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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교육과 산업발전을 통해 국력배양을 꾀하던 대한자강회가 일제 통감부에 의해 강제 해산 당하자, 그 후신으로 남궁억·오세창·장지연·지석영 등이 대한협회를 조직했다. 국력배양을 위해 정치·산업·교육을 발전시키고, 관인 폐습의 교정, 근면 저축 실행, 권리·의무·책임·복종 등 국민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했다. 한때 전국에 70여 개의 지회를 두고 수만 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그러나 일본인 고문 오가키의 술책과 일부 지도층의 친일화로 통감부의 침략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지 못하고, 의병 운동을 소요로 규정하는 등 그 성격이 친일로 크게 변질되었다. 1909년 친일 단체 일진회와 연합했다가 일진회가 한·일 합병을 적극 주장하자, 이들과 분리해 국민 대회를 열고 일진회를 규탄했다. 1910년 한·일 합병 후 해체되었다.
교육과 산업발전을 통해 국력배양을 꾀하던 대한자강회가 일제 통감부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자, 그 후신으로 남궁억(南宮檍)·오세창·윤효정(尹孝定)·장지연(張志淵)·권동진(權東鎭)·지석영(池錫永) 등이 대한협회를 조직했다.
국력배양을 위해 정치·산업·교육을 발전시키고, 관인 폐습의 교정, 근면 저축의 실행, 권리·의무·책임·복종 등 국민의식의 고취를 목적으로 했다. 한때 국민의 광범한 지지를 받아 전국에 70여 개의 지회를 두고 수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기도 했다. 교육부·법률부·재무부·실업부·지방부 등 5개 부서를 두고 세율 교정, 재산피탈사건 조사, 강연회 등을 통해서 국민 권리 보호에 앞장섰다. 또한 1908년 4월 〈대한협회회보〉를 창간해 월간, 국판으로 다음해 3월까지 통권 12호를 발행했다.
남궁억·신채호·이윤영(李允榮) 등이 주요필진으로 정치·사상·역사 등에 대한 교양·계몽에 힘썼다. 그러나 점차 일본인 고문 오가키[大桓丈夫]의 술책과 일부 지도층의 친일화로 통감부의 침략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지 못하고, 의병운동을 소요로 규정하는 등 그 성격이 친일로 크게 변했다. 1909년 친일단체 일진회와 연합했다가 일진회가 한일합병을 적극 주장하자, 이들과 분리해 국민대회를 열고 일진회를 규탄했다. 1910년 한일합병 후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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