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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을사조약 체결 후 계몽운동가들이 주권회복운동의 한 방법으로 설립했다. 초대회장은 이용직, 부회장은 지석영이 맡았고 경기도 6개군, 충청북도 4개군, 충청남도 7개군에 지회를 두고 학교설립을 추진했다. 그리고 부족한 교사양성을 위하여 1908년 6월 서울에 기호학교를 설립하여 3년 과정의 본과와 1년 반 과정의 특별과를 두었다. 8월 월간지 〈기호흥학회월보〉를 창간, 1909년 7월까지 통권 12호를 발행했으며 발행인은 김규동, 편집인은 이해조였다. 국권회복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하여 제6, 9~11호를 압수당하기도 했다. 이 학회는 표면상으로는 교육진흥을 강조하고 있었지만, 그 근본은 민족사상 및 독립의식 고취에 있었다. 1910년 9월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계몽운동가들은 주권회복운동의 방법은 교육, 민족의식 고취, 계몽활동에 있다고 생각하여 여러 계몽단체를 설립했다. 그중에는 지역사회의 개발과 발전을 표방한 학회들이 있는데, 기호흥학회는 그 대표적인 단체이다.
기호지방을 중심으로 시작해 전국으로 범위를 넓혀 교육에 헌신하기 위한 단체라고 취지를 밝혔으며 초대회장은 이용직(李容稙), 부회장은 지석영(池錫永)이었다.
경기도 6개군, 충청북도 4개군, 충청남도 7개군에 지회를 두고 학교설립을 추진했다. 그리고 부족한 교사양성을 위하여 1908년 6월 서울에 기호학교를 설립하여 3년 과정의 본과와 1년 반 과정의 특별과를 두었다.
8월 월간지 〈기호흥학회월보〉를 창간, 1909년 7월까지 통권 12호를 발행했다. 발행인은 김규동(金奎東), 편집인은 이해조(李海朝)였다. 국권회복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하여 제6, 9~11호를 압수당하기도 했다. 이 학회는 표면상으로는 교육진흥을 강조하고 있었지만, 그 근본은 민족사상 및 독립의식 고취에 있었다. 1910년 9월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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