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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운동

다른 표기 언어 啓蒙運動

요약 1905~10년 개화파의 부르주아적 개혁론을 계승한 문명개화론자들의 국권회복운동(민족해방운동). 애국계몽운동이라고도 한다. 계몽운동가들은 유교적 인식을 바탕으로 일본과 중국, 서양 등의 사상을 수용했으며, 이념을 세우고 교육과 언론, 식산흥업 등의 분야에서 활동을 해나갔다. 계몽운동은 대한제국 시기 마지막 단계의 정치·사회 운동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가진다.

애국계몽운동이라고도 한다. 1905년 을사조약후 전개된 계몽운동은 국권회복과 근대국가 건설을 위해 애국의 기치하에 결집하여 실력을 양성하도록 국민을 계몽하자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은 주로 개화파를 계승한 지식층, 대한제국의 관료, 개명유학자들이었다.

사상적 기반

계몽운동가들은 유교적 인식을 근저에 깔면서 개화파의 맥을 계승하고, 그 위에 일본·중국을 통해 수용된 서양의 정치이론, 특히 일본의 문명개화론을 수용했다. 이들이 수용한 서양사상은 사회진화론이었다.

사회진화론은 서구자본주의 사회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서, '적자생존'·'우승열패'·'생존경쟁'을 자연계와 인간사회를 움직이는 기본원리로 삼았다. 즉 사회진보는 궁극적으로 부르주아 사회와 부르주아 세계의 강자가 되는 것이고, 그것은 이미 자본주의화하여 강대국이 된 서 유럽식 근대화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계몽운동가들은 많은 지방지회를 설립하기도 했으나, 개혁주체를 지배층으로 한정하여 일부 유생층만을 포괄하였을 뿐 농민층과는 연계를 갖지 못했다. 그후 이들의 이념은 일제강점과 더불어 분화와 변화를 보이면서 주로 준비론·실력양성론의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일부는 점진적이고 개량주의적 방향의 한계를 인식하고, 무력항쟁의 방법을 모색하여 만주 등지로 독립기지건설이나 무장항쟁에 나섰다.

전개

계몽운동의 이념(영웅주의·애국주의·국가주의)

민중층을 오직 계몽되어야 할 집단으로 설정할 때, 나라를 구하고 민중을 지도할 영웅의 존재는 필연적이었다.

그들이 거론한 영웅은 알레산데르 대왕, 나폴레옹, 이탈리아건국의 3걸, 제갈공명, 광개토대왕·을지문덕 등 국가독립이나 국력팽창·외침극복과 관련있는 인물이었다. 영웅주의는 곧 국가를 최우선시하는 논리로 발전했다. 영웅을 매개로 국권회복이라는 기치하에 국가를 위해서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개인의 인권신장보다는 국권회복과 독립의 수단으로서 새로운 입헌체제를 구상했다. 이때 개인의 인권은 오직 국권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한편 제국주의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고 부국강병을 추구하여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하는 것이 최상의 목표였기에, 그들이 강조한 민족주의도 민족은 곧 국가로 간주되었다.

계몽단체 활동

계몽단체 활동은 1904년 보안회의 황무지개척반대운동에서 비롯되었다. 이 활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곧 해산되었고, 의회제도의 실현을 목표로 한 헌정연구회가 설립되었으나 이 역시 정치결사라는 이유로 해체되었다.

그리고 사회문화활동·교육활동·산업진흥을 목표로 한 대한자강회, 그 후신인 대한협회, 그리고 서우학회·한북학회·서북학회·기호흥학회·호남학회등 여러 단체가 결성되고 기관지로서 학보도 발간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그러나 반식민지체제하에서 정치단체의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보안법을 공포하는 등 탄압을 가하자 합법적인 활동이 어려워졌으며, 계몽운동은 자연히 비밀결사화했다. 그 결과 조직된 단체가 신민회였다.

계몽운동의 방법(준비론·실력양성론·외교론)

계몽운동가들은 국권상실의 원인을 실력부족으로 생각하고,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실력을 준비하고 양성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준비론·실력양성론은 국권회복을 외교관계로 해결하려는 입장으로 나아갔다. 이들은 국가흥망이 외교관계에서 기인하고 외교를 잘하는 것이 국권을 회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인식했다.

국권회복을 주장하면서도 물질적인 기반이 약하다고 생각될 때 항상 거론되는 것이 정신이었다. 애국주의·민족주의·민족정신·국민정신 등의 강조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여기에서 이 운동의 영역은 자연스럽게 교육과 식산(殖産)으로 한정되었다.

영역

교육활동

계몽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영역은 학교설립을 통한 교육운동이었다. 각 지역을 연고로 설립된 각종 학회는 그 연고지의 교육을 개척하기 위한 것이었다. 1910년 통계에 의하면, 일제의 힘이 강하게 미친 관공립학교가 81개교, 준공립이 65개교인데 비해, 사립학교는 2,250개교였다. 교육내용은 수신이나 도덕과목을 중시하면서 애국주의를 불어넣는 것이었다. 또한 기독교의 선교활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기독교계 활동은 유교적 사고의 타파와 서양문명 보급에 이바지하였으나, 반일항쟁을 위해 민중의 역량을 이끌어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언론활동

계몽운동가들은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제국신문〉·〈만세보〉·〈대한민보〉등을 발행하여 사회근대화를 국민에게 계몽하고, 일제 침략상을 폭로하였다. 신문지법 등 사전검열제에 의해 반일독립여론을 조성하거나, 통감정치 자체를 부정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으나 또한 한국전래의 위인아나 외국침략에 저항한 인물의 전기를 출판하여 애국심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식산흥업

계몽활동은 식산흥업활동을 통하여 실력을 양성하고 자강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 운동을 담당했던 계층은 관료층, 지주층, 봉건적인 특권상인층이었다. 지주제를 자본축적의 골간으로 유지하면서 외자를 도입하여 산업을 진흥시키려고 한, 개화파가 주장한 식산흥업론의 연장선이었다. 식산흥업활동은 서울은 물론 계몽운동단체의 각 지회를 매개로 지방의 지주층·상인층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후 식산흥업은 한말의 활동을 바탕으로 특히 1910년대와 1920년대를 거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는 1920년대 이후 지주경영의 이익이 보장되지 않는 가운데 회사령 철폐후 전개된 일본 자본의 침투에 자극되면서 찾았던 활로였다.

역사적 의의

계몽운동은 대한제국 시기에 있어서의 부르주아적 정치·사회 운동의 마지막 단계이며, 이 시기에 가장 확대된 부르주아적 운동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중 속에 깊이 뿌리내린 운동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국권회복운동으로서는 일정한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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