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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05년 일본의 강압으로 5개 조문의 한일협상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반대하여 일어난 다양한 운동.
조선은 1905년의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고 반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1906년 2월에는 통감부가 설치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초대 통감이 되었다. 고종은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호소하기 위해 밀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고종은 도리어 퇴위당하고 제3차 한일협약(정미 7조약)이 조인되었다.
이 조약으로 법령의 제정, 행정처분, 고등관의 임면에도 통감의 동의를 구해야만 했고, 군대해산과 일본인 판·검사의 임명이 결정되어 일본이 내정을 완전히 장악하는 차관정치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시기에 일본의 식민지화에 반대하고 주권을 회복하여 자주독립을 이루기 위한 운동으로는 근대문물을 받아들여 실력을 양성하자는 애국계몽운동과 무력에 의한 직접적인 반일의병전쟁을 들 수 있다.
애국계몽운동은 개화파의 개혁이념과 독립협회의 활동을 계승한 반일운동으로 대개 지식인·학생·청년·상공업자들이 주도하여 도시에서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민중을 무지몽매한 대상으로 보고 계몽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1904년 보안회의 황무지개척 반대운동에서 비롯되어 헌정연구회·대한협회·서우학회·서북학회·기호학회 등 많은 계몽단체가 설립되었는데, 주로 언론·교육활동·국문연구·국사연구 등에 주력했다.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제국신문〉·〈대한민보〉 등이 발행되어 일제의 침략야욕을 폭로하고 민중을 계몽했다. 그리고 사립학교를 비롯한 각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을미사변과 단발령 때 봉기하여 항쟁했던 의병은 1905년 5월 이후 다시 봉기하여 친일파와 일진회를 공격했다. 당시의 의병투쟁을 주도한 이는 주로 유생이었지만 투쟁이 발전하면서 평민 의병장들이 다수 나타났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당하면서 많은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였다. 이전의 민간 의병들과 달리 이들 군인 의병들은 보다 조직적이고 효율적으로 많은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 이들 의병들은 한때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하는 등 맹렬한 기세를 떨쳤다. 그러나 일제가 우세한 화력으로 남한대토벌작전을 개시하면서 의병세력은 약화되어 국경지역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국권회복운동은 정부관료·양반유생에서부터 상인·농민·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을 망라하여, 그리고 서울·도시뿐만 아니라 농촌과 외딴 섬에서도 광범하게 전개되었다.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전쟁은 양자간에 계급적 입장과 정치인식을 달리하고 있었으나 반일이라는 측면에서 연계를 모색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실현하지 못했다. 다양한 계층과 이념을 내포한 채 반일민족운동으로 전개되었던 국권회복운동은 이후 점진적이고 개량적인 실력양성론과 직접투쟁을 주장하는 무장투쟁론으로 나뉘어 각자의 노선을 추구하게 되었다. → 계몽운동, 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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