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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0. 10. 10, 영국 런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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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5. 12. 30, 런던 |
국적 | 영국 |
요약 영국의 정치가·수석재판관·외교관.
1926년 하원의원으로, 1812년 아서 웰즐리가 웰링턴 후작이 된 이후 후작의 작위를 딴 최초의 의원이 되었다.
1887년 변호사 자격을 얻어 개업한 아이작스는 회사만이 아니라 노동조합들을 대변하면서 번창했다.
1904년 자유당원으로 하원의원에 선출되었다. 1910년 법무차관에 이어 법무장관을 지냈으며 1912년 각료의 자격을 얻은 최초의 법무장관이 되었다. 1913년 하원의 한 특별위원회는 아이작스와 뒤에 총리가 되었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및 다른 장관들의 부정혐의를 벗겼는데, 그것은 아이작스의 동생 고드프리가 전무이사로 있는 미국의 마르코니무선전신회사의 주식매입에서 일어난 혐의였다.
수석재판관으로 있을 때(1913~21) 반역죄로 기소된 아일랜드의 애국자 로저 케이스먼트 경에 대한 재판을 주재했다(1916).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영·미간의 관계를 강화시키기 위해 일했고, 미국으로부터 5억 달러의 전시 공채를 얻어내려고 교섭하는 영국·프랑스 협상 대표단을 이끌었다. 1914년 남작, 1916년 자작, 1917년 백작작위를 받은 레딩은 1918~19년 미국 주재 대사로 근무하는 동안에도 수석재판관직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1921~26년 인도가 민족자결운동으로 소란스러울 때 인도 총독으로 부임한 그는 회유를 원칙으로 하면서 즉결 처분에 의지하는 빈도가 높아졌다. 1921년 2명의 이슬람교 지도자와 1922년 마하트마 간디를 투옥했으며 모플라(Moplah:타밀나두 주의 이슬람교 분리주의자)들과 펀자브의 시크교 반군들에게 무력을 사용하기도 했다. 제임스 램지 맥도널드의 연립정부에서 레딩이 외무장관으로 지낸 짧은 기간(1931. 8~11)에는 별 사건이 없었다. 〈루퍼스 아이작스, 레딩 후작 1세 Rufus Isaacs, First Marquess of Reading〉(2권, 1942~45)가 후작 2세인 그의 아들 제럴드 루퍼스 아이작스에 의해 저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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