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요약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1897년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10월에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했다. 대한제국은 자주독립 국가임을 밝히고 국방력을 강화시켰다.
내각은 보수파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왕권 강화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이런 움직임은 독립협회의 저항을 받았고, 독립협회는 의회 개설을 주장했으나 정부 탄압으로 강제 해산됨으로써 왕권의 전제화 경향은 더욱 커졌다.
1904년 일본이 러일 전쟁을 일으켰고 대한제국은 국외중립을 선언했으나 일본의 위협으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했고 이듬해 을사조약을 통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당했다. 조선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조선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했으나, 일본은 이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1910년 강제로 대한제국을 일본에 병합했다.
대한제국의 성립
청일전쟁(1894~95)의 결과 임오군란(1882) 이래 조선에서 강력한 지위를 유지해오던 청국이 후퇴했다.
대신 일본이 그지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요동반도를 획득함으로써 만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틀까지 마련했다. 일본은 러시아·프랑스·독일의 간섭을 받아 요동반도를 청국에 반환했다(삼국간섭, 1895. 5) 삼국간섭의 영향으로 일본의 지원하에 개혁(갑오·을미 개혁)을 추진해오던 온건개화파 내각이 동요하는 반면, 왕비 민씨의 지지를 받는 보수파 인물들이 입각함으로써 정부는 배일·친러적 경향을 띠어갔다.
일본은 퇴세(退勢)를 만회하기 위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했고(→ 을미사변, 1895. 8), 내각은 다시 온건개화파로 개편되었다. 이 새 내각은 명성황후 시해와 같은 중요한 사건을 호도하는 대신 단발령(斷髮令:1895. 11. 17)과 같은 과격한 시책을 펴나갔다.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와 친일내각의 단발령은 민심을 동요시켰으며,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와 단발의 반대를 표방한 의병이 전국 각처에서 일어났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데 성공했다(아관파천, 1896. 2). 그결과 친일 온건개화파 내각은 실각하고 새로운 내각이 구성되어 대한제국에서는 일본 세력이 약화되는 반면 러시아의 진출이 현저해졌다. 한반도에서 열강간의 세력균형이 틀을 잡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조선은 임오군란 이후 청국으로부터, 청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으로부터 극심한 내정간섭을 받아 심지어 왕비가 학살되기까지 했다.
아관파천 이후에는 다시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받기 시작했으며, 중요한 이권이 차례로 외국인에게 넘어갔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조선 내부에서는 국민적 자각이 일기 시작하여 당시 국가의 중요한 과제가 자주 독립에 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독립문 건설운동(1896)은 이러한 국민적 자각을 반영하는 것이며,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慶運宮:德壽宮)으로 환어(還御)한 것(1897. 2)도 같은 맥락에서 비롯되었다.
청일전쟁 이후 청국의 후퇴와 아관파천 이후 열강 간의 세력균형이 대한제국 성립의 외적 요인이었다고 한다면, 아관파천은 그 전후하여 일기 시작한 자주 독립에 대한 국민적 여망이 내적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국왕을 황제로 존칭하여야 한다는 논의는 1884년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 인사들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정변이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칭제(稱帝) 논의도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뒤 을미사변 직후 친일적 각료를 중심으로 다시 칭제논의가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국왕을 황제로 존칭하고 국호를 대조선제국으로 고치며 10월 26일 즉위식을 거행한다는 각의의 결정을 보았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명성황후 시해 등 당면문제를 호도하려는 일본측의 의도가 작용하고 있었으며, 그때문에 러시아·프랑스·미국의 반대를 받아 실현되지 못하였다. 칭제논의는 1896년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면서 재개되었다. 제일 먼저 국왕에게 칭제를 건의한 사람은 상하이[上海]에서 김옥균(金玉均)을 암살한 홍종우(洪鍾宇)로 전해지고 있다.
국왕도 일찍부터 칭제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홍종우의 건의를 환영하였다. 그러나 국왕은 열강의 반대를 우려하였다. 그리하여 밀지(密旨)를 내려 제위(帝位)에 오르도록 진정하게 하는 우회적 방법으로 이를 추진하였다. 1897년 5월 이후 정부관원, 각도 유생, 시전상인과 일부(개신유학 계열) 독립협회 회원 등 각계각층의 잇달은 칭제 요청은 그 대부분이 국왕의 밀지와 관련있는 것으로 보인다.
열강도 이당시 이미 러시아·프랑스·일본·영국을 주축으로 하여 세력균형이 이루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일본·미국·영국 등이 냉담한 편이었지만, 그 어느쪽으로부터도 칭제에 대한 직접적인 간섭은 없었다.
그리하여 정부주도하에 제위에 오르는 준비가 착실히 진행되어 갔다. 이해 8월 1일부터 사용한 연호가 광무(光武)로 정해지고,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원구단(圓丘壇) 자리가 남서(南署) 회현방(會賢坊) 소공동(小公洞:지금의 조선 호텔)으로 정해져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어 의정대신 심순택(沈舜澤), 특진관 조병세(趙秉世) 등의 의례적인 황제요청이 계속되는 가운데 즉위식 거행 일자가 10월 12일로 결정되었다.
예정대로 이 날 원구단에서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13일에는 국왕이 제위에 오른 것과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정하였음을 선포하였고, 14일에는 이러한 사실을 외부를 통하여 각국 공사관·영사관에 통보하였다. '대한'(大韓)은 삼한(三韓)을 통합하였다는 뜻을 갖는 것이라고 한다.
대한제국의 시책
아관파천 이후 내각은 국왕 측근의 보수파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 점은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더욱 그러했다. 자연 정부의 시책도 국왕이 "구규(舊規)로 본(本)을 삼고 (여기에) 신식(新式)을 참고한다"고 천명한 데서 보이듯, 갑오·을미 개혁을 반성해 전통적인 제도와 연결·타협하려는 복고적 성격을 띠는 경향이 있었다. 정부시책의 복고적 경향은 왕권의 강화·전제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갑오·을미 개혁 당시 왕권은 매우 위축되어 국왕이 제한군주적 지위로 격하되는 반면, 내각의 권한은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
그런 만큼 아관파천 직후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1896년 내각제를 다시 의정부제로 개편하면서 그 권한을 대폭 약화시킨 것, 1899년 군의 지휘 감독권을 갖는 원수부(元帥府)를 창설하면서 황제가 대원수로 취임한 것도 그러한 노력이었다.
왕권의 강화·전제화의 움직임은 독립협회(1896~98)의 저항을 받았다.
그동안 독립협회에서는 외국인에 대한 이권양여 등 정부가 시정과정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그 개선책을 정부에 건의해왔다. 그런데 독립협회에서는 이러한 비정(秕政)의 궁극적인 원인이 왕권의 전제화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갑오개혁 당시 내각의 부속기관으로 설치된 중추원(中樞院)을 의회로 개편해 왕권의 전제화를 견제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의회개설 운동은 정부의 탄압을 받아 좌절되었고, 독립협회도 해산당하고 말았다.
독립협회가 해산되면서 왕권의 전제화 경향은 더욱 촉진되었다. 그것을 잘 말해 주는 것이 대한제국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대한국제(大韓國制)의 선포(1899)였다. 대한국제에 의하면, 황제는 무한 불가침의 군권(君權)을 향유할 뿐 아니라 입법·사법·행정·선전강화·계엄·해엄의 권한까지도 갖는다고 규정되어 있다. 갑오·을미 개혁 당시 위축되었던 국권을 복구시켰을 뿐 아니라 여기에 서구의 절대왕정 체제를 도입해 대한국제 제2조에 규정한 바와 같이 완전한 전제정치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시책의 복고적 경향은 황실재정의 강화에서도 나타나 있다.
갑오·을미 개혁 당시에는 왕권을 뒷받침해 주는 왕실재정도 정부의 통제를 받아 대단히 약화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아관파천 이후 왕권을 강화해가는 과정에서 왕실 재정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가 취해졌다. 왕실예산이 정부예산에서 독립되고 궁내부에서 징수하던 각종 명목의 잡세(雜稅)가 부활되었으며, 궁내부도 홍삼제조, 백동화(白銅貨) 주조의 특허, 관개·수리·광산·역둔토·철도사업 등에 관한 권한을 이관시켰으며 매관매직까지 자행했다. 그리하여 황실재정은 현저히 개선되어갔다.
이처럼 대한제국 정부의 시책은 왕권의 강화·전제화, 황실재정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확실히 복고적 경향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밖의 시책에 있어서는 갑오·을미 개혁을 이으면서도 주체성을 엿볼 수 있는 여러 가지 개혁작업을 추진해갔다. 대한제국 정부의 시책을 '광무개혁'(光武改革)이라고 부르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대한제국 정부는 대한국제 제1조에서 "대한제국은 세계만국의 공인되어 온 바 자주 독립하온 제국이니라"고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국가의 자주독립을 추구하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국방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먼저 1902년 경군(京軍)은 을미개혁 당시 3개 대대에 지나지 않았던 친위대(親衛隊)를 2개 연대로 증강하고, 2개 연대의 시위대(侍衛隊)를 창설했으며, 호위군(扈衛軍)도 호위대(扈衛隊)로 증강·개편했다. 지방군도 을미개혁 당시 2개 대대의 진위대(鎭衛隊)가 있었을 뿐이었는데 이를 6개 연대로 증강시켜 경기도·경상북도·평양과 국경지대에 배치했다.
자주독립을 하기 위한 여러 조치도 취해졌다.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1902년 국가(國歌)가 제정되고, 1903년 국민개병을 원칙으로 하는 징병제도에 관한 조칙이 내렸다. 해삼위(海蔘威)·간도 교민을 보호하기 위해 해삼위통상사무(海蔘威通商事務)·북간도관리(北間島管理)가 설치·임명되었고, 북간도의 영토편입이 추진되었으며, 1899년 오랫동안 종주권을 주장해 오던 청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해 공사를 교환했다.
갑오개혁 당시부터의 과제였던, 국가의 재정적 기초를 튼튼히 할 양전(量田) 사업도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1899~1903년 2차례에 걸쳐 전국 토지의 2/3에 해당하는 218군에 대한 양전을 마쳤다. 양전사업이 진행되면서 근대적 소유권제도로의 발전을 뜻하는 지계(地契)의 발급도 촉진되었다. 그러나 양전사업이 중단되면서 지계발급 사무도 중단되었다. 상공업정책도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그결과 섬유·철도·농업·운수·광업·상사·금융 부문에 이미 특권적 성격을 벗어난 근대적 회사들이 설립되었으며, 근대 과학기술을 응용한 방직·정미·측량기계와 윤선(輪船) 등이 제조되었다.
또 1902년 경제생활의 기준이 되는 도량형에 관한 규칙이 제정되어, 1903년 전국적인 실시를 보게 되었다.
교육정책은 근대적 상인, 기술자의 양성을 목표로 한 실업교육이 강조되었다. 이를 위해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기도 했지만, 상공학교·광무학교 등 많은 공립실업학교가 세워졌다. 각지에 세워진 많은 사립학교들도 대부분이 실업교육을 표방하고 있었다. 정부의 실업교육 강화정책이 민간에도 반영되었고, 또 그것이 절실한 과제로 여겨졌다.
통신·교통 시설도 개선되어 우편·전보망이 정부 자력에 의해 전국적으로 확충되어갔으며, 서울·인천·개성·평양 등지에 전화가 개설되었다. 그러나 철도는 처음부터 외국인에게 특허되어 외국기술과 자본에 의해 부설되었다. 1902년 정부에서는 철도 자영책을 시도해 경의철도 부설에 착수했지만, 기술과 자본의 부족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사회복지 측면에서도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시책이 추진되었다. 1899년 종합병원인 광제원(廣濟院)이 설립되었고, 1900년 순회재판소가 설치되었으며, 1901년 구휼기관인 혜민원(惠民院)·총혜민사(總惠民社)·분혜민사(分惠民社) 등이 설립되었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1900년부터 관원들이 관복으로 양복을 입게 되고, 1902년 단발령이 다시 내려 관원들이 상투를 자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대한제국 정부의 시책(개혁)에는 간과할 수 없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개혁에 소요되는 재정적 뒷받침이 없었다고 하는 점이다. 제도의 창설·증설·개편은 재정 수요를 증대시켰지만, 세원(稅源)은 증대되지 않았고, 그 세원마저 황실에 의하여 잠식당하고 있었다.
양전사업도 재정수입의 증대를 위한 것이었지만,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중단되었다. 러시아·미국·영국 등으로부터의 차관교섭도 여의치 않았다. 미봉책으로 실질가치보다 명목가치가 높은 백동화를 많이 만들어내어 급증하는 재정수요에 충당했다. 그러나 이는 정부의 재정형편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국민들의 경제생활을 위협했다.
황실재정의 개선책에도 문제가 있었다.
각종 명목의 잡세의 부활은 민중들의 생활을 도탄에 빠뜨리고 역둔토·광산·홍삼사업 등의 궁내부 이관은 그만큼 정부재정을 위축시켰으며, 매관매직은 관원들의 부정부패를 조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황실재정 개선책은 민중의 경제생활과 정부재정을 희생시키고 부정부패를 조장시키는 가운데 추진된 것이었다. 철도부설권이나 광산채굴권과 같은 이권이 외국인에게 양여된 것도 문제점이었다. 외국인에게 이러한 이권을 양여한 것은 아관파천을 도운 대가의 지불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오고 대한제국이 성립된 뒤에도 열강의 압력을 받아 이권은 계속 양여되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해체
일본은 아관파천을 계기로 한국에서 정치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청일전쟁 이후의 산업발전을 배경으로 한국에서 경제적 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일본의 경제적 진출은 러시아와 제3차 러일협정(니시-로젠 협정:1898) 체결로 보장받았다. 그리하여 일본은 정치적 측면에서의 열강 사이의 세력균형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측면에서는 조선에서 우월한 지위를 유지해 갔다. 그것은 정치적 재진출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기도 했다. 1896년 이래 유지되어 오던 조선에서의 열강 사이의 세력균형은 1902년 영일동맹이 성립됨으로써 파탄이 일기 시작했다.
1900년 청국에서 의화단(義和團) 봉기가 일어나자, 열강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공동 출병했는데, 이때 만주에 파견했던 러시아는 반란이 진압된 뒤에도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음으로써 만주를 영구히 점령할 태세를 보였다. 이는 러시아와 대립관계에 있는 영국과 일본에 대한 큰 위협이 되었다. 이에 영국과 일본은 러시아를 가상 적국으로 하는 동맹을 체결했다. 이 동맹에서 영국은 청국에서의 이권을 일본으로부터 승인받고, 일본은 조선에서의 특수권을 영국으로부터 승인받았다.
영국과 동맹을 맺은 일본은 러시아에 대해 만주에서 철병할 것과 조선에서의 일본의 특수한 지위를 인정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여러 차례에 걸친 협상은 실패로 끝났다. 1904년 2월 무력으로 문제 해결을 결정한 일본이 뤼순[旅順]을 기습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은 시작되었다.
이미 경제적으로 조선에 깊숙이 진출한 일본은 이제 정치적으로도 재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조선에서 열강간의 세력균형이 깨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1904년 1월 러·일간에 전운이 감돌자 국외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은 시정개선충고를 조선 정부에 강요하여 수용하게 하고, 조선에서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1904년 2월에 성립시켰다.
이와 함께 일본은 조선 정부에 강요하여 한·러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을 폐기시켰고 통상만을 접수했으며, 조선의 해안과 하천의 항해권도 획득했다. 이어서 동년 8월 일본이 추천하는 재정고문·외교고문 각 1명을 초빙하는 한일협정서(韓日協定書:제1차 한일협약)를 조선정부에 강요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재정고문·외교고문뿐 아니라, 군부·경찰·궁내부고문 및 학부참여관의 초빙까지 강요함으로써 정치의 실권이 일본인 고문에게 들어가는 '고문정치'가 시작되었다.
전세는 일본의 승리로 굳혀갔다. 1905년 7월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태프트협약을 체결하여, 일본의 조선지배를 승인했다. 영국도 동년 8월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일본의 조선지배를 승인했다. 이런 가운데 1905년 9월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주선으로 러일간에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중요한 내용은 일본이 조선에서 정치·군사·경제에 관한 특수이익을 가지며, 조선에 대하여 지도·보호·감리 등의 조처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조선침략(식민지화)이 국제적으로 승인된 것이다.
조선침략을 국제적으로 승인받은 일본은 식민지화 작업을 예정된 계획대로 추진해 갔다. 1905년 11월 조선 정부에 강요하여 일본이 조선 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일본인 통감을 조선 황제 밑에 두는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을 성립시켰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되었던 것이다. 한국민들은 이 조약에 맹렬히 반대했다. 1907년 6월 황제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조선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했다. 일본은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퇴위시켰으며, 한일신협약을 강요하여 통감이 조선의 내정 전반에 간섭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뿐만 아니라 이 조약에서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 관리를 임명하도록 함으로써 각 부의 차관 이하 관리에 많은 일본인들이 임명되었다.
고문정치에 이어 차관정치가 실시된 것이다. 또 이 조약이 체결된 직후 조선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제 형태만 남게 된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2일 일본에 한일합병조약을 강요당함으로써 멸망했다. 한반도에서 열강간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지면서 성립된 대한제국은 그 세력균형이 깨어짐에 따라, 한민족의 구국투쟁에도 불구하고 붕괴되었던 것이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조선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