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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어 전쟁

다른 표기 언어 Boer War 동의어 앵글로 보어전쟁, 남아전쟁, 남아프리카전쟁

요약 병력면에서 영국군이 압도적인 우위를 가졌던 전쟁이지만 적대 국가 안에서 싸워야 했기 때문에 영국으로서는 많은 비용을 치른 전쟁이었다. 전쟁은 보어인이 영국군의 남아프리카 수비대 증강에 반대하여 1899년 10월에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영국군이 무방비 상태였으며 전투력도 허약했지만 보어인들은 현대식 소총을 활용해 주로 방어전을 펼치면서 잘 싸웠다. 키치너가 초토전술을 써 보어군에 보복하면서 승기가 바뀌었다. 대다수 농장들이 파괴됐으며 보어인들은 강제수용소에 격리, 가혹한 처우로 2만이 넘는 사람들이 죽어갔다.
수세에 몰린 보어군은 1901년 평화협정을 요구했지만 거부되었고 결국 1902년 5월 베레니깅 평화조약 이 체결됨으로써 독립을 잃었다.

보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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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사이에 영국이 벌인 전쟁 가운데 규모가 크고 가장 비용이 많이 든 전쟁이었지만, 처음부터 결과가 뻔한 전쟁이기도 했다.

남아프리카에 있던 영국군은 거의 50만 명이었지만 보어인은 기껏 8만 8,0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국군이 적대적인 국가 안에서 어려운 지형조건을 극복하면서 멀리 떨어진 본국으로부터 보급을 받아가며 싸워야 했던 반면, 보어인들은 주로 방어전을 펼치면서 현대식 소총을 효율적으로 써서 잘 싸웠다. 당시 양측은 현대식 소총 이상의 공격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대영제국).

전쟁은 보어인이 영국군의 남아프리카 수비대 증강에 반대하는 최후 통첩을 보낸 직후인 1899년 10월 11일 시작되었다.

전쟁이 일어난 직접 원인은 파울 크뤼에르 대통령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비트바테르스란트 광산지역에 사는 오이틀란더('외국인'이라는 뜻으로, 비(非)네덜란드인으로 주로 영국인을 가리킴)들에게 참정권 부여를 거부했고, 이에 대해 영국 총독인 앨프레드 밀너 자작 1세와 식민장관 조지프 체임벌린이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당시 세계의 통화체제, 특히 그중에서도 영국의 통화체제가 점점 더 금(金)에 의존하게 되던 상황에서 세계 최대 금광단지인 트란스발은 영국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은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에는 남아프리카에 있던 영국군이 전혀 무방비 상태였으며 전투력도 허약했다. 보어군은 두 군데에서 공격해왔는데, 하나는 트란스발에서 나탈로, 다른 하나는 오렌지 자유주에서 케이프 식민지 북부지역으로 쳐들어갔다. 당시 케이프 식민지 북부에서는 영국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나 이 반란군이 보어군과 연합했다.

검은 주간(Black Week 12. 10~15)에 보어인은 몇몇 중요전투에서 승리해 요충지인 레이디스미스·마페킹·킴벌리 등을 포위했지만, 많은 수의 영국군 지원부대가 상륙하자 전세는 차츰 바뀌었다. 그러나 영국군은 보어군이 레이디스미스 포위를 풀기 전 1900년 1월에 스피온콥에서 다시 패했다.

전쟁 제2기에는 키치너 경과 프레더릭 슬레이 로버츠 백작 1세가 이끄는 영국군이 포위된 도시들을 탈환하고 보어군을 무찔렀으며, 철도수송로를 따라 빠른 속도로 진격해 올라갔다.

영국군은 1900년 2월에 블룸폰테인, 5, 6월에는 각각 요하네스버그와 프리토리아를 점령했다. 크뤼에르 대통령은 트란스발을 떠나 유럽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그때까지 주로 군사작전에 한정되었던 전쟁이 결코 끝난 것이 아니었으며, 1900년말에는 최악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크리스티안 루돌프 데 웨트, 야코부스 헤르퀼레스 데 라 레이 등 뛰어난 장군들이 지휘하던 보어 의용군은 15개월 동안 영국군 기지와 보급망을 공격해 트란스발과 오렌지 자유주(영국이 오렌지 강 식민지로 편입시킨 곳)의 넓은 지역을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했다.

키치너는 철로변에 철조망과 방어참호를 설치해 보어군에 대응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초토전술(焦土戰術)을 써 보어군에게 보복했다.

보어인과 아프리카인의 농장들이 같이 파괴당했으며 시골에 살던 보어 주민들은 강제수용소에 격리되었다. 이 막사에서 보어인 여자들과 아이들이 겪은 비참한 생활은 전세계의 분노를 샀으며,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가혹한 처우로 비위생적인 수용소에서 죽어갔다. 보어 의용군은 공격을 계속해, 많은 수가 케이프 식민지 깊숙이 진격했으며 얀 스뮈츠 장군이 이끄는 군대는 케이프타운에서 80㎞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해들어갔다.

그러나 키치너의 거칠고 잔인한 전술이 서서히 효력을 발휘했다. 보어군은 1901년 3월 평화협정을 요구했지만 거부되었고, 결국 1902년 5월 베레니깅 평화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독립을 잃었다(베레니깅 평화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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