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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3. 1. 17, 영국 맨체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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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5. 3. 26, 웨일스 카나번셔 라니스툼뒤 근처 티뉴이드 |
국적 | 영국 |
요약 제1차 세계대전 후반기에 영국의 정치를 지배했다. 죽던 해에 작위가 수여되었다. 로이드는 목사이자 제화공이었던 외삼촌 리처드로부터 훗날 자신의 인격으로 발현된 많은 신념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1884년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로이드 조지는 자유당의 이념, 웨일스인의 국가, 비국교주의가 서로 밀접히 연관된 분위기에서 성장했고, 비국교도들이 자신의 교구 무덤에 묻힐 권리를 법정투쟁을 통하여 확립시키는 과정에서 최초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1890년 카나번 선거구의 보궐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의회에 진출했고 55년 동안 의석을 지켰다. 자유당이 1895년 선거 이후 10년을 야당으로 있는 동안 로이드 조지는 자유당 급진파의 기수가 되었다. 자유당이 정권을 장악한 후 재무장관이 되었고, 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권력의 정상에 올랐다. 그는 정열과 웅변술과 능력을 통해 이미 당대의 지도적 정치가였으며 그의 총리직 취임은 큰 호응을 얻었다. 전후 중도 노선을 따랐으며, 아일랜드를 독립시켰다.
개요
제1차 세계대전 후반기에 영국의 정치를 지배했다.
죽던 해에 작위가 수여되었다.
초기생애
그의 아버지는 펨브로크셔 출신의 웨일스인(人)으로 맨체스터에서 초등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침례교 목사인 데이비드 로이드의 딸이었다.
로이드 조지의 아버지는 가난만을 남겨둔 채 1864년 6월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제화공이자 침례교 목사로서 카나번셔 라니스툼뒤에 살고 있던 오빠 리처드를 찾아갔다. 리처드는 여동생과 아이들을 보살폈고 로이드는 외삼촌 리처드로부터 훗날 자신의 인격으로 발현된 많은 신념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로이드는 외삼촌의 도움으로 14세에 사무변호사의 경력을 쌓을 수 있었으며, 포트매덕에 있는 법률사무소에 견습생으로 고용되었고(1879) 1884년에는 변호사 시험의 최종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웨일스에서는 아일랜드와 마찬가지로 토지를 소유한 성공회 신사(紳士)계급이 그들과 민족도 다르고 종교도 다른 켈트족을 지배하고 있었다. 로이드 조지는 자유당의 이념, 웨일스인의 국가, 비국교주의가 서로 밀접히 연관된 분위기에서 성장했고, 비국교도들이 자신의 교구 무덤에 묻힐 권리를 법정투쟁을 통하여 확립시키는 과정에서 최초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억압받는 교파의 옹호자였던 로이드 자신은 이미 소년시절에 종교적 믿음을 상실한 상태였다.
젊은 로이드 조지는 뭇 여성을 사로잡을 만한 멋진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수많은 연애 끝에 1888년 마거릿 오언과 결혼했고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와 딸 셋을 두었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행복하다고 할 수 없었는데 그가 가정에 충실하지 않은 채 여전히 염문을 뿌리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대개의 경우 마거릿은 남편을 편들었으나 그의 바람기는 그녀의 오랜 인내심에도 불구하고 그칠 줄을 몰랐다.
로이드 조지는 1890년 카나번 선거구의 보궐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의회에 진출했고 55년 동안 의석을 지켰다. 그는 하원에서 혼자 힘으로 명성을 획득했는데, 그의 배짱·매력·재치 그리고 탁월한 논쟁술 덕택이었다. 자유당이 1895년 선거 이후 10년을 야당으로 있는 동안 로이드 조지는 자유당 급진파의 기수가 되었다.
남아프리카 전쟁을 격렬히 반대한 그는 1901년에 조지프 체임벌린과 제국주의 보수당의 본거지인 버밍엄에서 린치를 당할 뻔하기도 했다. 다시 평화가 찾아왔고 밸푸어 총리의 교육법(1902)이 교회학교의 인가(認可)에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물의를 빚었다. 로이드 조지는 웨일스에서 대규모 소요를 일으켰다.
1905년 12월 아서 J. 밸푸어가 사퇴하고 헨리 캠벨 배너먼 경이 자유당 내각을 구성하게 되었을 때 로이드 조지는 상무장관으로 임명되어 중요한 입법을 추진했다(캠벨 배너먼). 해운업법(1906)은 선원들의 생활을 개선시켰지만 새로 건조된 선박의 만재흘수선(滿載吃水線)을 높임으로써 그들의 생명을 위태롭게도 했고, 특허·의장법(1907)은 영국 발명품에 대한 외국의 불법사용을 막으려는 것이었으며, 런던항법(1908)은 런던 항에 항만청을 설립하려는 취지였다.
그는 파업 해결을 위한 끈질긴 노력으로도 높은 명성을 얻었다. 1907년 11월 딸 메어가 17세의 어린 나이에 맹장염으로 죽었을 때 그는 잔인한 사별의 아픔을 맛보아야 했고, 그녀의 초상화를 볼 때면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재무장관 시절
캠벌 배너먼의 건강이 악화되자 재무장관인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가 총리직을 승계했고(1908), 애스퀴스는 로이드 조지를 후임 재무장관으로 지명했다.
이것은 대단한 승진이었으며 적어도 그는 애스퀴스 이후의 총리직에 대해 야심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 자유당의 운세는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상원은 자유당의 사회개혁입법을 저지했으며 자유당의 급진파들은 타개책이 없는 한 새로 생겨난 노동당이 자신들을 대신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갖게 되었다.
동시에 독일의 해군계획에 맞서기 위해 군함을 증설해야 한다는 여론은 사회개혁 부문에의 재정사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로이드 조지가 '국민예산'(1909)을 수립한 것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는데, 그 내용은 토지의 매매와 토지가치 증가에 대한 과세, 보다 높은 상속세, 3,000파운드 이상의 수입에 대한 특별부과세 등이 골자였다. 영국의 헌법관습으로는 상원의 예산안 간섭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이와 같은 진보적 입법이 상원의 거부권 행사를 초래하지는 않을 듯했다.
그러나 몇몇 현명한 의원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상원의 보수당 다수파는 예산안을 부결시키기로 결정했다. 국민예산을 둘러싼 의회파동은 두 차례의 총선거, 중대한 헌법적 위기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1911년의 의회법 통과로 이어졌으며 상원의 힘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 모든 책임은 애스퀴스 총리의 몫이 되었지만 로이드 조지는 귀족과 부유층에 대한 일련의 공격적 연설에서 애스퀴스를 적극 지지했다. 그의 연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라임하우스에서의 연설로서 지주계급, 특히 공작들의 탐욕을 통렬히 논박한 것이었다.
1913년 로이드 조지는 그의 경력상 가장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는 1912년 4월 검찰총장인 루퍼스 아이작스와 함께 미국 마르코니무선전신회사의 주식을 통상 가격보다 상당히 낮은 수준에서 구입했다. 미국의 마르코니회사는 영국 회사와 법률적으로 독립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고 대영 제국의 전역에 걸쳐 라디오 방송국망을 건설하자는 영국 회사의 제안을 정부에서 받아들였을 때 주식 가격은 급등세를 보였던 것이다.
로이드 조지와 아이작스는 마르코니회사의 주식 매입에 어떠한 밀약도 없었음을 다소 모호하게 진술했고 형식상 영국 회사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미국 회사도 포함하는 발언으로 추정되었다. 하원 특별위원회의 조사 결과 그들의 진술이 사실로 입증되었고 대다수의 당원들의 의구심은 풀렸지만 로이드 조지의 명성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사회개혁과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쟁 직전에 로이드 조지는 사회보험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독일을 방문했을 때(1908), 비스마르크의 보험 계획을 연구하여 깊은 감동을 받았고 비슷한 기초 위에서 의료 및 실업보험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1911년 그가 국민보험법을 입안하자 격렬한 반대가 일었고 노동자 계급조차도 환영하지 않았다. 노동자 계급은 '4펜스 대(對) 9펜스'라는 재무장관의 표어를 납득할 수 없었는데, 표어의 두 숫자는 각각 고용주와 국가의 보험분담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로이드 조지는 이에 단념하지 않고 탁월한 정치적 수완과 결단력을 발휘하여 의회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는 영국에서 현대 복지국가의 기초를 마련함으로써 일생일대의 업적을 남긴 셈이다.
그 당시 정부의 관심은 아일랜드 문제에 쏠려 있었지만 로이드 조지는 그에 관한 한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으며 대체로 대외정책 문제는 동료들에게 일임했다. 그러므로 1911년 7월 로이드 조지가 애스퀴스와 에드워드 그레이 경과의 신중한 협의를 거친 후 모로코 위기에 관하여 독일에게 엄중한 경고를 보낸 것은 다소 놀라운 일이었다.
1914년의 7월말과 8월초에 걸쳐 전쟁개입 문제가 내각을 온통 뒤흔들었을 때 로이드 조지는 고립파의 편에 섰고 재무장관직을 사임할 것을 신중히 고려했으나, 사태가 진전됨에 따라 태도를 반전시켰다. 그는 재무장관으로 남아 전시재정을 통괄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개
1914년 후반기와 1915년초의 몇 달 동안 로이드 조지는 군수품 생산증대를 강력히 주장했고, 이 과정에서 육군장관 키치너 경과 첨예하게 대립했다.
1915년 피셔 제독이 사임하자 애스퀴스 총리는 보수당과의 연립내각을 구성할 형편에 놓였다. 새 내각에서 로이드 조지는 군수장관으로 지명되었고 연합국의 승리에 중요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그가 취한 조치들은 이례적인 것이었으며 관료들에게는 충격적이기까지 했지만 로이드의 힘은 대단했다. 그는 대기업으로부터 가능한 원조를 얻어내었고 노동단체들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뛰어난 웅변술로 그들을 설득했다.
1916년 여름 솜 대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영국은 이미 충분한 보급물자를 확보해 둔 상태였다.
전쟁 초기에 로이드 조지는 전쟁 전략에 대하여 나름대로 명확한 견해를 갖고 있었는데, 서부전선보다는 근동(近東)에서의 측면공격이 바람직할 것으로 생각했다. 영국군의 최고지휘자들이 볼 때 로이드의 견해는 터무니없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더글러스 헤이그 경과 윌리엄 로버트슨은 그에게 서부전선의 공략만이 최선의 길임을 항상 주지시켰다.
1916년 6월 5일 키치너 경은 러시아로 파견되어 가던 도중 배가 독일 기뢰에 부딪치는 바람에 익사했다. 로이드 조지는 아일랜드 사태의 급진전으로 말미암아 동행하지 못했었다. 애스퀴스 총리는 약간의 망설임 끝에 로이드 조지를 육군장관으로 임명했다.
로이드 조지는 5개월 동안 육군성에서 일했지만 실제로는 대영제국 참모총장인 로버트슨 경이 거의 모든 중요한 권한을 행사했다. 로이드 조지는 이러한 제약을 몹시 불편해 했는데 전략적 쟁점에 있어 로버트슨과 견해를 달리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는 좌절에 빠진 채 점차 회의적인 시선으로 전반적인 전쟁의 흐름을 살펴보기 시작했고 친구들에게 회의감을 털어놓았다. 그들은 11월 말쯤이 되면 애스퀴스가 로이드 조지를 주축으로 하는 소위원회에 전쟁수행을 위임할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애스퀴스의 직무수행에 불안감을 느꼈으며 특히 보수당 쪽이 그러했다. 총리직 사퇴를 종용받은 애스퀴스는 12월 5일 결국 물러났고 이틀 후 로이드 조지는 대영제국 내각의 수반(首斑)이 되었다. 그는 보수당 지도자들의 후원을 받았으나 출중한 자유당 각료들이 애스퀴스와 함께 사임한 뒤였다.
총리시절
로이드 조지는 54세에 권력의 정상에 올랐다.
그는 정열과 웅변술과 능력을 통해 이미 당대의 지도적 정치가였으며 그의 총리직 취임은 큰 호응을 얻었다. 취임 즉시 23인의 비대하고 비능률적인 내각 대신에 비상 가동되는 5인의 전시내각을 출범시켰다. 그 결과 의사결정의 속도가 전반적으로 빨라졌다.
독일의 위협적인 잠수함 작전에 맞서 싸운 그의 노력은 유명하다. 독일은 1917년초의 몇 달 동안 영국군의 해상보급로를 차단시켜 식량부족 사태를 야기시켰다. 로이드는 해군성의 망설임을 무시한 채 호위선(護衛船) 체제를 강행시켰다.
식량부족의 고통은 대단히 심각했다. 농작물 생산을 증대시키기 위한 비상조치가 취해졌고 마침내는 식량배급제의 도입이 불가피했다(1918).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 로이드 조지는 최선을 다했다. 형식적인 비능률을 경멸했고 실제적인 행동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기로 결심했다.
로이드 조지는 대규모 전략 분야에서는 거의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영국군 최고사령부가 서부전선의 전략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능력이 있는가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회의적이었다. 1917년 2월 칼레 회담에서 로이드 조지는 영국군을 프랑스의 로베르 조르주 니벨 장군 밑에 예속시켜 임박한 대공세에 대처하게 했다. 헤이그와 로버트슨은 회담장에서야 이러한 계획을 알게 되었고 이후로 총리에 대하여 깊은 불신감을 갖게 되었다.
니벨 공세가 실패하자 로이드 조지의 입장은 약화되었으며, 여름에 플랑드르 지방에서 작전을 펴자는 헤이그의 제안을 거부하기 어렵게 되었다. 많은 망설임 끝에 로이드 조지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1917년 7월 31일 불운한 파쉔델레 공세가 시작되었다. 이 작전은 프랑스에 대한 독일의 공격을 미연에 방지했다는 의미는 있었지만 막대한 인명손실을 초래하고도 주요 목적달성에서는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이제 영국 최고사령부의 무능함을 확신하게 되었다(이프르 전투).
로이드 조지는 아직 공개적으로 그들을 공격할 수는 없었고 대신에 윈스턴 처칠 경이 "엄청난 공을 들인 불가사의한 책략"이라고 불렀던 일련의 정치공작에 착수했는데, 그 목적은 헤이그 아닌 다른 사람에게 연합군의 통합지휘권을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1918년 2월 로이드 조지는 로버트슨의 사표를 수리했지만 헤이그는 여전히 최고사령관으로 남아 있었다. 헤이그를 몹시 불신한 로이드 조지는 그가 공격을 재개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1917년 겨울 그의 병력을 고의적으로 감축시켰고 독일은 야심에 찬 대공세를 개시할 기세였다.
이러한 비상사태를 통하여 4월에 페르디낭 포슈 프랑스 육군원수의 연합군 통수권이 확립되었으며 5월에 가서는 상황이 안정되었다.
1918년 11월 휴전은 되었으나 로이드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평화시의 정당정치로 복귀해야 할 것인가 혹은 정치적 연합을 계속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사실 해답은 명확했는데, 보너 로는 협력할 태세였고 애스퀴스의 협조의사를 묻는 다소 의례적인 제안은 거절되었다.
12월의 선거에서 연합세력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베르사유에서 로이드 조지는 평화정착의 중요한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는 조르주 클레망소와 우드로 윌슨의 중간적 노선을 따랐지만, 시종 클레망소의 보다 가혹한 정책에 동조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최종 타협안의 내용이 보다 완화될 수 있었던 것은 로이드 조지의 중도적 입장 덕택이었다(파리 평화회의).
베르사유 조약은 영국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고, 1919년 8월 국왕은 로이드 조지 총리에게 메리트 훈장을 수여했다.
이 무렵의 중요한 국내문제는 아일랜드 사태였다. 신페인당은 영국 의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1919~21년 학살과 보복으로 점철된 내란상태가 계속되었다(신페인당). 1921년 여름 로이드 조지는 보수당 동료들과의 충분한 협의를 거쳐 아일랜드에 대한 억압정책을 포기하고 협상을 시작했고 급기야 1921년 12월 아일랜드는 독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골수 보수당원들에게 아일랜드 독립은 영국의 굴복을 의미했으며, 결코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1922년 이른바 서작추문(敍爵醜聞)이 일었다.
상하 양원에서 로이드 조지의 연립내각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추문의 내용은 귀족작위와 또 다른 훈위(勳位)들이 선거운동 자금을 충당할 목적으로 정례적으로 매매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차낙 사건이라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로 로이드 조지가 영원히 권력을 상실할 위기에 직면했을 때 보수당은 행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은 로이드 내각의 무모한 대외정책이 터키와 불필요한 전쟁위기를 초래했다고 생각했다. 보수당 지도부는 정당연립을 유지한 채 다시 한 번 의회를 해산하여 국민의 의사를 묻기로 결정했지만, 이에 대하여 당 내부에서 항명사태(抗命事態)가 일어났다. 건강악화로 은퇴했던(1921) 보너 로가 정치무대에 복귀했고, 10월 19일 보수당 의원의 과반수는 보수당 단독으로 총선을 치르자는 보너 로와 스탠리 볼드윈의 호소를 지지했다(볼드윈). 로이드 조지는 즉시 총리직에서 사퇴했다.
노년기와 평가
로이드 조지의 긴 황혼기는 왕년의 영화와 대조되는 우울한 것이었다.
애스퀴스파(派)와의 불화는 계속되었고, 1926~31년 쇠락한 자유당을 떠맡아야 했다. 이후에는 〈대전(大戰) 회고록 War Memoirs〉(1933~36)과 〈강화조약의 진실 The Truth About the Peace Treaties〉(1938)을 집필하는 데 전념했다. 1940년 처칠이 전시내각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으나 건강과 나이를 이유로 거절했다. 죽기 두 달 전 뒤보의 로이드 조지 백작으로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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