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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36. 9. 7, 잉글랜드 글래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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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08. 4. 22, 런던 |
국적 | 영국 |
요약
영국의 정치가.
본명은 Henry Campbell.
1905년 12월 5일부터 1908년 4월 5일까지 영국 총리를 지냈다. 그는 대중적 인기를 발판으로 자유당을 단결시켰으며, 보기드물게 단합된 강한 내각을 구성했다. 그는 남아프리카의 트란스발(1906)과 오렌지 강 식민지(1907)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데 앞장섰다. 그결과 보어인들은 남아프리카 전쟁(1899~1902)에서 영국에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에 대한 충성을 약속했다.
1868년부터 하원의원이 된 캠벨 배너먼(1871년 아버지의 성[姓] 인 캠벨에 어머니의 성인 배너먼을 붙였음)은 육군부 재무담당차관(1871~74, 1880~82), 해군부 정무차관 겸 재무담당차관, 하원에서의 해군부 대변인(1882~84), 아일랜드 담당 수석차관(1884~85), 육군부 장관(1886, 1892~95) 등을 역임했다.
1895년 6월 21일 그는 빅토리아 여왕의 사촌인 케임브리지 공작에게 군 총사령관직을 사임하라고 권유했다. 케임브리지 공작은 39년 동안 총사령관을 지내면서 군대의 개혁을 방해해옴으로써 변화의 필요성을 인정한 여왕은 그 조치에 대한 대가로 캠벨 배너먼에게 기사작위를 주었다. 그러나 하원에서는 자유당 소속 의원들이 거의 출석하지 않은 가운데 보수당이 제출한 캠벨 배너먼 봉급삭감 결의안이 표결에 붙여졌고, 그결과 정부가 패배하여 로즈버리 백작 5세의 내각이 총사퇴했다.
1899년 2월 6일 캠벨 배너먼은 극도로 분열된 자유당의 하원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남아프리카 전쟁 초기에 그는 자유당 내부의 제국주의자들과 전쟁에 반대하는 '친보어파' 사이에서 중도노선을 택했다. 그러나 1901년 6월 14일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자행하고 있는 야만적 행위'를 신랄하게 비난함으로써 당의 분열을 더욱 악화시켰다. 자유당 내부의 제국주의자들은 당을 탈당할 기세였지만 그는 이런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간신히 막았고, 1년 뒤에 전쟁이 끝나자 당의 긴장도 누그러졌다. 캠벨 배너먼은 당을 분열시킨 아일랜드 자치문제에 대해서도 이와 똑같은 '단계적인' 방식으로 접근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1905년말에 보수당 출신의 총리 아서 제임스 밸푸어가 사임하자 캠벨 배너먼은 친구인 에드워드 7세의 제의를 받아들여 신임총리가 되었다. 그의 내각에는 나중에 총리가 된 인물 2명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나중에 옥스퍼드와 애스퀴스 백작 1세가 됨)는 자유당 소속의 제국주의자였고,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친보어파였다. 또한 캠벨 배너먼 내각에는 노동계급 출신으로 영국에서 각료 자리를 얻은 최초의 인물 존 엘리엇 번스도 있었다.
1906년 1월에 실시된 총선에서 자유당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하원에서 다수의석을 차지했지만, 상원은 그의 입법계획을 무효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노동조합에 상당히 많은 파업의 자유를 부여한 노동쟁의법(1906)에 대해서는 귀족들의 승인을 받아냈다. 남아프리카의 트란스발과 오렌지 강 식민지에 대한 자치는 상원의 귀족들이 통제할 수 없는 공개 칙허장을 통해 부여되었다. 1907년에 캠벨 배너먼은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죽기 17일 전에 그는 애스퀴스에게 총리 자리를 물려주고 사임했다.
J. A. 스펜더가 쓴 2권으로 된 〈헨리 캠벨 배너먼 경의 생애 The Life of The Right Hon. Sir Henry Campbell-Bannerman, G. C. B.〉(1923)가 있다. 가장 권위 있는 캠벨 배너먼의 전기는 존 윌슨이 쓴 〈헨리 캠벨 배너먼의 생애 A Life of Sir Henry Campbell-Bannerman〉(1973)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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