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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양성론

다른 표기 언어 實力養成論

요약 일본 제국주의 지배하의 한국사회에서 타협적 민족주의자들(민족주의 우파)이 주창한 민족운동 방략의 하나. 일제강점기 내내 대두되었던 방책으로 자강운동론 단계, 실력양성론의 이론화 단계, 문화운동 단계, 자치운동 단계로 나뉜다. 자강운동론 단계에서는 <황성신문> 등을 창간하면서 교육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향상시킬 것을 주장했고, 실력양성론 이론화 단계에서는 일본과 서구의 문명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조선에 같은 방식의 문명을 적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문화운동 단계에서는 교육진흥운동, 물산장려운동 등의 문화운동을 벌였으며, 자치운동 단계에서는 자본을 이용한 창조경제를 도모하려 했다. 이와 같은 실력양성론은 의도와 다르게 일제의 지배정책에 놀아나게 되었다는 비판을 받으며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과의 대립을 이루었다.

개요

실력양성운동론이라고도 한다.

한민족은 아직 독립할 수 있는 힘이 부족하므로 먼저 자체 역량을 기르는 것이 급선무라는 주장이다. 실력만 갖추어지면 독립의 기회는 저절로 온다든가, 또는 전쟁 등으로 국제정세가 변화하여 독립의 기회가 오더라도 독립할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 그 기회를 이용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1905~10년에 '자강운동론'을 주창했던 이들은 1910년대에 실력양성론을 이론화하면서 구사상·구관습 개혁론을 내세웠다. 이들의 정치사상·운동론은 1920년대 초반 '문화운동론'으로 완성되었으며, 1920년대 중반 이후 1930년대 초반 사이에는 '자치운동론'으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자강운동·문화운동·자치운동은 모두 실력양성론을 기본내용으로 하고 있다.

자강운동론 단계(1905~10)

자강운동론은 대한협회·〈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청년학우회 계열들이 제창했다.

황성신문

황성신문 창간호

ⓒ Straitgate / wikipedia | Public Domain

이들은 실력양성의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교육과 산업의 진흥, 신학(新學)의 수용, 구관습의 개혁을 주장했다. 이들은 생존경쟁의 법칙이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 실력이 없는 민족과 국가가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강국의 침략을 받는 것은 당연하므로, 하루 빨리 실력을 기르는 것만이 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논리는 당면한 독립의 과제를 후일로 미루었을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의 침략을 제국주의 이론인 사회진화론, 문명개화 지상론 등으로 합리화시켜주는 것이었다.

〈대한매일신보〉 계열은 1909년경 뒤늦게 그 한계를 인식하고 선독립론(先獨立論)과 국수보전론(國粹保全論)을 주창했다.

실력양성론의 이론화 단계(1910년대)

1910년의 한일합병을 계기로 한말의 자강론자들 중 대부분은 민족운동 대열에서 탈락하고, 일부는 국외로 망명했으나 실력양성론은 그대로 계승되었다.

1910년대 이후 실력양성론의 주체는 1905년 이후 1910년대말에 걸쳐 국내외 특히 일본에서 신교육을 받은 지식층이었다. 일본에서 근대자본주의 문명의 위력에 압도되고, 또 서구의 부르주아적인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조선에 그러한 자본주의 문명을 건설함으로써 국권회복의 발판을 마련하려고 했다.

문화운동 단계(1920년대 초반)

일제가 3·1운동에 대응하여 기만적인 '문화정치'를 실시하자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실력양성론을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기고자 했다.

이광수는 1922년 〈민족개조론〉을, 1924년에 〈민족적 경륜〉을 발표하여 민족성 개조를 중심으로 한 실력양성이론을 다듬었다.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신문화 건설, 신교육 보급, 민족자본 육성 등을 목표로 청년회운동·교육진흥운동·물산장려운동 등 '문화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은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교육열을 발흥시키는 등 계몽적인 신문화운동으로서 나름대로의 의의가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2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첫째, 문화운동론자들이 '신문화건설'을 민족운동의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내세움으로써 결국은 민족운동의 탈정치화, 체제내적인 운동으로 전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둘째, '실력양성'이라는 개량적 방법을 통한 독립운동을 내세움으로써 민족주의 운동을 '개량주의적 운동'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자치운동 단계(1920년대 중반~1930년대초)

1923~24년에 〈동아일보〉 계열, 천도교 신파의 최린, 국외의 안창호 등은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단계로서의 자치권획득운동을 전개했다(자치론). 제1차 자치운동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의 강력한 반발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총독부의 부추김으로 자치운동은 계속되었다. 자치운동은 기본적으로 자본의 확대재생산을 도모하면서 예속자본으로 전락하고 있던 민족자본 최상층과 정치적 욕구를 충족하려 했던 일부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운동방략이었다. 따라서 자치론자들의 '실력양성 우선론' 등은 독립운동으로부터 후퇴한 자치운동의 타협성을 은폐하기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타협적인 민족주의자들은 민족독립의 한 방략으로 실력양성론을 제기했으나 결국에는 일본제국주의의 지배정책에 이용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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