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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푸어

다른 표기 언어 Arthur James Balfour, 1st Earl of Balfour(of Whittingehame) 동의어 제1대 밸푸어 백작 아서 밸푸어, 영국 제 31대 총리
요약 테이블
출생 1848. 7. 25, 스코틀랜드 이스트로디언 휘팅햄.
사망 1930. 3. 19, 잉글랜드 서리 워킹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정치가.
Viscount Traprain이라고도 함.

밸푸어(Arthur James Balfour)

ⓒ Materialscientist/wikipedia | Public Domain

그는 영국의 보수당에서 50년동안 권력의 자리를 지켰다.

1902~05년 총리직을 역임했으며, 1916~19년 외무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시온주의에 대한 영국의 공식 승인을 표명함(밸푸어 선언)으로써 세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제임스 메이틀런드 밸푸어의 아들이자 제3대 솔즈베리 후작 로버트 세실의 조카인 밸푸어는 대단히 지적이고 부유한 귀족들로 구성된 서클의 회원이었다. 이튼 고등학교와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했으며, 케임브리지대학교를 졸업한 후 하트퍼드 출신 보수당 의원으로 의회에 들어갔다.

1879년에 〈철학적 회의에 대한 변론 Defence of Philosophic Doubt〉을 출판했는데, 이 저서에서 그는 과학적 지식도 신학 못지않게 믿음의 행위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했다. 빅토리아 왕조 시대에 벌어진 과학과 종교의 큰 싸움에서 그는 종교의 편에 섰다. 그는 과학과 철학 문제들에 대한 예민한 관심을 평생 잃지 않았다.

밸푸어는 그의 삼촌이 구성한 첫번째 내각(1885~86)에서 지방정부위원회의 위원직을 맡았다.

제2차 솔즈베리 내각(1886~92)에서는 스코틀랜드 담당 정무장관에 이어 아일랜드 담당 수석 정무장관으로 내각에 참여했다. 아일랜드의 자치에 대한 결사 반대자였던 그는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함으로써 '피에 굶주린 밸푸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와 동시에 아일랜드에서 영국인의 부재지주제도(不在地主制度)가 일으키는 폐단을 공격하고 '온정으로 자치의 욕구를 무마하고자' 여러 가지 양보를 했다.

의사 토론의 명수로 알려진 밸푸어는 1891년에 하원의 원내총무 겸 국가재정위원장이 됨으로써 솔즈베리 경에 이은 제2의 실력자로 군림했다.

W.E. 글래드스턴의 마지막 자유당 내각(1892~94)에서 밸푸어는 하원의 야당세력을 이끌었다. 그후 솔즈베리의 마지막 내각인 제3차 내각(1895~1902)에서 밸푸어는 삼촌의 건강이 약화됨에 따라 더욱 큰 실권을 잡게 되었다. 그는 남아프리카(보어) 전쟁(1899~1902)을 야기한 정책들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솔즈베리가 은퇴한 후 밸푸어는 1902년 6월 12일부터 1905년 12월 4일까지 총리직을 맡았다.

그는 지방의 초·중등학교 행정 개편을 골자로 하는 교육법(밸푸어법, 1902)을 발기·통과시켰다. 1903년에 제정된 윈덤 토지구매법은 아일랜드 소작농들의 토지 매도를 촉진시켰다. 1904년에 창설된 영연방국방위원회는 영국의 현실적인 세계전략을 가능하게 했다. 이상의 조치들은 어느 것도 유권자들에게 특별히 인기있는 것은 아니었다. 밸푸어는 또한 남아프리카의 광부 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막대한 인원의 중국인 노역계약자를 수입하기로 결정했는데, 이 결정은 인도주의자들과 영국의 조직노동자들로부터 규탄을 받았다.

1903년에 내각의 와해 위기를 겪은 후 영국-프랑스 화친협정(1904)을 성공적으로 체결함으로써 위신을 회복했는데, 그 협약은 이집트에 대한 영국의 지배권과 모로코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권을 상호 인정해 영국의 외교정책에 큰 전환을 불러온 협약이었다. 자유무역을 포기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보수당 내의 불화가 심화되자 밸푸어는 결국 총리직을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1911년 11월까지 공식 당수직을 유지했다.

1915년 5월 25일 H. H. 애스퀴스가 전시연립내각을 구성할 때 밸푸어는 윈스턴 처칠의 뒤를 이어 해군장관직을 맡았다.

1916년 12월의 정치 위기 상황에서 그는 애스퀴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의 지지세력으로 전향해 그가 새로 조직한 연립내각에서 외무장관직을 맡았다. 외무장관직을 맡고 있는 동안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의 수행이나 평화협상에서 별다른 역할을 맡지 못했다.

밸푸어의 가장 중요한 활동은 1917년 11월 2일에 이루어졌다.

이날 시온주의 지도자 카임 바이츠만과 나훔 소콜로프의 청을 받아들여 유대인 금융 재벌의 영국 지사 지사장인 로스차일드 남작에게 이른바 밸푸어 선언을 포함한 편지를 보냈다. 팔레스타인에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의 조국을 건설하려는 시온주의자들에 대해 영국의 지원을 약속한 이 선언은 이스라엘 국가의 건설에 큰 촉진제가 되었다(시온주의). 전쟁이 끝난 후 밸푸어는 추밀원의장의 자격으로 내각에 2차례(1919~22, 1925~29) 참여했다.

그는 영국과 영연방국가들 사이의 관계 정립을 위한 협상을 주도해 밸푸어 보고서(1926)를 작성했으며, 거기서 내린 정의는 1931년 웨스트민스터 제정법에서 명문화되었다. 1922년에 밸푸어는 백작의 작위를 받았다. 그의 저서 〈자서전 Chapters of Autobiograph〉(1930)은 B.E.C. 더그데일이 편집했으며, 더그데일은 〈아서 제임스 밸푸어 Arthur James Balfour〉(2권, 1936)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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