는 추세가 그런 현상이다.
나아가 인간이 건강을 유지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데 꼭 필요한 영양소를 합성하여 환약이나 캡슐 형태로 만든 것을 하루 1번 정도 먹게 되는 일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식사를 준비하는 수고를 더는 데는 더없이 간단한 방법이 되겠지만, 다만 먹어서 체력이 유지된다는 식의 식사는 심리적인 불만을 수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주요감각인 미각·시각·후각을 충족시키는 식생활이 요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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