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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즌

다른 표기 언어 George Nathaniel Curzon, Marquess Curzon (of Kedles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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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59. 1. 11, 잉글랜드 더비셔 케들스턴홀
사망 1925. 3. 20, 런던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정치가.
Viscount Scarsdale, Baron Ravensdale, Baron Curzon of Kedleston(1898~1911), Earl Curzon of Kedleston(1911~21)이라고도 함.

개요

인도의 총독(1898~1905)과 영국의 외무장관(1919~24)을 지냈으며, 재임시 영국의 정책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초기생애

커즌은 더비셔 주에 있는 케들스턴에서 목사생활을 하던 스카스데일 남작 4세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양친의 방임적인 태도와 여자 가정교사의 독재적 성격(커즌은 그녀를 잔인하고 보복적인 전제군주라고 불렀음), 예비학교 교장의 전제성(교장은 체벌 신봉주의자였음)은 어린시절 커즌의 인격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튼 고등학교에서는 고집불통에 감수성이 풍부한 학생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때로는 교사들과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교과내용을 습득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남몰래 열심히 공부했으며 이튼 고등학교에서는 전례가 없었을 정도로 프랑스어·이탈리아어·역사 및 그밖의 여러 과목에서 우등상을 차지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878년 옥스퍼드대학교에 입학을 앞둔 커즌은 4년 전 승마 사고의 후유증으로 척추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휴식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충고를 물리치고 가죽으로 만든 보조기구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척추의 고통이 너무 심해 잠들기 위해서는 약을 복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성공에 가장 중요한 순간이나 영국의 국가적 행사에 참석하여 자제력을 잃고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은 그로 하여금 그의 정신을 단련시켜 신체적·정신적으로 꿋꿋하게 견뎌낼 수 있게 했다.

1880년에 옥스퍼드대학교 학생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883년에는 올솔스 칼리지의 특별연구원이 되었다. 상류층 출신들과 교분을 맺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던 그는 이로 인해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당했다. 이무렵 옥스퍼드대학교에서는 1편의 시가 널리 암송되었는데 커즌은 후에 이 시에 대하여 "이 저주받을 엉터리 시가 나에게 해를 끼친 것만큼 어느 한 개인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썼는데, 그 시는 "내 이름은 조지 너새니얼 커즌/나는 가장 우월한 인간/내 뺨은 분홍빛이고, 내 머리카락은 윤이 난다네/나는 매주 한 번씩 블레넘(당시 말버러 공작의 저택이었음)에서 정찬을 하지"라는 것이었다.

그는 2년 후 상원의 보수당 지도자인 솔즈베리 경을 위해 조사연구와 연설문 작성을 돕게 됨으로써 솔즈베리 가문의 세습적 저택인 햇필드 하우스에서 더 자주 정찬을 갖게 되었다.

노고의 대가로 솔즈베리 경의 추천을 받은 그는 랭커셔 주에 있는 사우스포트에서 보수당 후보로 의원선거에 출마했다. 사우스포트는 보수당의 승리가 확실한 지역이었으며, 커즌은 1886년 처음으로 의회에 진출했다. 의원의 임무는 잠시 접어두고 커즌은 솔즈베리 경의 승인을 받아 세계를 두루 둘러본 후 아시아에 매료되어 귀국했다.

이 여행과 이후의 여러 여행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중앙 아시아의 러시아 Russia in Central Asia〉(1889), 그의 대표작이 된 〈페르시아와 페르시아인의 문제 Persia and the Persian Question〉(1892)·〈극동의 문제 Problems of the Far East〉(1894) 등 3권의 저서를 썼다.

화려한 정치생활

1891년 11월 10일 커즌은 보수당 정권에서 인도 담당 차관직을 맡아달라는 솔즈베리 경의 요청을 수락하여 성공으로 연결되는 정계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사치스러운 생활로 인해 그가 겪고 있던 경제적인 어려움은 시카고의 백만장자 A.레이터의 딸 메리 빅토리아 레이터와 결혼한 후 쉽게 해결되었다. 이들의 결혼식은 1895년 4월 22일 워싱턴 D. C.에서 거행되었으며 결혼자금으로 수백만 달러가 소비되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와보니 솔즈베리 경의 결혼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외무장관으로 임명된 솔즈베리 경이 커즌에게 외무차관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한 것이었다.

그는 추밀원 고문관직을 겸임한다는 조건으로 이 제의를 수락하여 1895년 6월 29일 윈저 성에서 빅토리아 여왕에게 정식으로 서약했다. 이때부터 커즌은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898년 엘진 경의 후임으로 인도 총독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케들스턴 남작이 되었다(인도사). 영국 역사에서 최연소 인도 총독이 된 커즌은 화려한 생활과 다채로운 행사가 수반되는 이 직위를 매우 소중히 여겼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인도는 보석과 같은 식민지였다. 1899년 1월 3일 캘커타(지금의 콜카타)에서 화려한 도착 환영식을 관람한 후 커즌은 "나는 내 손에 주어진 임무가 어떤 것인지를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 이들을 이끌기 위해서는 엄청난 힘과 영감을 필요로 할 것이다"라고 썼다. 커즌은 그의 통치를 받고 있는 인도의 왕, 대군(maharajas), 지방 총수들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했지만, 인도 국민에 대한 자신의 사명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먼저 교육·경찰·민사행정에 대한 조사업무에 착수했다.

감세를 단행했으며 인도 국민을 부당하게 취급하는 모든 영국인들(영국 군인도 포함되었음)을 즉시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대외적인 문제에 있어서 그는 특히 인도의 국경에 관심을 집중시켜 페르시아 만을 순시했으며, 티베트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러시아의 야망을 좌절시키는 데 성공했다.

'성공적'이라고 자처한 인도의 각 지방을 순시하고 돌아와서 황폐해지던 타지마할을 재건하라고 명령했는데, 이후 그는 인도의 예술과 문화유산에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5년간의 임기가 끝나갈 무렵 커즌은 성공적인 통치를 인정받아 인도 총독에 유임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화려했던 영광의 시기가 끝나고 정치적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커즌 자신의 요청에 따라 당대 영국 최고의 군사적 영웅이었던 키치너 경이 인도군 총사령관 겸 군사장관에 임명된 것이다.

커즌은 키치너와 같이 화려한 전적을 가진 군인을 임용하면 자신의 이미지가 한결 더 부각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커즌은 영국에 있는 친구들, 특히 에셔 경으로부터 키치너는 '무례하고 무자비한 인물'이라는 경고를 계속 받아왔었다. 커즌과 키치너는 성격 차이로 충돌했으며 비양심적인 방법으로 서로를 음해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의 최후의 대립은 커즌의 완패로 끝이 났는데 이로 인해 사태가 절정에 이르렀다. 영국 정부가 자신의 편을 들 것이라고 확신한 커즌은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총독직을 사임하겠다는 내용의 전신을 본국으로 보냈다.

1905년 8월 16일 아침 사임이 수락되었다는 에드워드 7세의 전신이 도착했다. 커즌은 영국으로의 귀환을 연기했다. 그러나 그가 영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보수당은 이미 실각한 상태였고 인도에서 거둔 그의 업적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그는 은퇴한 총독에게 의례적으로 수여되는 백작작위도 받지 못했다.

그후 일시적으로 정계를 떠나 있는 동안 옥스퍼드대학교에서 탁월한 식견을 갖춘 명예총장으로 있었으며 이 대학교에서 다른 중요한 직위도 역임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그의 사랑하는 아내 메리가 죽었다. 아내의 죽음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지만, 아내에게서 상속받은 재산으로 그는 예술품이나 전통적인 옛 건축물을 수집하는 자신의 열정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링컨셔 주에 있는 태터스홀 성(1911)과 서식스 주에 있는 보디엄 성을 매입하여 복원시켰는데 이 성들을 모두 국가에 기증했다.

그의 정치적 야심은 잠들어 있었지만 결코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1911년 조지 5세의 대관식이 거행된 후 그의 야망은 되살아났다. 같은 해 커즌은 스카스데일 자작작위, 레이번스데일 남작작위 외에 백작작위를 수여받았다. 커즌은 정부가 두려워하고 있던 헌법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동료 상원의원들을 설득하여 의원법(이것의 주된 목적은 상원의 권한을 제약하는 것이었음)을 통과시킴으로써 자신에게 작위를 받게 해준 보수당에 감사의 뜻을 표현했다. 1915년 여름 커즌은 H.H.애스퀴스 총리의 연립내각에 참여했으며 그해 12월 로이드 조지가 총리에 선출되었을 때는 상원의 지도자가 되어 추밀원 의장을 역임했다.

이때부터 커즌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정책과 작전수행을 담당하는 비공식 자문위원으로 활약했다(의회법).

런던의 상류사교계에서는 한동안 커즌이 빨강머리의 화려한 소설가 엘리너 글린과 결혼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1916년 12월 커즌이 아르헨티나의 부유한 목장주의 미망인이자 미국의 외교관 J.먼로 힌즈의 딸인 앨프레드 더건과의 약혼을 발표했을 때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두 사람은 1917년 1월 2일 결혼했다. 첫번째 아내와의 사이에 3명의 딸을 둔 커즌은 새 아내가 자신의 작위를 승계할 수 있는 아들을 낳아주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희망과 실망이 얼룩진 시간들이었다.

노년기

커즌의 만년은 정치생활에서도 실망으로 채워졌다.

커즌은 인도에서의 쓰디쓴 경험을 통해 1가지 교훈을 얻게 되었는데,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결코 사임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산 교훈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왔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로이드 조지 총리가 이끄는 정부에서 커즌은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었고, 분명히 이 직위는 그에게 적합한 자리였다. 그러나 점차 커즌은 로이드 조지의 난폭한 지배경향으로 억압을 받거나 고립되었고, 그의 신중한 정책들은 실행되지 못했다. 만약 커즌이 이때 사임을 했다면 자유당의 지도자인 로이드 조지 총리를 경멸하던 보수당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총리의 자리에도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외무장관직에 머물러 있었고, 1922년 보수당이 집권하고서야 외무장관으로서의 전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커즌은 전후 유럽과 근동의 정치적·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등 1923년까지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며 외교업무를 수행했다. 임종을 앞둔 보수당의 총리 보나 가 사임을 준비하던 시기에 커즌은 자신의 외교적 성과가 총리직 임명이라는 대가로 보상받기에 충분한 것이라 여겼고, 그의 기대는 타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태는 그의 뜻대로 진전되지 않았다. 상원에 소속된 총리는 쉽게 다룰 수 없다는 두려움과 정치적 음모가 결합되어 하원의원인 스탠리 볼드윈이 총리에 지명되었다. 이것은 커즌의 희망을 물거품으로 만들었지만, 그는 자신이 볼드윈보다 총리직에 적임자라는 생각으로 볼드윈을 총리로 선출하게 될 회의의 사회를 맡겠다고 주장했다.

1924년 볼드윈은 커즌을 해임하고 오스틴 체임벌린을 외무장관으로 임명했다.

1921년 후작작위를 수여받은 후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지위를 승계받을 아들을 간절히 원했지만 이러한 커즌의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25년 3월 9일에 병으로 수술을 받은 후 2주가 채 못 되어 합병증으로 죽었다. 그의 죽음과 함께 후작작위와 백작작위도 소멸되었다.

그러나 자작작위는 후에 조카에게 계승되었고, 레이번스데일 남작작위는 큰딸 아이린 커즌에게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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