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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06년(광무 10) 함경도 지역의 인사들이 국권수호와 실력양성을 위해 설립한 계몽운동단체.
한북흥학회라고도 한다. 1906년 10월 이준(李儁)·오상규(吳相奎)·유진호(兪鎭浩)·설태희(薛泰熙) 등이 발기하여 설립했다. 발기인들은 주로 신지식인·신흥시민층·중하급관료·무관들이었다. 조직은 중앙에 회장·부회장·평의원·간사원·서기를 두고, 지방에는 지회·지교를 설치했다. 그러나 함경도 각 지역의 유지보다 서울에서 거주하는 함경도 출신의 인사들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활동이 중앙회 중심이었고, 지방 지회의 활동은 활발하지 못했다.
초기 일반 대중들에게 국권회복을 위한 신교육의 필요성을 계몽하고 학교를 세우는 데 주력하여, 1907년 1월 사범학교 속성과인 한북의숙을 설립했다. 교사 양성을 목적으로 국사·세계사·지지·지문·물리·수신·교육·법률·경제·산술·체조 등 애국주의에 입각한 교육을 했다. 그리고 민력 양성을 위해 대중계몽운동을 전개해, 이준·이동휘(李東輝)·이종호(李鍾浩)·정진홍(鄭鎭弘)·강윤희(姜允熙) 등의 강연으로 일제의 침략성 폭로, 조국부흥, 완전독립, 민권사상 등의 내용을 선전했다. 한편 서우학회(西友學會)와 함께 청년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학리토론·지식교환·국권회복의 취지 아래 서북학생친목회를 만들어 지도자 양성에 주력했다. 그리고 의병장 최익현(崔益鉉)이 순국하자 의금(義金) 모집운동을 전개했고, 재정 지원자인 이용익의 죽음이나 이준의 분사에 대해서도 운동대책을 협의하는 등 현실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이런 작업의 결과 1907년 중엽에 이르러서는 관서·관북 지역에서 계몽운동이 대중적 뿌리를 내려 각 지역에 사립학교가 설립되고 계몽운동가·독립운동가 들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의 체결과 군대해산, 보안법의 공포 등 일제의 탄압기구와 탄압정책이 강화됨에 따라 이에 맞서기 위해 역량 통합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1907년 4월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의 창건에 학회의 주도인물들이 참가했고, 이에 기반하여 1908년 1월 서우학회와 결합하여 서북학회(西北學會)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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